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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Nov 20. 2018

길들여지길 바랐다

어린왕자와 여우의 뒷 이야기.. 

- 넌 아직은 나에겐 수많은 다른 소년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소년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난 너를 필요로 하지 않고, 난 너에게 수많은 다른 여우와 똑같은 한 마리 여우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너에겐 이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 거야.

에둘러 말했지만 사실 여우는 알고 있었다. 
이미 어린 왕자는 누군가를 자신의 세계 안에서 길들이려 하거나, 혹은 스스로 누군가에게 길들임을 당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걸. 오로지 그가 찾고자 하는 건 '자신' 일 뿐이라는걸. 그럼에도 여우는 바랐다. 어리석은 바람에 불과할지라도 그 정도의 마음이었을 테니까. 그의 존재 앞에서만큼은 세상 하나 밖에 없는 특별한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어떤 충동적인 욕망. 

대꾸하지 않은 채 지그시 여우를 바라볼 뿐이었던 어린 왕자에게, 여우는 다시 말을 건네기로 했다. 
그와의 연결고리가 끊어질까 봐 매달리는 듯한 약간의 불안함을 감추며. 우리의 연결이 이렇게라도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만이 그녀를 옥죄여 오는 것조차 스스로 알아채지 못한 채. 여우는 그렇게 말을 다시 건넸다. 

- 네가 장미에 푹 빠져 있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어. 알고 있는대도 이 모양이야. 
- ... 그 무엇에도 푹 빠진 적은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다만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지. 
- 넌 날 바라보지 않잖아. 길들이고 싶단 생각, 하지 않잖아. 
- 지금 바라보고 있어. 
- 아니. 넌 날 보고 있지 않아. 보려 하지 않았으니까. 
-...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해... 
-.... 잔인해. 넌 정말 잔인한 사람 동물이야. 
- .. 
- 너에게서 도망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어. 이미 마음이 날 앞서 나갔어. 난..
- 넌.... 뭘 원해. 
- 말했잖아. 너에게 길들여지는 것. 하나 밖에 없는 여우가 되길 바라.. 왜 그걸 모르니 
- 알아... 그렇지만... 누군가를 길들이거나 길들임을 당한다는 건 애초에 있을 수가 없는 일이야. 
- 있을 수가 없는 일이 있기를 바라는 나는. 그럼 내 존재는 도대체 너에게 뭐란 말이지. 
.- .. 네 존재를 내게서 찾으려고 하지 마. 넌 그래야 해. 아니 우리는 그래야 해. 그래야 살 수 있어. 
- 산다는 게 이렇게 구질구질한 건지 이제야 알았어. 네 덕분에 이제야 알았다고! 
- ...울지 마. 난 널... 지금 널 바라보고 있어. 내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건 너야. 다른 누구도 아니잖아. 
-..... 사랑해. 
- 넌 널 정말 사랑하는구나... 네가 들킨 건 날 사랑하려는, 내게 길들여지고 싶은 마음이 아닐 거야.
- 무슨 소리야...
- 바로 너 자신을 너무 아끼다 못해 넘쳐난, 널 향한 너의 마음이라는걸. 이제는 외면하지 마 
-.....


비수같이 차갑게만 느껴졌던 그의 말에, 여우는 그저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여우는 알 것 같았고, 아니 알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길들임을 받고 싶다는 건 사실은 거짓말이었으니까. 사실 여우는 그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 자신의 단단한 사랑을, 그녀라는 자신 자체를 믿고 싶었던 것이고 그걸 그저 그를 통해 증명받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녀가 현재를 살아가며 지금 이 순간을 지내고 있다는 것에 때로 믿을 수가 없을 만큼 자신이 없어져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숨 막힘이 가끔 그녀를 찾아왔기에. 여우는 다시 어린 왕자에게 말을 건넸다. 

- 알아.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렇지만 난. 
- ...
- 네게 길들이고 싶다는 건 너의 세계 안에서 내가 살아있기를 바랐다는 말이었어. 
- 알고 있었어..
- 알고 있었다고? 
- 응. 네가 얼마나 나를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어. 
- ... 그런데 어쩜 그래. 어째서 그렇게 조용할 수가 있는 거지. 
- ... 조용하다고 널 보고 있지 않다는 게 아니라는걸, 너도 잘 알 텐데 
- ... 넌 가끔 너무 어른인 척해. 
- 우리 모두 어른이지만 또 어른이 아니라는 것도 알잖아. 
- 너.. 길들임의 도덕이 뭔지 아니?
- 뭔데
- 그건.. 지배 충동이야. 
- 충동?
- 네가 하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게 있어. 
- 뭔데
- 내가 네게 길들임을 받길 원한다는 건 네가 나를 때때로 지배하길 바라는 충동이 있어서야
- 어째서 그래야 하는데 
- 사실 누가 누굴 지배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지만.
- .....
네가 죽더라도 내 마음에서 널 추억하면 넌 언제까지도 살아있는 존재야. 
- 아...
- 그렇지만 네 생명이 살아있는 그 시간 동안, 너에게 지배받고 싶을 만큼의 마음으로 
- ...
- 내가. 널. 바라. 네 오늘이 그리워. 
- 아...


지나면 다 흩날려지는 기억에 지나지 않고, 또 그 기억은 편집될 수 있으니까... 그냥 너와 시간을 함께 흐르고 싶었을 뿐이었어. 


지배 충동이라는 뒤틀어진 형식이 있을 뿐이었지
사실 그녀의 사랑은 틀어지지 않은, 진짜의 것이었다. 순수한 정수. 그 무엇에 흔들리고 휘둘려질지언정, 그 하나의 휘둘림을 받고자 하는 대상을 스스로 선택한 건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이었으니까. 

이미 여우는 그녀 자체로 스스로 선택한 마음조차 길들일 만큼의 강함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만 때로 부딪히는 순간들로 인한 강약 조절에 실패할 뿐. 그럼에도 그걸 사랑하는 '너'라는, 그녀가 지목하고 선택한 특정 대상으로부터 기대어 쉬고 싶었을 뿐. 그렇게 그녀는 존재 자체로 살아있다는 믿음을 인정받고 싶었을 뿐이라고. 오로지 그뿐이었고, 그녀의 그 대상이 바로 '너' 였음을 어린 왕자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나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조용히 어린 왕자 곁에 다가가는가 싶더니 조용히 그의 두 뺨을 어루만져 주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건드리면 터질듯한 눈을 간직한 채. 어린 왕자도 여우를 바라보았다. 얼마쯤 되지 않아 어느새 둘은 서로의 체취에 길들여진 채 그렇게 서서히 눈을 감고 입술을 포개기 시작했다.. 

- 사랑해. (길들여지고 싶어서)  
- 미안해. (끝까지 알아주려 하지 않아서)  
- 고마워. (이제라도 알고, 다가와 줘서)  
- 용서해. (너무 늦지 않았기를)


* 어린 왕자의 한 구절을 읽고, 단편 아닌 단편을 완성해 본 이 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건..아마도 어제 다 읽어 내린 '데미안' 의 한 구절이 내내 생각나서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떠올립니다. 나의 어린왕자는 오늘, 안녕하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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