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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Nov 22. 2018

부재중 전화

연결은 그렇게 갑자기 찾아오는 것..   


별 거 아닌 것들에 가끔 흔들릴 때가 있다.
누군가의 일침이나 책 속의 어떤 문장들. 그리고 미처 받지 못한 부재중 통화. 그런 것들에 흔들리는 나를 어제도 발견했었다. 흔들리는 건 잠시지만 그로 인한 특정 기억이 되살아난 건 비교적 길다. 

아이들의 저녁을 챙기고 목욕을 마치고 집안 정리를 다 해 놓고. 
한 숨 돌리려 할 무렵 핸드폰을 열어 보았다. 부재중 통화가 한 통 남겨져 있었다. 전화가 먼저 걸려오는 일은 거의 없는 상대라 흠칫 놀랐다. 짐작은 갔다. 어제 전했던 짧은 안부 메일로 인한 결과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흔들렸다. 무슨 일이 생겼나 싶은 걱정 어린 마음 혹은 아니 사실은 무슨 일이라기보다는 정확히 '왜 전화를 걸었지'라는 호기심에.. 생전 먼저 전화를 거는 법이 자주이지 않은 관계여서 그랬나. 그러나 그것도 금세 알 것 같았다. 그냥 오랜만에 궁금해서 전화를 걸었던 거라고. 단지 그것뿐이라고. 

전화 버튼을 누르려다 결국 하지 않았다. 
아기들이 곁에서 계속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전화 통화가 쉽지 않았을뿐더러, 설령 가능한 설정값이 주어졌을지언정. 내가 하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먼저 다시 전화를 걸면 결국 반가움에 내 목소리가 상대의 목소리를 묻어버릴 게 여전히 뻔하게 그려졌으니까. 그래서 꽤 오랫동안 전화기를 붙잡고 있는, 사실 그러고 싶었던 '나' 자신이 보였기 때문에.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었다. 이런 '기다림' 
전화를 먼저 걸 줄 아는, 어떤 전하고 싶은 목소리나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의 바보 같은 특징이겠다. 그러나 이젠 어떤 숨 고름이 생겨나고 있다. 누군가의 마음에 닿기까지 상대의 시간을 기다릴 줄 아는 일종의 근육이 생긴 걸지 모르겠다. 별로 달갑진 않지만. 

부재중 통화에 흔들렸다는 건 여전히 그 상대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일지 모른다
일방적으로 안부를 주는 쪽은 거의 나였던 터라, 그로 인해 상대 친구에게 갖게 되는 어떤 얄궂은 감정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오히려 이렇게 흔들려서 다행이라는 어떤 알 수 없는 안도감이나 편안함을 받기도 한다. 그건 내가 아직 그 친구를 기억하고 위할 줄 아는 여유와 마음이 살아있기 때문이라는 반증이기도 할 테니까. 

그건 다른 말로 말하자면 내가 지금 누군가에게 '이해' 받길 바라거나 다가오길 바라서 먼저 받고 싶은 걸 꺼내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고. 여하튼 요지는 나의 이야기를 잠시 들려주고 싶었고, 그러므로 연결되고 싶었다는 것. 그래서 부재중 통화를 보았을 때 그 친구도 나와 조금은 비슷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며, 흔들리면서 반갑고 고마우면서 아쉬웠다. 



받았어도 크게 달라질 게 없는 일상이겠지만, 그래도 아쉽고 한편으론 고마웠던



누군가에겐 사소했지만 나에겐 커다란 기쁨인 것들.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그런 기쁨들을 주고 또 받으며 살고 있을까 싶다. 내가 받는 사소한 것들은 사실 다른 누군가의 시간이나 에너지로 인해 내게 주어진 것들일지도 모른다는 걸. 좀 더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움직이면 좋겠다. 아니 최소한. 내가 여태껏 맺었던 관계들 속에서 그렇게 마음을 선뜻 주고받을 수 있는 이들이.. 그 마음이 좀 더 살아있기를 바란다. 그게 사는 게 별 거 아니지만 또 별 일처럼 고마운 순간들이고 그게 쌓여서 나은 오늘이 될 수 있기에.. 

우리는 기약 없이 서로를 기다릴지 모른다. 
언제 또다시 올 지 모르는, 약속되지 않은 전화, 목소리, 어떤 안부들을.. 기약이 없어도 그렇게 기다리며 산다. 물론 기다리기 전에 다시 기약을 직접 만드는 내가, 네가, 우리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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