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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Dec 24. 2018

#2. 계획된 대사

오만과 편견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






(#장난감이 널브러져 있는 거실, 밤 10시)


사무실에서 읽다 만 마감 원고를 가지고 늦은 귀가를 했다.

야근 이후에 언제나 나를 반기는 건 지우의 장난감이 널브러져 있는 거실이다. 아이와 함께 잠들 줄 아는 남편과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에 막상 이 나라에서는 고마워해야 하는 입장이라는 현실을 알면서도 그날따라 신경이 곤두섰던 건 그 낯선 남자의 말 때문이었지 모른다.



'가보지 않은 숲... 한번 가보라지. 그런 여유 있는 말이 어디 잘도 나오나.'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쓸데없는 생각이 발목을 잡으려 하는 것도 찰나, 주방을 보자마자 현실로 다시 돌아온다. 결혼제도 안에 들어오게 된 이상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를 가진 기혼의 생활로 들어오게 된 이상 당연하게 맞이해야 하는 일상 공간 중 하나인 주방. 그곳에서 마주하는 나 자신은 가끔 이 삶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한숨이 흘러나오면서도 언젠가부터 누군가가 자동 버튼을 누른 것 마냥 어느새 반사적으로 가방을 내려놓으며 코트만 벗어놓고 집안일을 하기 시작한다.



그날도 그랬다. 그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생각이 나면서도 어느새 사라지고 만 건, 먹다 남은 볶음밥과 반쯤 남은 국물이 졸아 버린 채 바닥만 보이는 냄비, 뚜껑을 대충 닫아 놓은 김치 그릇과 그 옆에 고춧가루 묻는 젓가락 한 짝은 김가루와 함께 범벅이 되어 엑스 자로 식탁 위에 놓여 있는 걸 발견했기 때문. 그대로 그 목소리는 금방 다른 세계로 묻혀 버렸다. 그야말로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듯이.




(#주방 한편, 혜연의 작업 테이블)



내 글이 아닌 남의 글을 곱게 편집하고 다듬는 작업에 때론 신물이 나면서도

막상 다 끝내 놓고 나면 그렇게 시원하지 않을 수 없다. 묵은 체증이 다 사라지는 듯한 일종의 희열감마저 느껴진다. 교정 검수가 얼추 다 끝난 원고를 다시 편집장과 작가에게 최종 컨펌을 위한 메일을 보내고 난 뒤, 피곤에 절은 몸을 침대로 가 뉘으려던 찰나, 협탁 위에 읽다 만 소설이 눈에 띄었다. 오만과 편견이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가질 수 있는 오만함과 편견은 어느 정도로 커질 수 있을까...'


순간 그가 떠올랐지만 불온한 상상은 잠시 스치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눈은 쉽게 감기지 않으며 뒤척이다 겨우 잠에 든다. 이상한 날들의 시작이다.







(#가지런히 정리된 혜연의 집, 아일랜드 식탁 위)


생긴 것과는 달리 곱상한 글씨체의 남편의 편지가 눈에 띄었다. 그제야 깨닫는 하루, 생일이다. 


- 미안해 오늘 일찍 못 들어가서. 늦어도 지우랑 같이 케이크 먹자.

- 서로 애보고 일에 치어서 산 지 몇 년이야. 됐어. 생일 같은 거. 안 챙겨도 돼. 정말.

- 편지 읽어봐. 선물은 다녀와서 줄게.

- 혹시 그거... 구했어?

- 정혜연 취향 내가 잘 알지.

- 리미티드 에디션... 맙소사. 초판 양장본으로 된 원본인데 진짜 구했어?!

- 응?

- 제인 오스틴 원서... 아니야?

- 아니 난 리미티드 에디션이길래 네가 좋아하는 향수... 크 내 실수인가

-... 잘 샀어. 나 향수 떨어졌었는데. 고마워 잘 쓸게. 있다가 봐

- 실망한 거 아니지

- 조금 했어. 근데 당신 다워서 괜찮아. 어서 가자. 지우 등원시키고 나 빨리 가야 돼.

- 오케이. 있다 봐



(#드림타워, 6층 사무실, 혜연의 책상)



생일을 축하해주는 동료들과 함께 일한다는 건 고마우면서도 미안하고 어딘지 모르게 언제나 어색하다.

매년 그렇다. 대기업이 아니어서 고마운 건 어쩌면 이런 날이겠지만, 때론 소규모여서 굳이 챙겨주지 않아도 되는 타인의 생일을 일일이 챙겨 줘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 혜연 선배 생일 축하해요

- 원고 마감인데 어제 메일 봤어. 고생 많았지?

- 그래도 작가 컨펌이 적시에 나서 다행이죠. 인쇄 바로 들어가야 하니까. 일정 밀리진 않았죠?

- 역시 일에선 칼이라니까. 이래서 내가 혜연 주간 맡기고 작가 섭외 지른다니까. 그래서 말인데..

-?

- 이번에 정태민 대표 작업 있잖아. 그거 혜연 주간이 맡아줬으면 해.

- 네?

- 이번에 책임 주간으로 승진해. 이거 선물이야 생일선물

- 아니 승진 발표를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어디 있답니까

- 여기 있잖아요 선배

- 지현 대리!

- 아니 저는 그게... 주간님, 아니 책임 편집자님! 사실은 기쁘시잖아요.

- 뭐가 기뻐야 되는 건데. 월급 오르는 건 기쁘네.

- 정태민 대표 원고, 주간님이 보시고 누구 거냐고 물어볼 정도면 꽤 좋은 글 아니었어요?

- 누구인지 모르고 그냥 읽었던 거야.




그 시가 마음에 참 들었다는 건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 금방이라도 글에 마음을 빼앗겼다는 것을, 그래서 그 글의 저자가 누구인지 사실은 궁금했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

- 딱 주간님 스타일 글이셨으면서. 보통 안 물어보잖아요. 작가 누구냐고. 아무튼 승진도 생일도 축하! 인상 좀 피세요. 왜 그래요

- 그래... 모르겠다. 자꾸 엮이는 게 좀 신경 쓰여서 그래

- 뭐가 엮여? 누가. 정태민 대표?

- 아니에요.. 아무튼.. 쉬지도 못하겠네요. 이거 끝나자마자 또 그 원고라니

- 믿고 맡기는 거잖아. 이해해주라. 좀.

- 저 너무 믿지 마세요 대표님. 저도 이제 지쳐요..

- 그래 내가 알지. 애 그 맘 때가 가장 지칠 때야. 그래도 그만 두면 안돼. 금방 경단 된다.

- 네.. 이만한 회사도 없죠. 알아요. 고마워요 다들..

- 사실은 말이야.

- 네?

- 정 대표가 편집자로 혜연이 널 찍더라고

- 네...? 왜?

- 낸들 아니. 근데 네가 기획한 책들 보고 다 좋다고 해서. 자기 콘셉트랑 맞는다고. 그러니 어쩌겠니.

-....

- 아무튼 촛불 끄자. 그리고 있다가 정 대표 만나고 와. 초고 방향 회의해야 해. 일정에 넣었어.

- 대표님. 아무래도 갑자기 이런 건 좀 너무하시잖아요

- 프로가 왜 이러실까.

-... 선배가 출판사 차린다고 했을 때 따라오지 말았어야 했어 정말.

- 혜연아 좀 봐주라. 이번 작가 섭외 힘들었다니까. 정태민이야. 몰라?

- 몰라요. 그런 사람. 몰랐어요.

- 이젠 알아야 해. 알고 작업 해. 그래야 글, 잘 빠지게 나온다. 자 어서 촛불 불어. 하나 둘 셋!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끄던 순간 문득 깨달았다.

내가 지난 5년 동안 쉬지 않았다는 걸.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우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신경 쓰이거나 거슬리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을.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이가 잠깐의 불륜을 저질렀어도 그 일에 마음을 쓰거나 하지 않은 나였다는 것을. 그만큼 내 삶에 나를 상처 주거나 내가 상처 입힐 만한 누군가를 떠올리거나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는 사실을. 그렇게 내게 무신경한 듯 살았다는 것을.


근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걸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데.







(#드림 타워 7층, 오픈 접견실)



- 많이 기다리셨죠. 죄송합니다. 외부 미팅 끝나고 바로 오는 바람에 여기서 보는 게 빠를 것 같아서요.

- 아닙니다. 대표님. 아니 작가님. 저도 방금 왔어요

- 편하게 부르시죠. 호칭이야 어찌 됐든. 저희 다시 봤네요. 정혜연 주간님

-... 덕분에 책임편집주간으로 승진도 했고요

- 네? 아... 하하. 네 들었어요 지현 대리님께

- 둘이 친해지셨나 보네요

- 아니 저번에 카풀 한번 해 드렸을 때, 덕분에 주간님을 조금은 알게 됐죠.  

- 네?

- 아닙니다. 그럼 원고 얘기 하실까요?




대표라는 편견에 사로잡힌 내가 오히려 다행인 편이었다.

원고 이야기를 할 때 그는 진지했으며 엘리베이터에서 잠깐의 대화를 주고받았던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적당한 차가움과 이성을 겸비한, 청바지와 체크무늬 셔츠가 잘 어울리는 그는 삼십 대인지 아니면 사십 대인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매력을 풍겼다.


삼십 대 치고는 어른의 무게감과 섹시함을 적당히 가지고 있으며 사십 대 치고는 댄디하고 깔끔하며 영한 외모의 캐주얼한 남자. 비슷한 풍의 촌스러운 옷도 그가 입으면 멋스럽게 비치는 싸구려 연예인보다 괜찮은 근사한 일반인에 속해 있다고나 할까.


그를 만나기 전, 나는 외도는 물론이고 외도에 근접한 어떤 경험도 한 일이 없었다. 다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라는 여자의 시간이 상상 속 어느 시점에 도달한다면 분명 외도라는 것도 언젠가 한 번쯤은 경험하게 되리라는 막연한, 정말 어디까지나 막막하고 아득한 소설 속 이야기가 머릿속에 들어있었을 뿐이었다.



- 그럼 초고는 이 방향으로 하시죠. 너무 에세이가 무거운 건 저도 싫어요.

- 네. 중간에 간지 페이지로 직접 쓰신 시가 들어가니 독자들은 자기 계발치곤 독특한 느낌을 받을 거예요.

- 더 잘 쓰고 싶어 지네요. 마음을.

- 아무튼... 이건 내부 기획 회의를 해보겠지만 우선 쓰시고 싶은 대로 초고는 자유롭게 써 내려가 주세요.

- 네. 그럼 다음에 또 뵙죠. 아참.

-?

- 혜연 책임 주간님이

- 호칭이 너무 길죠? 그냥 주간이나 책임이라 불러 주셔도 좋습니다.

- 이름은... 어색할까요?

- 네?

- 아니 저희가 비록 일로 만났지만 그냥 이름 부르는 게 편할 것 같아서.. 어떠세요. 혜연 씨

-... 뭐. 좋으실 대로. 저는 그냥 작가님이라 부르겠습니다.

- 네. 편하실 대로. 한데 오늘 저녁에 시간 어떠세요. 첫 미팅 기념으로. 제 이야기도 해 드릴 겸.

- 제가 왜.. 들어야 하죠?

- 아...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오핸 마세요. 제가 가보지 못한 숲에 이미 가 보셨다고 하셨잖습니까.

-.... 아

- 저도 곧 갈 거거든요. 그 숲에...

-.....

- 그전에... 듣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쪽 세계의 인생 선배님이시니까?

- 그 말을 꼭 제게 들으셔야 할 필요가 있나요. 다른 선배님도 많으실 텐데요.

-... 처음이니까요. 이렇게 이야기가 저도 모르게 먼저 주고받아지는 관계...

- 안 믿겠습니다. 그런 거짓말. 선수 신가요.

-... 하하.

- 없지 않으실 리가 없을뿐더러, 설령 없다 해도.

-?

- 오늘은 시간이 안 됩니다. 생일이에요. 생일날 작가님과 시간을 보내는 어리석은 기혼녀는 없겠죠?



아뿔싸. 감춰야 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혼인 걸 그렇게 강조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럼에도 그렇게 말을 해야 마음이 사뿐해질 것 같았다. 그의 앞에서는 도대체 삼십 대 중반을 넘어가는 여자의 말투 치고는 이십 대의 사이다 같은 단어가 스멀스멀 기어오르려고 하는 걸 겨우 막아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목에 차고 있던 애꿎은 스와보스키 진주 목걸이만 연신 만지작 거리면서도 이상하게 조바심 나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다시 정색하고 차갑게 말을 이어 나갔다.



- 아....

- 가보겠습니다.

-... 두려우신 건 아니고요?

- 네?

- 누가 친해지려 하거나 다가가는 걸 두려워하시는 것 같군요. 잃을 게 많으신 분이라면 저는

-.... 없어요 그런 거

-...?

- 잃을 거 별로 없다고요. 정신없이 그냥 살아요. 없어요. 그런 거 챙길 정신.

- 아... 혜연 씨

- 그러니 건드리지 마세요. 잃을 게 있나 없나 생각할 겨를 조차 없단 말입니다. 이쪽 세계가 그래요.

- 저는... 그게 아니라.

- 이쪽 세계... 모르시면 그냥 말 마세요. 딴 소리. 이상한 소리.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일을.. 해요.

- 하시죠. 그 일. 근데 일만 하게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단 마음 처음이에요

-... 그만 하시죠. 안 믿습니다. 그런 선수의 말 따위

- 선수인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 알겠죠.

-... 의도치 않은 것도 결국 외도예요. 알기나 해요?

- 무슨 주인공 대사 같네요.

-... 맞아요. 상상 속에서 이런 장면이 다가왔을 때. 제가 하려던 말...계획된 대사.

- 편집주간님 다 우십니다.

-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 혜연 씨.

-...

- 생일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또 뵙죠. 그땐 그 대사 더 들었으면 좋겠군요.






어리다고는 절대 할 수 없는 나이, 사회 경험, 관계의 특수성, 뭐 하나 순수할 요인이 없는 관계였다.  

그럼에도 어떻게 이렇게 쉽게 그는 내게 이야기를 건네고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웃음을 짓고 미소를 건네며 마음을 열까. 외도라는 관계를 특수하다고 여태껏 못 박은 것 자체가 지금까지의 내 착각이었다.


사회적 위치를 떠나 온전히 나라는 사람을 향한 진심을 받는 것, 서로를 속속들이 알아가는 것. 그러고 싶은 것.

외도의 쾌감은 거기에 있었고 연애와 다를 바가 없는 걸지 모른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스스로도 믿기지 않은 시절이 있는 법이라고 누군가 말한 것처럼. 그와 나 사이에 사로 잡힌 서로의 오만과 편견은 각자의 방식대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편견을 벗어내면 사랑하지 못할 게 없고
타인들의 굳은 오만의 껍질을 깨고 나오면
결국 그 타인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도 없는 처럼.



타오르다 끝내 심지만 남는 생일 촛불일지언정, 타오를 땐 모른다. 불을 지피는 그 시작만 기억할 뿐.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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