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생각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의 기차가 멈춰 섰다.
- 설국 -
(# 드림타워 6층, 편집부)
살아가면서 후회할 줄 알면서도 저지르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런 것들은 대게 잠깐의 틈을 타고 찾아오기 마련이다. 가장 우울하고 가장 슬플 때, 가장 따뜻한 온기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것처럼.
- 대표님. 교정 끝냈습니다. 디자인 시안도 다 나왔고요. 특별한 문제없으면 작가에게 바로 보내서
최종 셀렉 시키면 될 것 같아요.
- 수고했어 정 주간. 나도 중간에 계속 메일 보내 준 거 읽어봤는데..
- 어때요?
- 흐음....
될 것 같은 작품 앞에서 언제나 볼 수 있는 유진 선배의 폼을 보자니 안도가 밀려온다. 대게 일에서 희열을 느끼는 순간은 꽉 찬 월급날의 통장 숫자 아니면 내 일로 인해 누군가에게 기쁨을 건네주거나 만족 시킴 혹은 스스로의 만족감으로 인한 자존감의 상승 치를 느낄 때겠다.
- 너도 감 왔지?
- 감은 감나무에서나 찾으시죠.
- 농담 말고! 혜연이 넌 이번 정 대표 책 어떻게 생각해?
- 생각하고 자시고 뭐 있어요. 그냥 일 하는 건대..
- 시크하게 나오기는.. 네가 그렇게 나오는 거 보니. 원고 좋았구나?
-......
- 너 보통 좋은 글 앞에서는 더 냉정 해지잖아.
-... 나쁘지 않았어요
- 오케이 됐어. 아마 이거 출간되고 사람들이 모두 지금 정 대표 이미지 생각하고 보게 될 테니 사진집 치곤 아마 깜짝 놀랄 거 같다. 이 양반 일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사진 찍는 기술이나 그 밑에 글빨도 죽이네
-.... 오해 살 수도 있어요. 사진집 밑에 글들 보면 충분히 상상을 자극시킬만하죠
- 정태민의 그녀?
- 정해져 있지만.
- 이수연이라고 했었나? 하여튼 신기해. 그렇게 또 다들 만나는 거 보면. 그림의 떡이다
- 선배. 사랑에 나이 없어요. 도전해 봐
- 야. 너 미쳤냐
- 농담이야. 아무튼 디자인까지 픽스되면 이제 남겨진 건 홍보 마케팅 열 올리는 거예요 알죠.
- 북콘 해야지. 사인회는 기본이고. 요즘 같은 시대에 사인회 안 한다 치지만 지금 정태민 핫 키워드잖아.
-.... 사인회는 안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 왜 사람 몰릴 거 같아서?
- 아니 그 반대.
- 난 그 반대인데?
-... 대표님이 하라면 하는 거죠. 전 몰라요
- 왜 네가 몰라. 네가 장소 섭외하고 작가 일정 조정해야 하는데
- 선배 제발... 나 편집주간인데. 이제 편집 끝났으면 정태민과 그만 엮였으면 해요.
- 미안한데 요새 지현이가 좀 안 좋은 거 같아. 며칠 째 휴간데 네가 전화 좀 해봐라.
-.... 아.. 그냥 아픈 거 아니었어요?
- 아닌 거 같은데 난 촉이 온다. 아무튼 지현 대리랑 스케줄 조정하고, 네가 끝까지 좀 도와줘
(# 드림타워 근교, 카페 알베르)
심장을 철렁하게 만드는 것도 대게는 아무 생각 없을 때 속수무책으로 찾아온다.
가령 누군가를 만나러 나갔다가 속수무책 방어할 틈도 없이 어떤 목소리가 들릴 때처럼. 지현이의 소식도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해낼 재간 없이 들어야 했다.
- 무슨 일인데 휴가 중에 잠깐 보고 말하자고 하는 거야....
-... 원고 다 끝났죠 주간님.. 이제 홍보 마케팅... 해야 하겠네.
- 응. 보내준 메일은 받았고, 북콘 장소랑 작가 일정 픽스해야 하는데 대표가 나더러 하래. 너 무슨 일 있어?
-..... 언니... 나 어떡해.
- 왜 그래. 무슨 일이야.
-... 나 헤어졌어.
- 뭐?
-... 결혼., 했었대. 민호 씨
- 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장난해?
-... 내가 되게 좋아했던 거 언니도 알죠? 근데 나 진짜 몰랐거든... 결혼한 줄. 근데...
-... 지현아.
지현에겐 1년 정도 만난 애인이 있었다. 결혼까지 생각할 정도로 진지한 만남이었고 나도 지현의 남자 친구를 한번 본 적이 있었다. 큰 키는 아니지만 호감형 페이스에 사람 좋게 생긴, 누가 봐도 딱 20대 후반 평범하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 어떻게 알게 된 건데
- 저번에 쇼핑몰에서 둘이 가다가 잠깐 화장실 갔다 오는데 민호 씨가 어떤 여자랑 있는 거예요..
- 근데.
- 그냥... 전 여자 친구인가 보다 했지.. 언니 나 어떡해. 내가 바보 같았어. 유부남이었던 것도 모르고
- 자세히 좀 말해봐.
- 핑계 하나 안 대고 들켰다고 생각하니 바로 이실직고하더라고..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죽도록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내야 하는 일이 사랑이라면
아마 지현이는 상대를 죽도록 많이 사랑한 만큼 지금의 사건도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내서 이해를 하거나 아니면 어떤 선택을 하거나 둘 중에 하나를 놓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혼조정 숙려 기간에 지현이를 만났고 남자 친구는 이미 한번 결혼을 했던 사람이었다고 했다.
- 네 마음은 어떤데
- 모르겠어 언니... 괘씸하면서도... 놓고 싶지가 않아.
-... 정말 좋아했구나.
-... 결혼한 게 흠은 아니니까...
- 네가 감당해야 할 것들이 많을 거야. 현실에서 결혼은 너희 둘만 좋아서 되는 게 아냐.
- 언니라면 어떻게 해요
-.... 글쎄. 근데 굳이 꼭 결혼을 하고 싶니
- 같이 더 오랜 시간 있을 수 있잖아. 많은 거 생각 안 해. 그런 거 따지면 결혼 못하잖아.
-... 그래. 하긴 결혼이라는 게 그렇긴 하지. 한없이 재면 한도 끝도 없이 시간만 가니까.
-..... 모르겠어. 근데 막상 또 하려니 혼란스러워. 생각해보니 그랬었던 것 같아. 내가 결혼 애기 꺼내면 좀 탐탁지 않게 생각했거든.
고민을 하는 것도 일종의 철저한 노동이라면 지현인 휴가 기간 내내 개인의 감정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은, 차라리 물리적인 일이 훨씬 더 생산적이다. 시간이 흐르면 일의 대가로 마약과 같이 들어오는 월급이 있지만 지현의 감정 노동은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철저히 자신이 자신에게 주어야 하는 보상 그 이상 그 이하의 것이 남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 지현아.. 그냥 교통사고라고 생각해. 스쳐 지나가는 교통사고.
- 언니...
- 사실 이혼이 별 게 아냐. 요즘 시대 특히 더. 알지. 졸혼이니 휴혼이니 재혼이니 별 게 아니라고. 막상 해보면 정말 별 게 아닌 것들이 있는데 그게 바로 결혼이고. 다만 별 거라고 생각되는 건 남들 시선 따져서 그래. 사실 그럴 필요가 없는 데 말이지. 사는 것도 따지고 보면 별거 없잖아. 주식해서 상 치면 몇 푼 쉽게 벌다가 하락장 들어가면 금세 빠지고 거기에서 좌절하고 웃고 울고. 정말 우습지 않니. 결혼도 이혼도 마찬가지야. 한껏 흥분에 가득 차서 좋을 신혼 생활도 결국엔 사라지고 애 낳고 키우다 보면 정신없이 하루가 가.
- 언니.... 언닌 그때 어떻게 했어요.
- 뭘
-... 형부 그 여자 만났던 거 알았을 때... 미안 물어봐서. 근데 언니 되게 아무렇지 않았거든. 그래서 정말 리스펙 했었어. 난 완전 유리 멘탈이라.
-.... 정말 아무 감정이 없었어. 그래서 괜찮았어. 남들 생각하는 것과 내 감정이 다 같진 않잖니.
- 아..
누군가가 물어봤을 때나 비로소 애써 재워둔 기억이 찾아올 때가 있는데
바로 지현이가 물었을 때가 딱 그랬다. 사랑은 일상을 캐묻는 일이고 취향과 가치관을 집요하게 나누는 일이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나와 민성 씨는 서로에게 부재중인 시간이 쌓여갔을 것이다. 지우를 낳고 기르면서는 더더욱. 어느새 서로의 일상을 묻는 일은 점점 줄어들었다. 아이를 낳고 기르며 일을 하고 밥을 먹고 그런 일상을 살아가는 데 우리 둘 사이엔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그 자연스러움에 부자연스러운 어떤 사건이 끼어든다고 해서 애써 통과해 나가고 있었던 그 시간의 노곤함과 피로감의 형태가 바뀌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상대를 향한 어떤 무감정으로 치달 아가는 시간들이 크게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설령 민성 씨가 다른 사람에게 심신을 건넸었던 그 시간도 받아들이는 입장과 시간 차이일 뿐. 내가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들리는 소식엔 그 어떤 방어 대책이 필요 없는 것처럼.
- 지현아. 너 그런 거 알아
- 뭐요
- 내다 버리고 싶어도 막상 버려지지 않는 게 있어. 그럼 그건 결국 버릴 수가 없는 거야.
- 언니..
- 사실 나도 민성 씨 내다 버리고 싶었어. 그리고 지우 혼자 일하면서 키워야 할 때도. 가끔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을지언정, 아무튼... 아이도 키우다 보면 가끔 내 새끼인데 버리고 싶을 정도로 힘들 때가 온단 말이지. 아무튼 버려지지가 않아. 그게 가족이고 그게 나한텐 사랑이었어. 지금 너한테도 가족은 아니지만 그 정도로 그 사람 사랑하고 있다면 선택은 네 몫이지. 버릴 것이냐 아닐 것이냐. 시간 좀 가져. 네 마음이 좀 진정될 시간. 의외로 차분하게 생각하면 별 거 아닌 것들도 있잖니.
말을 하면서도 조금 의심을 하긴 했었다. 정말 버리고 싶은 건 아니었을까라고. 버리고 싶다는 생각에 애써 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더 앞섰기에 결국 버릴 수 없다고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말과 생각은 결국 행동의 씨앗이 되니까.
-..... 하... 언니는 정말이지.... 언니 세상 다 산 사람 같아
- 아직 멀었다. 나도... 요새 좀 혼란스러워
- 언니도 무슨 일 있어요?
- 아니 그냥... 원고 때문에.
- 아 맞다. 미안 내 애기만 했네.
- 니 애기가 중요하지. 지금은.
- 고마워 언니..
- 그래.. 아무튼 휴가 하루 남았지? 시간이 별로 없겠네.. 그래도 마음 잘 추스르고.
- 응. 일주일이나 비워서 좀 죄송했는데. 막상 누구한테 털어놓으니 좀 후련하기도 해
- 본질적으론 없어지지 않아. 네가 선택하지 않는 이상. 알지
- 응.. 고마워요 언니.
- 네 사정 알았으니 북콘 장소 섭외도 리스트 짜 둘께.
- 미안해요.. 나 때문에
- 됐어. 유진 선배가 아주 작정했다.
- 근데 정태민 대표랑 언니 케미 은근 잘 통하는 거 알아?
- 뭐?
케미라니. 남들 보기에도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뭔가 보였나 싶은 마음에 가슴이 철렁했지만 의외의 칭찬에 스스로 터무니없는 멍청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아니 원고 주고받는 메일에서 참조에 다들 들어가잖아. 근데 뭐랄까.. 막 서로 의견도 합치하고 메일 쓰는 거치곤 이게 참 이상한 생각인데 서로 배려가 너무 지나쳐서 막 이건 걱정해 주는 것 같은 느낌? 아 아무튼 표현이 쉽지 않은데 아무튼 좋아 보였다고요.
- 싱겁기는.... 이번 원고 괜찮아. 잘 될 거 같아. 다들 기대하고 있어. 홍보 잘 하자.
- 네!
- 들어가서 쉬어.
- 고마워 언니..
카페에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슬픔이 밀려왔다.
아끼는 후배인 지현이의 소식도 사실은 충격에 슬픈 일은 맞았지만 또 애써 남이 슬퍼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은 아니라지만. 가끔 이런 주변의 소식들로 인해 꺼내어지는 과거의 기억들 덕분에 어제를 살고 있는지 아니면 오늘을 살고 있는지 구분이 안 될 때가 종종 찾아온다. 그리고 나는 어제도 오늘도 아닌 내일을 바라보다가도, 잃어버린 나의 오늘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이미 길을 잃기 시작했다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때의 일이 의미하는 바를 조금씩 알아갈 수 있을 뿐이다.
정태민에게 북콘 장소 리스트를 보여 주며 작가 의중을 묻기 위해 잠깐 미팅을 하러 간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댄디하며 트렌디한 스웨터에 청바지를 입고 한창 오픈 회의실에서 직원들과 미팅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멀리서 보였을 때 제멋대로 울렁거리는 속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 어. 주간님 오셨어요.
- 아.. 네. 잘 지내셨죠. 대표님 회의 중이신 것 같네요.
- 회의 치고는 노는 것 같아 보이죠?
- 아.. 네 사실 좀.
- 저렇게 자주 회의하세요. 커피 타임을 빙자한 회의. 저희 맨날 혹사당한다니까요
- 좋네요.
- 아무튼 조금만 기다리세요.
긴 테이블 위에 비스듬히 걸치고 앉아서 손에 팔짱을 끼고 입가엔 미소를 약간 머금은 듯 진지한 표정의 정태민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다가 잠깐 사무실 벽에 걸려 있는 디자인이 독특한 벽시계를 보고 있었을 즘, 코끝에서 익숙한 스킨 냄새가 풍겼을 때야 그가 곁으로 왔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 시계 보러 오신 건 아니죠. 정혜연 주간님.
- 아.
- 저보다 시계를 보고 싶으셨던 게 아니기를 바랍니다.
- 여전하십니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 그러게요. 그 이후로 오랜만..이네요
- 네... 생일은 잘 치르셨죠.
- 네 누구 덕분에. 주차장에서 생일 케이크라도 받는 줄 알았는데 그대로 바라보기만 하시다가 결국 집에 가야 한다고 가 버리셔서 혼자 돌아와서 먹었습니다. 누구 생각하면서 글을 쓰고 있자니 원고가 생각 외로 빨리 써지더군요
-...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 아. 죄송해요. 놀리려고 했던 건 아닌데.
- 아니에요.. 아무튼 교정 검수 끝난 거 보셨죠
- 네.. 퍼펙트하던데요. 저는 전혀 이견 없었습니다. 메일 보내드렸다시피.
- 네.. 디자인 시안은
- 그건 혜연 주간님께 맡길게요. 저는 글만 쓸 줄 알지 그런 거 잘 못 고릅니다. 그리고 그건 출판사 안목. 아니 제 담당 주간님 안목 믿으니 신경 안 써요. 그냥 선택하세요.
그의 화법은 이미 충분히 멋있었다. 어느새 들리기에 그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직선적으로 돌려 말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깔끔하게 어필하는 말투. 대표라는 자리에 있는 것 치고는 리더의 엄숙함이라기 보단 오히려 편안하면서도 오더를 내리는 소프트한 문장. 그의 구사하는 텍스트와 단어 선택은, 다른 사람이 똑같은 말을 할지언정 그토록 호감 가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뇌리에 스치자 애써 감정이 밀려오는 걸 중지시켜야 했기에 일 이야기를 끊임없이 주고받아내야 했다. 그래야 간신히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고 싶은 걸 막을 수 있었다.
- 북콘 장소 말인데요.
- 네. 리스트 봤습니다.
- 어디가 좋으세요?
- 다 서울 경기, 수도권 지역이더군요
- 네 아무래도 지방은 가지 않으시니까요 작가님들께서
- 혜연 씨.
- 네?
- 저는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만 그곳으로 제가 결정해도 되겠습니까?
- 네?
- 속초 동아서점으로 하시죠.
- 뭐라고요?
- 속초 가 보셨어요?
- 아.... 네. 아주 오래전에. 지우 낳기 전에 가 봤어요... 민성 씨랑.
- 네... 아무튼 거기서 북콘 하시죠. 지방이지만 출판사 부담 안되시면 저희 회사에서도 지원하겠습니다. 홍보 쪽 연관해서 같이 콜라보할 수 있는 게 있을 거 같아요. 제 개인 서책이지만 회사 직원 복리후생 서비스로 같이 엮어서 임직원 이벤트 해 보자는 Human 팀 아이디어가 나왔거든요.
- 아.....
- 그리고 무엇보다
-.....
- 설국입니다. 거기. 저에겐.
- 아.....
순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그 설국의 첫 문장이 또렷이 생각이 났다.
왜였을까. 그와 대화를 섞어낼 때 종종 소설의 한 문장들이 그렇게 다가오곤 했는데 이번에도 예상치 못한 대화의 연결에 그로 하여금 향수 같았던 젊은 시절의 문장들이 그로 인해 선물 받아지는 기분이 들어 속수무책으로 어쩔 도리 없이 나를 흔들어 놓기 시작했다.
- 혜연 씨는 알아줄 것 같았는데.. 설국. 읽어 보셨죠
-...... 국경의 터널을 지나자, 설국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 네. 제 추억 속의 설국인 장소. 속초입니다. 같이 가 주시겠어요
-... 작가님 북콘 섭외 장소. 만만치 않네요. 저희 유진 대표님이 놀라시겠어요.
- 가능하도록 도와주실 거죠?
-.... 별 수 있나요. 하는 수밖에.
- 하하. 혜연 씨 답습니다.
-.... 근데 왜 하필 속초의 그 동아서점이에요?
- 나중에 알려 드릴게요. 그건. 설국에 직접 가서.
이미 결혼을 했던 지현이의 남자 친구와, 결혼을 하고서도 마음에 다른 사람을 들여놓는 나.
둘 중에 누가 더 뻔뻔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들의 부정적인 시선을 마주할지라도 나는 그 타인들의 시선을 우아하게 걷어 낼 여유가 부디 있기를 가소롭지만 스스로 끝내 바라며 그럴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아주 쓸 데 없는, 정말이지 쓸모없는 자신감이자 객기나 다름없었다. 그가 제안한 속초라는 장소와 설국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만큼 심장이 제멋대로 뛰는 것도 막을 수 없었지만 그만큼 우리 두 사람의 취향과 대화코드는 자연스러움을 떠나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졌기에 애써 서글픔을 감춰내야 하기도 했다.
그와 속초에서 겪게 될 일이 결국 남들 눈에는 흔한 막장으로 치닫게 되는 되고 마는 걸까를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아니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미래의 일을 단언하는 걸 좋아하는 나였음에도 그의 제안에, 이번만큼은 단언하기로 했다.
말과 생각은 정말로 씨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잠깐 아무 말 없이 얼굴을 바라보며 서로가 편한 미소를 지었던 그 찰나의 시간을 애써 지워내고 있었다.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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