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게 될 것 같아서. 무서운 시간조차도.
이상하고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렇게 행복해 본 적이 없다.
모든 것이 좀 더 천천히 지나갔으면.
좀 더 오래 지속되었으면 싶었다.
- 댈러웨이 부인 -
(#파주, 인쇄소)
잠시 어딘가로 떠나고 싶었다.
책임감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어서라는 돼먹지 않은 안일한 생각이 불온하게 머릿속에서 스치자 이내 고개를 저으며 인쇄소에서 그의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암호 같은 말을 늘어놓는 건지. 팔짱을 끼고 인쇄소에서 막 나오는 그의 원고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도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싫지가 않다. 그것이 내가 가진 제일 큰 문제였다.
그가 흘리는 듯 보여주는 삶의 여유와 완벽하게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견고한 성벽 같은 어떤 단단함. 정태민이 가지고 있는 매력은 이미 부인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사업을 이뤄냄에 있어서도 비슷했다. 주변 사람들을 비롯하여 그는 리딩에 있어서 어떤 마력을 가진 사람 같았다. 곁에서 완벽히 그를 지켜본 건 아니었지만 대충 짐작은 갔다. 그가 어기지 않았던 칼 같이 지켜내는 원고 일정과 에디터보다 더 날렵하고 예민하게 정곡을 찔러 주었던 피드백, 디자인 초이스에서부터 심지어는 먼저 작가 의도에 맞는 홍보 기획안을 제출하면서 보여준 몇 가지의 리포트들은, 그의 일머리를 가늠해보기에 충분히 적당했다.
생각이라는 것이 원하지 않아도 자꾸만 튀어나오는 바람에 잠깐 머리가 아파지려 할 때쯤 전화기가 울렸다.
- 주간님. 저예요
- 어. 지현 대리. 곧 들어갈 거야 초판 제대로 나올 거 같아.
- 역시 현장에 계실 줄 알았어요. 그나저나 잡혔어요. 속초 동아서점이요.
-.... 날짜 잡혔어? 언제 갈 거야. 답사해야 하잖아.
- 네. 근데 선배 어쩌지...
- 왜. 시간 되는 거 아니었어?
- 죄송해요 주간님... 그 날 다른 기획안 수정에, 다음 인문서 작가 섭외 때문에 하루 종일 뺴박이네..
- 남편 휴가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니. 일은 이렇게 몰리는구나. 할 수 없지... 일정 메일은 보내 놔.
- 근데 선배 걱정 마. 혼자 가지 않으실 거니까.
- 무슨 말이야 그게
- 작가님이요. 정태민 작가님이랑 이벤트 기획 때문에 최근에 메일 주고받았잖아요. 기억 안 나요? 주간님 참조에 들어 있었는데. 바빠서 또 못 봤구나. 아무튼 그때 작가님이 같이 가 주신다고 했잖아요. 자기 사내 홍보팀 직원이랑 같이 가신대.
-... 메일 확인 못했었어..
- 어젯밤에 보냈는데 바로 현장 가셨구나. 아무튼 메일로 구체 일정이랑 답사 계획, 북콘 이벤트 기획서 다 제출해드렸어요. 고마워요 언니. 역시 만능 주간님이라 제가 존경합니다!
- 지현아... 제발..
아무 일이 없을 것이고 아무 일이 없어야 한다는 걸 머리가 알고 있었다.
심장은 역주행하고 있었을지언정. 눈에 보이지 않는 건 아무래도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이고 있었다. 괜찮을 거라고. 들키지 않을 거라고.
(#혜연의 집, 거실)
결혼 전까지도 연애를 하는 동안 사실 말로 서로 간의 애정을 확인할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했었다.
연인과의 감정 교환은 안정적이었다. 무딘 성격 탓이었던 건지 혹은 반대로 보편적인 연애관을 가진 사람이 아닌 비주류에 속했던 건지 스스로 알 길이 없으나 민성 씨와 만날 때도 그랬다. 아름답다거나 예쁘다 혹은 보고 싶다라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부류와는 달랐기에 결혼까지 이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말을 건네는 건 오히려 밑 빠진 독과 같은 느낌이었고 말로 확인받아야 하는 사람들의 삶이 여간 피곤하겠다는 생각 했으니. 나의 연인들은 상대적으로 덜 피곤하며 덜 질려했다.
우리는 서로 물음이 별로 없었다.
그랬으니 큰 다툼 없이 지속할 수 있었던 결혼생활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다른 여자와 침대에서 뒹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잠깐 했음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던 걸 보면. 반대로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민성 씨는 어떤 반응을 보일 지를 아주 약간은 궁금했지만 그 조차 별로 상상은 되지 않았기에 생각을 막 접어 내리며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고 있는 민성 씨에게 말을 건넸다.
- 나 내일 속초 가. 서점 투어 겸 이벤트 장소 답사
- 어. 다녀와
- 당신 고객이랑 같이 가.
- 뭐?
- 사무실 신축 공사. 당신 고객. 정태민
- 아 맞다. 담당 작가랬지. 잘 됐네.
- 잘 된건가... 지현이 안 간대. 나랑 그 정태민 대표랑 그쪽 회사 사람이랑 셋이 가는 거야.
- 어. 그러니까 잘 다녀오라고. 아참. 내일 엄마 오시는 거 알고 있지.
- 응.. 비행 스케줄 확인했어. 오시자마자 자리 비웠다고 한 소리 들을 거 뻔하지만. 부탁해..
- 어쩔 수 없지. 그러게 날짜가 왜 그리 안 맞아.
-.... 민성 씨.
- 웬일이야 이름을 다 부르고.
- 자기는 나 얼마나 믿어
- 무슨 소리야 갑자기.
- 아니 그냥.
- 나 일찍 공항 가야 해 시간 맞춰서.
-... 지우 잘 부탁해. 반찬 만들어 놨으니까. 애기 미열 있으면 제때 해열제 먹이고
민성 씨도 그런 말을 했었다.
연인 사이의 사랑이라는 것은 두 사람 사이의 당연히 있어야 할 신뢰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했기에 굳이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할 필요가 없다고. 그 말에 동의했지만 한편으론 결혼 이후의 그의 가치관이 변하지 않음에 때때로 부아가 치밀어 올라 미쳐 버릴 것도 같았다. 왜 그런 감정이 들었는지는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마 지우를 낳기 전후로 찾아오는 어떤 알 수 없는 감정이 나를 변하게 만들었던 건지도 모른다. 지는 석양에 흐르는 물결과도 같이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도, 결국 어느 시점에 가서는 영원한 게 없는 것 처럼 그렇게 변해간다.
(# 정태민의 차 안)
그와는 관계에서는 그리 초연하지 못했다. 다만 티를 내지 않았을 뿐.
둘이서 밖에 갈 수 없는 의도하지 않은 상황이 펼쳐지고 나서야 이 어설픈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은 더 어설픈 생각에 결국 어색한 티를 내고도 남을 만큼, 어느새 마음은 흘러넘치고 있었고 그걸 정태민은 모른 척하지 않았다.
- 어색해요 혜연 씨?
- 아니 도대체 왜...
- 대표가 시킨 건 아니니 오해 마세요. 집에 급한 일이 있다고 연차 쓰는 직원에게 그러지 말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건 저희 회사 기업문화와도 어긋나는 일이고요.
- 제가 알 길이 없죠.
- 의심받을 행동을 너무 많이 했군요. 좀 서운한데요.
- 뭐가요
- 미안합니다만... 이런 말 하면 또 화낼 테지만
-....
- 전 지금 기뻐요. 이렇게 둘이 속초 가는 길. 누구랑 같이 가는 건 오랜만이라.
이미 우리는 서로를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그건 대화가 이어지는 흐름을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흔히 호감이 있는 친구들에게 건네는 사사로운 것들 일지라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렇게 자연스러웠다.
-.... 이수연 씨랑 같이 안 가봤어요?
- 아... 수연이는 거기 가기 싫어해요. 도시랑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죠. 더 좋아하기도 하고..
- 속초도 도시예요.
- 압니다. 속초를 도시로 취급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이었어요. 수연인 화려한 편이죠. 보시다시피.
-.... 얼마나 만났어요.
- 왜요. 궁금해요? 뭔가 반가운걸요
- 뭐가요.
- 나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으니까. 원고가 아니라.
- ....일로 만났으니 원고가 궁금한 게 맞아요. 정태민 작가님이 아니라.
- 오늘은 좀 궁금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정태민 작가님.
- 뭘요.
- 서로... 궁금한 거 물어보고, 정리도 좀 하고.
-....
- 혜연 씨 정리 좋아하잖아요. 여러모로. 그래서 흔쾌히 따라와 준 거 아니고요?
-.... 안 좋아해요.
- 네?
- 정리하는 거. 그런 거 원래 안 좋아했어요. 어쩔 수 없이 그러고 사는 거지.
-....
- ....아이 키워 봤어요?
순간 바보 같이 어설프고 뜬금없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단속을 휘두를 생각은 없었으나 경계는 확실히 알려 줘야 한다는 어떤 어설픈 생각이 앞섰다. 그래서 꺼낸 말이 고작 지우라니. 생각해도 기가 차고 우스웠지만. 나로선 그게 최선이었다. 기혼녀인 내가 그에게 찬물을 끼얹을 수 있는 최선의 키워드는 그것뿐이었다.
- 그럴 리가요. 아참. 그때 이후로. 따님 괜찮았어요?
- 지우예요. 김지우. 우리 딸 이름.
- 네... 지우. 예쁜 이름이에요. 사실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혜연 씨 보면 특히 더요.
- 뭐가요
- 그 날도 그렇고..직원분들 중에서도 일하는 워킹대디나 워킹맘들 보면 사실 더 마음 쓰게 됩니다. 미혼이지만 그런 게 좀 보여요. 안쓰럽고 인간적으로는. 그래도 그런 분들 시간관리 철저하게 일도 잘하더군요.
-...정리 좋아한다고 했죠? 아뇨. 나..정리 안 좋아해요. 그런데 아이 낳고 정신없이 키우다 보니 어느새 이렇게 변했어요. 이렇게 돼요. 사람이 이렇게 변하기도 해요. 당신이나 이수연 씨는 알 수 없겠지만. 개인 생활 없이 아이를 위해 돌아가기 일쑤인 그냥 보통 평범한 가정. 딱 그런 삶이라고요.
- 혜연 씨...
- 정리를 잘해야 했어요. 집안일이든 마음 쓰는 일이든 정리 잘 못하면 다 흐트러져요. 그게 육아라는 거예요. 냉장고도 정리 안 하면 그대로 꽉꽉 차 들어서 순식간에 빈 공간이 없어지는 것처럼. 빈 공간을 만들려면 정리를 해야 한다고요.
-.... 많이 힘들었군요.
생각해 보니 그렇게 단순한 한마디를 민성 씨에게 들은 기억은 거의 없었다.
갑자기 알 수 없는 울컥한 기운에 어느새 말은 그렇게 입 밖으로 흘러 나가기 일쑤였다. 이 또한 티를 내지 않으려 했으나 정태민 앞에서는 유독 연기를 해내기가 쉽지 않았다는 걸 스스로 깨달을 때 즈음 새로운 내가 점점 바깥으로 튀어나오려는 것 같았다.
- 기자. 그래서 진작에 때려치웠어요. 지우 가진 거 알았을 때. 언론사에서 그것도 사회부에서 임산부가 일한다는 거. 제가 속한 곳에서는 가당찮은 거였어요. 그래서 퇴사했고, 집에만 있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았고. 다행히 금세 구직했죠. 그때 들어온 데가 바로 이 출판사예요. 유진 대표님. 대학 선배고요.
- 좋네요. 먼저 들려줘서. 혜연 씨 이야기. 듣고 싶었거든요.
- 듣고 싶어 하는 걸 서로 들켰으니까.. 하는 말이에요.
- 아...
- 이왕 한 김에 계속해 보죠. 사실 작가님 회사 기업문화 육아 복리 후생 서포트 잘하는 거 알고 있었어요. 좋았어요 그래서.
- 칭찬 들으니까 좋은데요
어린아이 같이 웃는 정태민의 얼굴에서 소년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자신이 어른과 어린아이의 얼굴을 동시에 가졌다는 걸 알까 싶었다.
- 세심하게 배려하는 거 보였으니까요. 원고에서도... 그려졌어요.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는 바로 글에서 나오죠.
- 글 어땠어요.
-.. 가식 없고 솔직하고 의외이고. 그럴싸한 겉포장 하나 없고. 작가 개성 뚜렷하고. 문장은 담백하고. 문학적인 자극을 주면서도 문학이 아닌 어떤 좋은 사람의 은밀한 이야기....
- 혜연 씨 다운 표현이어서 좋네요.
- 글 읽는 내내 빠져드는 글이 있어요. 유명하든 그렇지 않든. 그런 작가 만나면 행운인 거죠. 일할 때 저는 그래요. 팔리든 안팔리든. 상업성을 생각하는 대표 생각은 다르겠지만. 아무튼 이번 책... 빠져들 정도로 글 좋았어요. 사진 에세이집 치고 소설 읽는 기분이었으니까...
- 독자들이 다 혜연 씨 같으면 좋겠네요.
- 안티도 있을 거예요. 저처럼.
- 하하.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당신 같은 안티는.
농담이 자연스러운 사람. 유머를 일상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어른.
그의 삶에서는 내가 가지지 못한 어떤 여유가 느껴졌다. 대화를 섞어 낼수록 그런 느낌이 다가와 서였을까. 대화에는 끊임이 없었다. 누가 먼저 끊기 전까지 영영 계속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아득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 책 읽는 사람들이면 알 거예요. 나머진.. 작가님이 워낙 유명하셔서.
- 유명세에 의존하고 싶지 않아서 익명하자고 제의한 건데
-... 어쩔 수 없었어요. 저도 그러고 싶었지만.
- 다행이네요. 혜연 씨는 이해해 줘서.
- 저희 대표님. 아무튼 이번에 기대가 크세요
- 다행이군요. 다른 분은 몰라도 출판사에서 우리 정혜연 주간님께는 제가 꼭 칭찬 듣고 싶었으니까.
-.. 왜 하필 나예요
- 네?
- 왜 하필 나냐고요.
확인하고 싶었다.
이 관계의 시작이 누군가들의 흔해 빠진 육체적인 접근에 치우치지 않은 시작이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기에. 그래서였을까. 대화가 튀는 것이 느껴졌음에도 이 말을 건네어야만 어떤 안심이 된다고 생각했다.
- 밀란 쿤데라. 그 책 읽고 있었던 혜연 씨 모습이 눈에 들어왔었어요.
-.. 뭐 첫눈에 반했다. 그런 식상한 접근인 거예요?
- 나도 연애 많이 해 봤어요. 여자를 대충 안다는 겁니다.
어른의 단호한 표정과 말투는 그의 매력은 더 넘치게 만들기 쉬웠다.
어떤 이라도 반박할 여지를 주지 않을 것 같은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것도 그는 스스로 아는 사람 같았다. 순간 스스로 호랑이 앞에서 주름잡는 고양이 흉내를 낸 것 같아서 스스로 부끄러워졌음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꽉 쥐고 그의 말을 계속 들을 수밖에 없었다. 듣는 것 이외에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기에. 숨을 구멍은 찾을 수 없었다.
- 아...
- 그냥 이상하게 안타까웠어요. 회사에서 책 읽고 있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고
- 취향 한번 독특하시네요.
- 네. 혜연 씨 말대로 악취미를 가진 나쁜 남자일 수도 있겠지만
- 나쁜 게 아니라 어리석은 거죠. 지현 대리가 아니라 나여서.
-... 눈에 띄는 사람이 당신인데 어쩌겠습니까. 쓰러질 것 같았으니까. 책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당신 모습이 옆으로 누가 치면 바로 쓰러질 듯한.. 이런 기분 말로 표현하기 뭐하지만....
-....
- 할 수만 있다면 내 시간을 떼어 주고 싶을 만큼 지켜주고 싶었어요. 그냥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시간이라는 말에서 아득하게 목소리가 멀어지는 것 같았다. 눈물이 금방이라도 나올 것만 같은 것을 애써 참아내야 했다.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리는 것도 모를 만큼.
- 회사에서 책 읽는 사람은 많아요
- 많죠. 알아요. 많은데. 혜연 씨의 그때 그 모습이 제 눈에 들어온 겁니다.. 부엌에서 책을 읽고 있었던 저희 어머니가 떠오르기도 했고...
-......
- 돌아가셨어요. 작년에. 어머니 애기 하니 더 식상해지는 것 같지만. 말해놓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군요. 흔해 빠진 남자들의 판타지 정도로 해 두죠. 당신 옆모습에서 책 읽고 계셨던... 시간에 쫓기듯 혼자 삭히듯 그렇게 읽는 걸 좋아했던 돌아가신 그분 생각이 나서. 근데 그게 다른 사람이 아닌 정혜연이라는 여자에게서 그 모습이 중첩이 되는 겁니다.
마음이 출렁였지만 애써 티를 내지 않으려 이내 정색하며 말을 이었다. 쥐고 있던 핸드폰을 잡은 손에는 어느새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 흔해요. 너무. 흔한 이유예요
- 흔해서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이 감정이 흔하진 않다는 걸 사소한 대화를 주고받았을 때 알았어요. 당신도 알았을 것 같은데. 우리 대화가 꽤 잘 통한다는 것쯤은.
- 기혼남녀에게 미혼남녀와의 대화는 언제나 잘 통하는 법이죠.
- 역시 재밌어요 혜연 씨.
- ...재미있자고 한 말 아니에요.
- 알아요.. 어쨌든 근데 부인하진 않았으면 좋겠네요.
- ,... 그래서 무섭다구.
-....
- 말을 자꾸 아끼게 되서. 내가 당신 아끼게 될 것 같아서. 그게 무서운거예요.
어느덧 속초의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고속도로를 달려오는 내내 정태민은 그 이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 년 가게' 간판이 달려 있는 동아서점이 멀리서 보였을 때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차에서 내리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내 쪽으로 다가와 안전벨트를 풀어 주려 하는 순간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정태민은 그 자세로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을 건넸다.
- 정혜연 씨.
-...
- 오늘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삽시다.
- 뭐라고요?
- 그게 남는 인생입니다. 죽으면 다신 오지 않아요. 오늘이라는 시간.
-....
- 여기 어머니 고향입니다. 여기에 모셨어요. 속초. 그리고 어머니께 제 친구. 아주 친해질 것 같은, 그러고 싶은 제 친구 소개시켜 드리고도 싶었고. 그러니 너무 무서워 말아요.
- 아.....
- 가죠. 일단 서점으로 들어 갑시다.
되도록 천천히.
모든 순간이 되도록 느리게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여전히 핸드폰을 꼭 쥐고 있는 손에 땀이 차 오를 즈음에더 선명히 알 수 있었다. 그가 입고 있던 라이트 한 블루 계통의 스프라이트 무늬의 셔츠와 매칭이 잘 되는 네이비색 랄프로렌 가디건과 청바지, 그리고 신고 있던 스니커즈는 대단히 반듯하고 모든 행동에 자신감이 묻어 나왔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그의 태도와 모습 때문에 아무래도 나는 설득당해 버리고 말았다는 걸. 스스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정말 이상하고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나도 이렇게 행복해 본 적이 없었다고.
차를 타고 오는 그 모든 길들이 좀 더 천천히 지나갔으면. 그렇게 오래 지속되었으면 싶었다고 차마 그에게 말하지 못했다. 살면서 말하고 싶은 어떤 것들은 끝내 말하지 못한 채 입 안에서 웅크리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살아지기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이 저 멀리서 나를 바라보며 가소로운 듯 웃고 있는 것 같아서 못내 마음이 아팠다. 어느덧 지려 하는 해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처럼.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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