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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Aug 16. 2017

숨결이 바람 될 때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 나아갈 거야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 그 2년 간의 기록
 서른여섯이라고 했다. 전문의를 앞둔 승승장구 신경외과 레지던트 마지막 해. 그는 폐암 4기 판정을 받는다. 하루 약 열네 시간씩 이어지는 혹독한 일상 생활의 끝에서 겨우 성공이라는 원하는 삶이 손에 잡힐 것 같은 그였을 거다. '숨결이 바람 될 때'는 의사로서 뇌 손상 환자들을 치료하며 그 또한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죽음과 죽음을 마주하게 된 마지막 2년의 기록을 담은 책이다.


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라니티, 흐름출판, 2016. 08. 22, 284p


오늘 이 문장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I can't go on.
그래도 나는 계속 나아갈 거야 I’ll go on.
설사 내가 죽어가고 있더라도 실제로 죽기 전까지는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나는 죽어가는 대신 계속 살아가기로 다짐했다.


오랜만에 울어 봤다. 

 책의 첫 페이지를 보자마자 심장이 쿵 하고 내려 앉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울고 있는 나였다. 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보고 울 수가 있다니... 이 죽일 놈의 감수성은 여전한 탓에? 아니. 사실은 '죽음'을 마주한 어느 한 사람의 마지막 순간까지의 기록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경건해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클래스의 저자의 '살아있는 삶'을 향한 의지가 나를 울렸다.


우리 삶이 어찌 보면 바람 같이 흘러 가는 것일텐데, 너무 힘들게 사는 건 아닐까 싶어서 마음이 아파..


 아마 서른이 막 지나서부터 였을지 모르겠다. 

 슬픈 영화 혹은 문학을 읽을 때 조차 쉽게 웃거나 울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숨결이 바람 될 때'는 첫 페이지부터 그렇게도 질질 짜며 읽어 내려갔다. 왜 그랬을까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이 책을 읽을 무렵의 나는 출산을 하고 1년의 육아기를 거쳐서 다시 복직을 눈 앞에 둔 '엄마나이 1살'인 나여서 그랬나 싶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죽음'을 앞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더이상 신경외과의사 1인이 아닌, 누군가의 연인이자 배우자가 아닌 새로운 길을 가기로 마음 먹었으니깐. 바로 '아빠'라는 선택 말이다.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세상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했는지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바라건대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줬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아빠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고,
그로 인해 아빠는 이제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만족하며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단다.

지금 이 순간, 그건 내게 정말로 엄청난 일이란다


 죽음을 마주하면서 동시에 그가 선택한 '아빠'라는 새로운 삶을 끝까지 선택하며 '계속 나아갈 거야'라는 살아있음에 대한 강한 의지는 저자의 담백하고도 솔직한 문체로 표현되어 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까지도 그렇게 내내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엄마라는 새로운 삶을 마주한 내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의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한동안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었다. 책을 다 읽고 난 이후엔 더더욱 그랬다. 아무리 감동 깊은 영화 조차도 며칠이면 다 잊어 버리게 되는 나였건만, 머릿속에 꽤 오랜 기간 동안 나의 화두는 '죽음' 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변함 없이 유효하다. 이 한 권의 책 때문은 사실 아니지만, 이 책을 읽기 전보다 좀 더 절실하게 '오늘을 사는 의지'에 가까워지는 나를 발견한다. 그리고 스스로 반문해 본다. '나의 시간은 오늘부터 과연 얼마나 남았을까' 라고.


남은 시간을 예측할 수 있으면 더 잘 살 수 있을까? 모르겠어. 그치만 분명한 건  남은 시간도 덜 후회하려면 오늘 행복해야하잖아


죽음에 예고편은 없다. 

 죽음의 시간을 미리 알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면 그건 굉장히 큰 축복이렸다. 아. 죽음을 예견할 수는 있을 지는 모르겠다. 슬프지만 현실이 '앞으로 몇 달, 혹은 며칠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라는 객관적인 의사의 통보가 주어졌을 때.


고모부가 위암 말기래. 이제 얼마 안 남았다 해서 병원에 다녀왔다. 너도 시간 되면 한번 찾아가봐
진짜야? 말도 안 돼

그 말도 안돼는 게 현실이야. 그 양반, 많이 달라졌더라.
어떻게 달라지셨는데?

살고 싶다고 하더라
아....

그 고집 쎄고, 가족 보다는 돈이 우선이었던 사람이...
얼마나 사실 수 있는데?
길어야 세 달 이라더라. 위암 말기라 도저히 손 쓸 방법이 없대.
작은 고모가 힘드시겠네.

오히려 더 돈독해 졌다고 하더라. 보기에도 그래 보였어.
그렇구나..


 몇 년 전 고모부가 돌아가셨었다. 

 50세가 좀 넘은 꽤 젊은 나이였었다. 가까운 친인척 중에 아주 어릴적 조부모님을 제외하곤 내가 성인이 되어 처음 맞는 가족의 죽음이었다. 죽음이 가까워진 고모부는 매사 웃음기가 많아 지셔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러니하게 본인의 건강을 챙기려 좋은 음식을 먹으려 하셨다고. 곁에 있는 딸 2명의 행복과 아내의 건강을 챙기다 돌아가셨다. 그런 고모부를 지켜 보면서 나는 역설적이지만 '죽음'이 삶과 정말 가까운 것임을, 그리고 그것이 때론  우리를 얼마나 심각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대단한 힘을 가진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드라마엔 예고편이 있고 그 예고를 지나면 본편이 있다. 하지만 죽음은 예고편 조차 없다. 그저 죽음이라는 본편 그게 다 일 뿐. 본편을 거치고 나면 사후 세계가 시작되겠지만 우리의 의식이라는 건 그 사후 세계를 가늠할 수도 아니 알 수도 없으니깐 말이다. 죽고 나면 끝이다. 이 사실을 명확히 알고 사는 것과 그렇지 않고 그냥 사는 건 정말 판이하게 틀리다. 살면서 타인들의 죽음을 경험하면 하다 못해 장례식장에 조문이라도 다녀오는 날이면 사실은 마음가짐이 새삼 달라져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늘을 한번 더 쳐다보면서 살아야겠어. 매일 보는 일상의 자연도 사실 꽤 감사한 것들인데 왜 우린 모르며 살까... 그러니 헤븐!

  

오늘을 살아가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선물' 같은 것

 죽음과 삶은 어쩌면 너무나 가깝다는 걸 새삼 느끼는 요즘이다. 내일 출근을 하다가, 혹은 퇴근길 버스를 타다가, 유모차를 끌고 오는 도중에조차. 사실 뭐가 일어날 지 모르는 요즘 세상이니 더더욱 말이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들을 정신 없이 돌보는 일상이지만 나는 '죽음'을 기억하려고 매번 노력한다. '오늘'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면 바로 그 '오늘밖에 없다'라는 절실한 생으로의 긍정이 좀 필요했으니깐.


 육아가 고되서, 다 때려 치고 싶어서, 마음이 팍팍하고 험해서, 극심한 산후 우울증을 겪고 난 이후에, 더더욱 나는 '오늘'이 아니면 안될 것 같은 마음이었다. 지금은 물론 많이 나아졌고, 오히려 예전보다 더 열정과 에너지와 똘끼와 오지랖퍼로 살고 있는 워킹맘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젠 내일은 없는, 오늘만 산다. 꽤 치열하게. 이렇게 생명력 넘치게 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단언컨데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스스로 화두를 던져 봤었기에 가능한 일인 듯 싶다.  


 우리는 죽음을 잊고 산다. 

 아니 생각 조차 하지 못하고 사는 게 10명이면 9명일 지 모르겠다. 잊고 살지 않으면 삶이 어쩌면 지나치게 무거워질 법도 하고 그 무거운 삶이 우리를 죽음으로 이끌지 모르니깐. 하지만 말이다. 따지고 보면 죽음이라는 그 선물같은 진실은 어느 순간 나를, 당신을 후려칠 수 있다.


 죽음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드러내게 만드는 유일한 선물이니깐.


 어떤 때 보면 목숨이란 것이 굉장히 질겨 보이지만, 바로 다음 예상치 못한 어떤 순간 유리잔만큼이나 부서지기 쉽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는 어떤 이유도 없다. 그것이 삶의 부조리다. 신도, 운명도 이 부분에 대해 우리에게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다만 그저 거둬갈 뿐이겠지.


잠깐 머물다 떠나간 두 아이들이 생각난다.  

 누군가의 부고를 들었을 때를 기억하는가? 이게 뭔가 싶을 뿐 현실적으로 와닿지는 않는다. 실제 장례식장에 조문을 가 보아도 그렇다. 내 가까운 사람들이 아니면 와 닿지도 않고, 죽음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가까운 이가 죽음으로 다가왔을 때는 현실이 달라진다. 지금 이 순간도 영원히 그 사람은 이곳에 없고, 나는 남는다는 사실을 온전히 깨닫게 된다. 깨닫게 되는 순간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 죄책감과 알게 모를 눈물만 빗발치듯 흘러 내린다.


 첫번째와 두번째 유산을 겪으면서 그랬었다.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생명이었음에도 몹시 괴로웠고 허망했다. 심신이 그저 바닥에 늘러 붙어 다 내려놓고 싶은 상태 였었다. 밤새 잠이 오지 않았고 그 후로 반 년은 줄곧 불면증과 환청에 휩싸여야 했으니깐. 하지만 그랬기에 알 것 같다. 내가 경험했던, 나의 소중한 이들과의 안녕, 그리고 또 다른 생명들과의 안녕이 내게 주는 의미를.


 잠깐 머물다 떠나간 나의 두 아이들과, 지금 동시에 선물처럼 주어진 두 아이들, 내 곁에 곤히 오늘을 신나게 놀고 8시가 되면 어김없이 취침을 해 주는 사랑스러운 나의 쌍둥이들... 이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 죽음과 삶의 경계는 어찌 보면 종이 한장 차이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죽음을, 혹은 새로운 삶을 어떤 말로 표현하면 적합할까. 아니 세상에 어떤 단어들의 조합으로도 그 '죽음'과 '새로운 삶'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건 없어 보인다. 단지 그것들을 생각하면서 '오늘을 잘 사는' 걸 더 강하고 절실하게 다짐해 볼 뿐. 그래서 죽음이 선물이 될 수 있고 또 고마운 이유는 바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강한 생을 향한 의지를, 생명의 존귀함을 마음에 불러일으키게 해 줄 수 있으니 말이다.


당장 죽음이 찾아와도 오늘처럼 살 수 있을까

 부디 이 생각을 최소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가 그녀가 내가 우리들이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봤음 싶다.  '죽음'이 다가왔을 때를 상상해 보면 말이다. 오늘이라는 시간을 최소한 물 틀어놓 듯 그렇게 시시하게 살아지지는 않을 지도 모르니 말이다.


 사실 시시한 삶 따위는 없이 그저 오늘 하루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환경에서 각자의 길을 가며 치열하게 살고 있단 걸 안다. 뭐 때론 치열하지 않아도 좋을 지 모르겠다만, 다만 '오늘' 주어진 시간이 누군가에겐 그렇게 살고자 애썼으나 결국 가지지 못한 시간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말이다.


 그렇게 시시콜콜 집안 잡사 토크로 시간 때우는 TV만 죽치고 보지도 않을 것이고, 도서관 서가에 자리한 삶을 대하는 정말 좋은 책들이 즐비함에도 불구하고 말 한마디 할 줄 모르는 책으로 배우는 영어 공부에 그렇게 목숨걸지 않을 수도 있을 지 모른다. 타인의 사생활을 가십거리 삼아서 뒷담화 하는 데 시간을 소비하고 있지 않을지도 모르고. 뷔페 와서 김밥 먹고 있는 격처럼 살진 않을 거라는 말이다. (아 물론 김밥이 정말 좋아서 먹는 거면 찬성! 그럼에도 뭐가 차려져 있는 지 직접 둘러는 봐야 뭐가 좋은 지 알 수도 있다는 건 명심!)


계속 나아가 볼란다 나도.

 있는 힘 없는 힘 어깨에 힘 좀 빼고 안간힘 조금만 덜 쓰고 
다만 오늘을 스스로 치열하게 즐기며 있는 힘껏 사랑하며 살아 볼란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리고 내 스스로 있는 힘껏 말이다. 자유롭고 솔직하게 오늘이라는 24시간을 살아가고 싶다. '숨결이 바람 될 때'의 저자도 그러한 마음이었을 지 모르겠다. 사랑 말이다. 아빠로서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 배우자로서 사랑하는 사람과 끝까지 곁에 함께 해 주고 싶은 마음, 의사로서 자신이 돌보는 환자들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있는 힘껏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고 싶은 마음 말이다.


 따지고 보면 인생이라는 놈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절대로 우리가 알게 앞통수를 치는 법은 없다. 그래서 산다는 건 늘 뒤통수를 맞는 걸 지 모르겠다. 그래도 죽음이 불현듯 '안녕' 이라고 말을 걸어 오게 되는 순간 (아 섬찟하다) 뒤통수 맞은 격의 느낌 보다는 '아 그래 너 왔어?'라며 언제든 반길 수 있는 깡다구가 좀 붙어서 오늘들을 잘 흘러가 보면, 뒤통수 맞는 후회도 두려움도 조금은 덜 할 지 모르니 말이다.


 내가 오늘 해야 하는 건, 어제 보다 조금 더 나은 나로 오늘을 사는 것. 
그렇게 스스로 나아지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죽음이 코 앞에 다가왔을 때 덜 후회하도록..


오늘 하고자 하는 절실한 것들을 최선을 다해서 해 보는 거야. 그렇게 살다 보면 죽음이 찾아와도 덜 후회하게 될거야.
산다는 건 별게 없지만 사실 모든 게 다 아직 별거 같은 철 없는 엄마가..
먼저 떠난 너희 둘에게,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 아이 둘을 향하는 이 시간들을
오늘도 어김없이 하나 둘 써 내려가고 있단다.
사랑해.. 고마워.. 미안해
이 세 마디 단어가 매일 반복 되는 이유는 '오늘' 힘껏 사랑하며 살아야 되니깐.
그게 유일한, 죽음이 내게 주는 선물임을 아니깐..

사랑하며 살자. 나를 너를 너희들을. 그래야 덜 후회할 테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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