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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May 13. 2019

#13. 어쩔 수 없는 것들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있잖아, 쏘아버린 화살 하고 불러버린 노래하고 

다른 사람이 가져가 버린 내 마음은 

내가 어쩔 수가 없단 말이야. 


- 사랑 후에 오는 것들 - 






(#210호) 


아무 방해도 받을 필요가 없는 충분한 공간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대로 서로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은밀하게 하지만 직선적으로. 보기엔 도톰하게 보인다 싶었지만 막상 그렇지 않았던 정태민의 입술은 윗입술을 시작으로 목덜미를 지나처 쇄골이 있는 곳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자연스럽지만 또한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던 건 그가 아닌 내 쪽이었다. 멈춰야 한다고. 머리가 마음에 대고 내내 외치는 문장들이 곧장 목소리로 내뱉어졌던 건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 왜요 

-... 오랜만..이라. 잠깐..

- 아..

- 후회할 것.. 같아요. 여기서 그냥 

- 혜연 씨 아마 지금 나가면. 누구든 후회할 거예요 

- 뭘 해도... 말이죠 

- 뭘 해도 말입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훅 다가오는 그의 제압에 나도 모르게 침대에 쓰러지고 말았다.

 있는 힘껏 꽉 안는 그의 품에 오랫동안 머무르고 싶다는 뱀의 탐욕과도 같은 욕심은 끝이 없었다. 그대로 눈을 감는다. 살갗이 닿는 온도가 제법 뜨거웠던 건, 바깥의 차가운 공기로 인한 상대적인 것이리라. 아니면 정말이지 오랜만이라,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잠시 지그시 바라보던 정태민은 본능이 이끄는 행동에 이미 충실한 상태였다. 



그의 혀끝이 그대로 이마에서 코끝, 그리고 입술을 거쳐 조금씩 내 온 구석구석을 탐험해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손 끝으로 하나 둘 원을 그리는 듯한 느릿하면서도 힘 있게, 마치 전라가 된 나의 맨몸과 인사를 나누는 것 마냥 몸의 여기저기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의 자극적인 터치에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옅은 목소리를 막으려 애를 써봐도 도무지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터져 나올 뿐. 입을 가리려 했을 때 그가 내 팔목을 꽉 잡았다. 



- 참지 마요. 그대로.. 있어봐요. 몸이 예뻐서... 

-.... 눈물이... 그리고..

- 괜찮아요. 닦아줄게. 좀 더 느슨해져 봐.. 



뜨거운 눈물은 입김과 함께 그대로 서로의 입술을 또다시 느끼는 순간을 반복해 내려갔다. 길고 긴 밤이 거친 속도와 함께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영영 느리게 흘러가기를 바랐던 시간은 참으로 오랜만인 것처럼. 








(# 새벽) 

시계를 보니 새벽이 지나가고 있었다. 옆에서 자고 있는 그의 눈을 지그시 보고 있던 중에 그가 눈을 떴다. 



- 잠든 줄 알았어요

- 잠.. 들었었어요. 

- 깨워서 미안..

-... 당신도 나 같아졌으면 좋겠어...

-?



예의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동틀 무렵,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 이 마음을 전하지 않으면 그게 더 후회할 것 같았다. 마치 매몰찬 바람에 감정이 휩쓸려 버리는 것 마냥, 화를 낼 의도는 아니었으나, 그에게는 그것이 어떤 식으로 전해졌는지 알 턱이 없지만 어느새 마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 난.... 당신이 나 같아졌으면 좋겠어. 나만큼 힘들었으면 좋겠어. 

-... 혜연 씨. 왜...

- 당신 같은 사람을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지만. 그래서 더 화가 나. 왜. 눈에 띄어서, 왜 나예요. 왜 하필 나냐고. 

-.. 당신이니까. 내 눈에 뜨인 것도. 당신이어서. 

-...... 결혼했으면 좋겠어..

-?

- 당신이 결혼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똑같이 나처럼, 아니 나보다 더 비참해져 보라고. 그래야 똑바로 직시하죠. 현실을 봐요. 내가 지금 얼마나 좋으면서도 동시에 얼마나 참담한 기분인지 당신이 알 수 있어? 모르겠지. 결혼이란 그런 겁니다. 약속을 한 이상 어기고 싶어도 쉽게 어기지도 못한 채 마음으로는 몇십 번도 어길 수 있는, 그런 잔인한 인간들이 행하는 최고이자 최악의 약속....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도 헤매지만. 정말 멍청이 같아. 정혜연..

-... 헤매도 괜찮아요. 계속 말해요. 다 들어줄게. 

- 결혼해요. 수연 씨랑... 나보다 훨씬 아름답잖아, 돈도 많잖아, 당신 좋아하잖아, 다 가졌잖아..

- 하나 못 가졌잖아. 

-.... 



심장이 다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대로 덮고 있던 침대의 화이트 구스 다운 이불 끝을 손끝으로 꽉 잡고 있을 뿐이었다. 



- 마음. 내 마음을 못 가졌잖아. 그리고 여기. 가져간 사람이 있잖아. 여기. 내 눈 앞에. 이렇게. 

-... 도대체가. 당신이란 사람은. 

- 좀 더 자요. 그리고 서울로 올라갑시다. 

- 올라가면 결혼해요. 당신. 반드시 그래야 해.... 오늘 일은 없던... 거예요 

-... 정혜연 씨. 있던 게 없을 수가 있나. 당신은 그럴 수 있나. 

-... 그럴 수 있어요. 노력하면 그럴 수 있어... 

- 노력하기 싫으면. 

- 해요. 그래도. 

- 그게 최선입니까. 정혜연 씨. 

-..... 최선 따윈 나에겐 없어요. 그냥 오늘 되는 대로 사는 데. 엉망진창이야.... 

- 혜연 씨..

- 바보 같이. 엉망진창인데... 좋아. 좋다고요. 나더러 어쩌라고. 도대체. 나더러 어쩌라고 이렇게. 



그가 나를 꼭 껴안은 채 유난히 눈을 오래 마주쳤다. 그가 말한다. 



 - 이거 봐요. 흔한 섹스가 아니라, 사랑을 나눴잖아. 당신은 모르나. 

-.... 몰라야 해. 모른 척할 거야.... 그럴 수 있어. 그럴 수 있어요. 



살을 마주했던 시간보다, 지금의 심장이 더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사랑'이라는 단어 때문인 걸까. 잊고 있었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남녀 간의 흔한 원나잇으로 그치기에는, 그와 내가 지금 만들어 내고 있는 시간은 몸의 관계 그 이상을 넘으려 하고 있었다. 눈물이 터져 나오려고 하는 걸 그가 눈치 채지 않기를 바라며 이내 얼른 웃어 보이려 했다는 걸 그가 알아챘다. 



- 울보네. 내 사람은. 

-... 나. 당신 사람.. 아니야. 

- 여기선. 조금만...

-... 

- 결혼은 하고 싶지 않지만, 올라가면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 

- 상대 쪽에서 성화입니다. 사업 핑계로 미룬지도 오래됐고. 정리를 몇 번 하려고 시도했는데 그때마다 수연이는 약을 먹었어요. 지금 거의 막바지에 왔고..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나도 모르겠지만. 한데 하필 나도 이럴 때 당신을 만나게 될 줄이야. 이런 게 신의 장난 아니고 뭘까 싶지만. 

- 해요. 그럼. 

- 혜연 씨..

- 해봐요. 하고 후회할 거면 한번 해봐.

-... 진심인가. 그 마음. 화 나서 말하는 거 말고 

-.... 진심 아니고 싶지만 진심이어야 해요. 그래야 해... 요.

-... 돌아가죠. 







생각할수록 무성의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다는 걸 안다. 

생각할수록 말이다. 좀 더 솔직한 다정함으로 받아 주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이내 마음에 돌덩이가 쌓여서 움직일 때마다 욱신거리는 것처럼, 출퇴근을 할 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걸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가 말했듯 동물적인 교감이 아니라 우리는 사랑을 나누는 것 같다고. 

그 말에 맞장구를 쳐 줄걸 그랬다. 대답을 주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쉬움, 혹은 그리움, 혹은 어떤 분노 섞인 감정과 함께 그렇게 소용돌이치듯 일상에서 자주 나를 찾아왔다. 그때마다 혼자 중얼거릴 달리 방법이 없었다. 



- 맞아. 나도.. '사랑' 같았어.. 보고... 싶을 만큼의. 지금. 보고 싶은 것처럼.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나는 막중한 책임감을 결부시키지 않고서는 더 이상 누구 앞에서도 사랑을 이야기할 수 없게 되어 버릴 것 같았다. '사랑' 그 단어의 무게는 어느 때보다 아찔했으니까. 일을 지속하면서도 나가려는 정신을 힘껏 부여잡아야 했다. 다행히도 그날 이후 그와 마주하는 시간이 신기하게도 없었지만 그건 아마도 그가 나를 향한 배려로 인한 피함이라는 걸 넌지시 알 수 있었다. 지현이가 곧장 들려주는 정태민의 일상은 그것을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도. 너무 고지식할 정도로. 



- 정태민 대표님, 당분간 독서 모임 쉬신다는 거 들었어요?

- 응.. 메일 왔었어. 전체 메일

- 저도 참가하고 싶었는데. 아쉬워요 선배. 

- 출간 사인회 잘 진행되고 있지?

- 네. 그럼요. 선배 갈 거죠?

- 나 그날 오후 휴가 내려고. 

- 어디 아파요?

- 그냥.. 좀 쉬고 싶어서. 

- 아참, 근데 그거 알아요? 약혼식 한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청첩장 돌린 대나 봐요. 

- 응? 

- 하여튼 있는 사람들은 그런 것도 스포 막 날리고 그러는 거 아니지 않나. 이수연. 얼굴은 예쁜데 볼수록 밉상인 거 있죠. 마주할 때마다 간접적으로 자기 결혼한다고 자랑삼아 얘기하더라고요. 어? 선배, 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정말 오늘 무슨 일 있어요?  

-.... 아냐. 아무 일도 아니야. 



말하지 못했다. 

응. 무슨 일이 있다고. 있었다고. 그리고 여전히, 내내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고. 그렇지만 무슨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이성은 알고 있었고 그리고 또 모른 척하고 싶어도 알아야 했기에 내내 혼자 중얼거리며 아무 일이 없다고 스스로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쏘아 버린 화살과 불러 버린 노래, 그리고 건네어진 마음. 

이것들은 정말이지 어쩔 도리가 없다고. 정말 그러하다고. 그리고 나는 진실을 원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아주 오래도록, 그래야 한다고 애써 마음을 외면하고 있었다.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주방 한편에는 읽다 만 책의 제목이 나를 위로해 줄 뿐이었다.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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