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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May 14. 2019

시간에 내맡기듯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걸 반복하듯.

시간에게 맡겨봐. 그리고 자신을 들여다봐.

약간은 구경하는 기분으로 말이야. 적어도 시간은 우리에게 정직한 친구니까.


- 사랑 후에 오는 것들 -





아차 싶었다. 돌려놓았던 세탁기 안에 다 된 빨래 너는 걸 깜빡한 채 잠들었다는 걸.

눈을 떠 보니 다행히 밤 12시가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새벽이었으면 '새벽'이라는 핑계로 인해 그대로 몸을 일으켜 세우지 않고 계속 누워있었으리라. 며칠 사이에 목이 정말 가버렸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요 근래 많이 울었나 싶던 게 급기야 제대로 감기에 걸려 버리고 만 걸 테다. 약간의 몽롱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아픔은 밤에 더 잘 스며든다. 고통이나 아픔들은 밤을 좋아하는 걸까.



12시가 좀 지나자 그이가 들어왔다.

기름진 고기와 술 냄새가 섞여 있는 옷을 벗어던진 채 샤워를 하러 들어가는 그이의 뒷모습을 보고 순간 화를 참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대로 '퍼붓지' 못했다. 이럴 땐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지 싶다.



- 나, 상태 안 좋아 요새...

- 비타민 C 먹으라니까. 아참, 출장 취소됐어.

-... 다행이네. 있잖아. 나. 샌프란시스코에 가기로 했어.

- 뭐?




엉뚱한 말을 해대기 시작했다는 건, 마음이 소란스럽다는 반증이다.

특히 이번엔 아무래도 몽롱한 의식 때문이었으리라. 왜인지 지금도 이유는 뚜렷하지 않다. 빨래만 널고 일상의 안부를 묻고, 그대로 안방으로 들어가도 됐었겠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보고 싶다는 바람이 아직 마음에 서려 있기에. 그와 나는. 우리는. 공간과 책임'만' 같이 지는 룸메이트 같은 관계가 아니니까. 바라지 않으니까.



해가 지는 걸 함께 보고 싶다는 건, 사랑한다는 또 다른 말일지 모른다.



그러한 삶을 결국 종종 살고 있다 한들, 나는 아직 폐쇄적인 상태로 그를 대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도 나와 비슷할 것이라 믿고 있으니까. 비록... 육체적인 감흥과 감각의 수치는 조금씩 떨어지고 있을지언정. 마음은 멀어지고 싶지 않다는 것, 여전히.. 손을 내밀면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봐 주기를 바라는 것이, 사랑받고 싶은 여전한 어린아이의 심보가 어쩌면 내면의 본심 일지 모른다. 샌프란시스코를 들먹였던 건 어쩌면 무의식 속에 잠재된 욕망이 투영되었으리라. 의식 속에 서리는 말과 행동은 사실은 무의식을 반영하니까. 늘 그러하니까.




- 아이들에게 말했어. 우리 거기 같이 갈 거라고. 그랬더니 좋아했어. 그래서 정말 그렇게 할 거야. 훈민정음 양쪽에 끼고 샌프란 시스코 골든게이트 브리지 산책할 거야. 돌아오는 길엔 부딘 베이커리에 들려서 크램차우더 하나와 크랩 샌드위치를 먹을 거야.

- 하여튼 엉뚱하기는.

-... 응. 그런데 엉뚱한 척, 미친 척, 이런 생각이라도 하고 살지 않으면 안 살아져. 당신 알아? 내가 무슨 생각 하면서 사는지, 오늘은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무슨 일 때문에 눈물이 날 뻔했는지. 그런 거 궁금은 해?

- 왜 또 그래.. 그래. 힘들지. 미안해. 조금만 더 참자. 혜원아.



생각에는 인내가 없다. 시작만 있을 뿐. 뚜렷해지니 결국 가게되리라.. 언젠가. 곧.



이름이 들렸다. 그래서 나는 그칠 수 있었다.

정말 단순하다. 단순한 몇 가지의 이유들이 일상을 유지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단순함이 때로 일상을 풍요롭게도 만든다는 걸, 나는 종종 잊고 만다.


  

-... 준비는 하고 있어? 서류..

- 응. 이제 또 써 봐야지. 정말 틈이 없다. 틈이. 뭐 알아볼 틈이 정말 없어. 나도 시간이 아쉬워.

-... 미안해. 나는 도와주지도 못하는데.

- 아냐. 이해해. 일하고 애들 보고. 충분히 잘하고 있어. 조금만 더 참자. 화 좀 내지 말고.

-... 응. 내일 병원 갈 거야. 당신도 몸 챙겨. 비타민 사뒀어. 저기..

- 그래. 나 이거 쓰고 들어갈게. 먼저 자.





바람도 아닌 것에 흔들리고 뒤척이기 싫어서, 나는 어쩌면 이 곳을 떠나려는 준비를 하는 걸까.

언제가 될지도 모르는 그 순간을, 그러나 어젯밤, 이상하게 갑자기도 간절히 바랐다. 그랬기에 아이들을 재우면서 공룡 동화 이야기를 해달라는 첫째 둥이에게 나도 모르게 마음이 새어나가 버린 것이리라. 샌프란시스코의 골든게이트 브릿지에 티라노사우루스가 나타났다고. 그렇지만 크랩 샌드위치를 던져주니 웃으면서 먹고 사라졌다는 그 허무맹랑하고 터무니없는 1도의 재미도 없는 이야기를. 아이들은 흥미로운 듯 듣다가 우리 셋은 그렇게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걸 고민하는 밤이 잦은 요즘이다.

그렇지만 사는 건 이런 거라고. 어차피 고민하다 아프고, 다시 아침이 시작되고 그 아침만은 굳건히 지키고 싶은 마음에 다시 밝음으로 무장하고. 혼자 남겨지는 순간에는 다시 고민하고. 떠나고 싶지 않지만 때로 떠나기도 해 보는. 그러다가... 흐르는 시간을 믿어보며 그렇게 잠에 드는 일. 시간에 내맡기며 사는 삶, 말이다.



시간을 종종 글로 기록한다. 그렇게 이야기가 담긴 종이배가 흐르듯, 시간에 내맡긴다.. 유연하게. 좀 더 유영하며.




시간이 흘러, 오늘을 기억하는 날이 올까.

그때, 너희들을 재우며 말했었던 그 엉뚱한 동화가, 우리들을 이곳으로 이끌었음을... 언젠가 이야기할 수 있는 순간이 오기를 나는 바랐다.



#밤 11시부터_3시까지의_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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