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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May 31. 2019

좋은 가족구성원의 조건

#통장잔고  #입금내역 그리고 #감싸주기..... 

설상가상이라고 했던가

옛말은 뭐 하나 어긋나는 법이 좀처럼 없다. 평일 하루 중 거의 유일하게 글과 책으로 '나만의 휴식'을 도시락을 까먹으며 즐기려던 찰나, 예감은 빗나지 않는다. 어린이집 전화 한 통을 시작으로 소식들은 연이어 찾아온다. 좀처럼 쉴 틈이 요샌 없다. 아니면 없다고 생각한 마음이 문제든가. 둘 중 하나겠다만 아마 후자가 좀 더 가까운 이유이지 싶다. 



1. 

- 어머님. 바쁘시죠?

- 아... 선생님. 보육비.. 결제할게요. 늦어서 죄송해요. 적어 뒀는데 깜빡했어요. 요새 이렇게 잘 잊네요.

- 바쁘신 데 죄송해요. 

- 아닙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2. 

- 저기요. 왜 전화를 안 받으세요?

-... 죄송합니다만 안 받은 게 아니라 못 받은 겁니다. 제가 하루 24시간 전화를 붙잡고 살면 일은 못하지 않을까요?

- 아무튼 회신 주세요. 

- 그러하겠다고 말씀드렸으니 약속은 지킬 겁니다. 기다려 주시면 고마울 것 같아요... 부탁드립니다. 

(따지고 보면 그 이후에 그냥 '네'라고 하면 그만일 것을 굳이 이렇게 '화'를 예의 바르게 내야 했었나 싶은 후회를 잠시 했다. 그러나 이열치열. 근거 없이 그저 자신의 회사 안에서의 위치를 자신 본인의 힘이라고 '믿는' 그 주제 파악 못하고 움직이는 일터의 사람에게는 때때로 이런 말을 안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지르며 산다. 여전히. 이놈의 성격, 여전히 지랄 맞다...)  



3. 

- 나야. 뭐해? 

- 점심때잖아. 밥 먹고 책 읽지. 뭐하긴.. 

- 미안해. 또 늦어서. 

- 예상했어. 나보단 장모님한테 미안해야지. 엄마. 팔 어깨. 다 나갔어.. 

- 응.. 미안. 좀 힘드네. 심각해 여기 필드 상황.. 

-... 여보.



결혼하고 생전 힘들다거나 심각한 상황에 대한 내색을 '잘' 안 하던 그에게

그런 그의 입에서 힘들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어쩌면 나는 꾹꾹 참고 있던 어떤 뜨거움이 목에서 차오르는 것을 겨우 막아내면서도, 터져 나오는 내면의 목소리를 막을 겨를은 미처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목소리에 담긴 마음은, 아마 그에게 여전히 '좋은 가족 구성원'의 역할을 잘 짊어지고 흐르고 싶다는 본연의 투명함이 담겨 있다고... 나는 여전히 그와 그렇게 되도록 어긋나지 않고 잘 지내보려 한다고. 



또한, 여전히 어떤 면에서 이건 '사랑'이라고. 

정말이지 믿고 싶었다. 그리고 그건 사실 내가 나의 믿음에 확언하고 싶은 목소리이기도 했다. 사랑은 남아 있다고. 나 혼자만 이해할 법한 어떤 터무니없는 말들을 뻔뻔하게 누군가에게 잘도 내지르는 것을 보면. 





- 할 데까지 해 봐. 

- 응? 

- 갈 데 까지 가보자고. 일, 끝까지 해봐. 당신 그만둬도 우리 네 사람. 몇 년은 먹고살 수 있어. 

- 그래... 고마워

- 통장잔고 아직 있어. 넉넉해. 그리고 비워지면 다시 채우면 그만이야. 내가 채울 수 있어. 그러니까 힘을 내. 할 말은 하면서 살아. 지랄이 다가오면 지랄로 맞서는 거야. 쫄지마. 

- 응. 내 마누라. 든든하네. 

- 난 안 든든해. 내 가족구성원... 그러니 나라도 든든해야지. 

- 하하.

- 내가 더 잘 할거야. 할 수 있는 거. 다 해볼꺼야. 다음달엔. 더. 뭐든.. 잘 해볼거야. 잘 할거야. 꼭. 



사랑의 표현은 통장잔고라고 했던가. 

정말 그렇다. 현실은 이성적이고 냉정하니까. 언제까지고 '감정 나발'에 놀아나기에는 우리의 시간은 유한하고 흐르며 멈추지 않으니까. 그러하니 나는 오늘도 아이 돌봄 노동의 최대 지지자인 친정에 송금을 한다. 그렇게 좋은 가족구성원의 물리적 조건을 완성시키려 한다. 혼자 살지 않는 나는 여전히 사회적인 동물이고 역할극은 이미 시작되었고 무대는 연출 되었으며 그렇다면 이왕 사는 거 좋은 가족구성원으로 이번 생을 경험해 내고 싶으니까. 어떤 면에서든,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든.



사실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은 가끔 엉뚱하게 발설되기도 한다. 



통장 속 입출금 내역들을 가계부 안에서 관리하며 어떤 생각을 한다. 

이 숫자들의 흐름이 부디 어떤 의미가 담긴 사랑으로 가득 차 흐르기를. 또한 사랑의 증명(?)을 끊임없이 해낼 수 있기를. 그렇게 줄 수 있는 현재의 모습에 감사해하지만 안주하지 않고 이 숫자들에 좀 더 '힘'을 키워내 보기를. 그리고 잠시 비워진 숫자조차도 보듬을 수 있는 마음의 소유자이기를.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해 보기를. 그에게 했던 '갈 데 까지 가 보자'라는 목소리는 사실 내게 하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울러.... 



그제 저녁, 소규모 강의를 마치고 서울에서 분당으로 돌아오는 광역 버스 안에서. 

남산 타워를 지나 한남동 블루스퀘어가 보였을 때 내가 그렸던 그 장면을 다시 한번 떠올려낸다. 안나 카레니나 현수막과 마주한 그 순간, 마음에서 바랐던 어떤 장면을. 기쁘고 편하게 그 순간의 그 공간, 그 시간을 각자 따로 또 같이 온전히 채우는.



그 날, 그때의 내가, 네가 함께 할 거라고. 

이것도 '사랑' 이리라고. 




블루스퀘어에서 나왔을 때의 하늘 석양은 이렇지 않을까. 



#하고 싶었던 말은_그래도_결국_사랑은_통장잔고다_계좌이체_입금내역

#좋은가족구성원이_그렇게_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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