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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ul 26. 2019

#15. 그토록 그리운  

마티네의 끝에서...  

바그다드에 오기 전에 단지 아름다운 것을 접하는 것뿐 아니라, 

그의 품에 안겨 버렸다면 내 인생은 지금쯤 어떻게 달라졌을까... 


- 마티네의 끝에서 - 







살다 보면 어떻게 해 볼 도리 없이 받아들여야 되는 것들이 있다. 

인정하고 사는 여러 가지 것들. 사실이든 거짓이든, 그것들을 무시하든 마음에 품고 살든. 정태민과 이수연의 결혼 소식이 그랬다. 한 사람은 웃고 있었고 한 사람은 웃고 있지 않은 사진. 결혼이라는 이벤트에 어느 쪽이 더 진지한 걸까. 웃는 쪽? 아니면 웃고 있지 않은 쪽? 



이유야 어찌 되었든, 여성 잡지에서 그를 다시 만났을 때 나는 인정했다. 

어쩔 도리가 없는 것들일 뿐이라고. 두 눈은 이미 지현이가 건네 준 잡지 속 두 사람의 인터뷰 기사를, 정확히 말하자면 편집된 문장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그 환청 또한 속절없이 인정해야 했다. 




- 주간님은 안 오셔서 모르셨겠지만, 진짜 대박이었어요. 

- 그러게. 그런 '행사'에 출판사 식구들까지 다 초대할 줄은... 

- 그러니까 말이에요. 정태민 대표님 진짜 멋지죠. 우리까지 챙겨 주시고. 근데 우리 거의 하층민 레벨이었다니까. 무슨 셀럽 파티인 줄 알았었어요. 주간님도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진짜 화려했어요. 

- 그래... 

- 실물이 백배 나아요 남자 쪽은. 여자는 사진빨 화장발 인정. 어후. 솔직히 제가 봐도 작가님, 아니 대표님이 좀 아까움 

- 보이는 게 다는 아니니까...

- 에이. 솔직히 주간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 잘... 어울리던데 뭐. 지현이 네가 말하는 '셀럽'처럼. 

- 하긴 그렇죠. 둘 다 얼굴 하나는 연예인 같아서. 근데 그 정신없는 와중에 인사드리러 가니까 정태민 대표님, 묻더라고요. 진짜 배려심 짱

-... 왜?

- 그냥 출판사 식구들 안부 묻고, 아참. 주간님 안부도 물었어요. 왜 안 오셨냐고 

- 아.. 그래.... 

- 아무튼 신혼여행 다녀오시면 인사 한번 드리러 오시겠다고 했어요. 5쇄 들어간 기념 겸 파티 여신 다고! 그땐 꼭 오시래요 주간님도. 

- 시간이 되면... 




속절없다고 한번 더 생각했던 건 거짓투성이의 나와 대면했을 때였다. 

신경 쓰고 있지 않은 척, 이미 다 끝난 척을 해 버리고 말았으니까. 그와 관련된 모든 소식을 애써 차단하거나 단절하려 할수록, 주위에서 들리는 어쩔 수 없는 것들에 금세 흔들리는 나를 발견했을 때. 그제야 보였다.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그에게 그때 그 말을 전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전화기 진동이 울렸던 그 날, 그의 이름을 보았을 때, 심장이 뛰었고 계속해서 끊기지 않는 전화를 마지못해 받았다고 애써 생각하려 했지만 사실은 그런 게 아니라고. 마지못해 받은 게 아니라 내내 기다렸다는 걸 차라리 들켰더라면... 기다릴 것 같다고 말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미련한 생각만 맴돌 뿐이었다. 



또 다른 나와 만나려 했을 때. 



(회상, 새벽 1시, 혜연의 집 거실 식탁) 



- 접니다. 혹시 안 주무시면 잠깐 대화 나눌 수 있을지요. 

-.... 

- 말은 없고 끊지도 않으니 일방적인 대화지만... 약속한 대로, 아니 서로 약속 따위 하지 않았지만 당신이 해보라 했던 그 결혼. 그 날. 당신이 오든 오지 않든 나는 웃고 있지 않을 겁니다. 웃음이 나오지 않을 것 같군요. 마지막까지 이런 말 정말 미안하지만...

- 알아요...

-... 혜연 씨가 모르는 것도 있어요.  

- 모르든 알든 중요한 건, 축하.. 한다는 거예요. 축하... 해요. 정말로. 

당신의 현재 그 역할, 그 위치를 내가 외면한 채 다가갔다는 것도 어느 정도 인정합니다. 힘들게 했다는 것도 압니다. 그렇지만 혜연 씨. 나는 진심이었어요. 그 감정은. 그래서 미안하고 그렇지만 앞으로도 미안한 일이 계속 생길 것 같은 마음이라 나는 그래서 이 결혼이... 두렵습니다. 

-........

- 당신이 용기를 내주면 나는 당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다 조력할... 수 있었어요. 한데 결혼을 하라니. 그래서. 그 또한 무서운 마음을 간직한 채 지켜 내려합니다. 정말 미친놈 같죠. 내가 생각해도 지금 나는 미친 것 같습니다. 




계속 듣고 싶었다. 느리듯 천천히, 그러나 또렷한 그의 목소리를. 

그리고 그가 '미친 것 같다' 고 말했을 때 기뻤다. 속으론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날 뻔했다. 그도 나와 비슷하다는 걸 그런 식으로라도 확인받고 싶었던 내가 있기에 기뻤던 걸까.




-... 미치지 않고 사는 사람도 있나요 

-.... 혜연 씨..

- 몇 달, 아니 단 하루. 미친놈 미친년. 됐어요. 그 정도면. 당신 가진 거 많고, 나도 적진 않죠. 다 잃을 각오. 나는 없어요. 그러고 싶지도 않고. 알죠 무슨 의미인지. 모른 척하지 말아요. 

-... 현실적이군요 

- 현실을 살다 보면 현실적이 돼요. 그러고 싶지 않아도.. 그렇게 된다고요. 애들 장난. 아니잖아요. 



손가락으로 어느새 머리에 틀어져 있는 헤어 집게를 풀러 어깨까지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조용히 쓸어 넘겼다. 알 수 없이 끓어오르는 어떤 분노를 최대한 방어하려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 혹은 방어책 혹은 그 어떤 나만의 쿠세 같은 걸... 보이지 않는 그에게 들키고 싶었기에. 보고 싶다는 표현이 때론 그렇게 분노와 함께 엉뚱한 동작들로도 나온다는 걸 그는 알지 못한다. 여전히 나에 대해 모르는 게 많은 그가 슬프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말을 이었다. 하고 싶었던 그 말을. 



한 방울 두 방울, 주워 담지 못하는 문장을 마음으로 내뱉을 뿐.



-... 미안합니다. 

- 화가 나요.. 자꾸만.. 

-... 혜연 씨가 화나는 이유가 궁금하네요 

-.... 나.. 때문에. (보고 싶어서..) 

-... 나도 그래서 이런 나 때문에 화가 납니다. 스스로 

- 당신은 아무것도 잃지 않을 거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나도 마찬가지고. 결혼.... 축하해요. 그리고... 이제 전화하지 말아요. 받지 않을 겁니다. 

-.... 와요. 결혼식. 와서 봐요. 내 얼굴. 똑바로.

- 기다리지 마세요. 안 갈 겁니다. 

- 기다릴 겁니다. 그런 식으로라도 나는... 당신. 보고 싶군요. 아직 미친놈이라. 아마 당분간. 그럴 거라. 




기뻐서 눈물이 날 뻔했다. '기다린다'는 그 동사 때문에. 

인생에 이런 확실한 감정, 다시 생긴다면, 그 다시 생기는 감정이 더군다나 단 한번뿐이라면, 나는 그 사람이라고 생각해 버렸다. 정태민. 



단정하고 예의 바른 목소리, 명석한 사람.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할 것 같은 사람. 이미 그러고 있는 사람. 시간을 허투루 소비하는 법 없이, 자신감이 있지만 자만하지도 않는 사람, 마땅히 모두에게 사랑받을 사람. 누구보다도 후회 없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해야 마땅한 사람.. 그래서 보고 싶은 감정 조차 죄스러워서 미안하고 슬픈 사람. 한데 내 존재가 그것을 그에게서 박탈한 것 같은 사실에 이상하게 억울했다. 




억울함도, 슬픔도 시간이 흐르며 흑백으로 변해가지만, 그럼에도 남는 몇 개의 장면들이 있다. 



여태껏 아무것도 한 게 없지만 또한 모든 걸 주고받아본, 그런 관계 

뭐든 주고 싶지만 그래선 안 되는 대상. 그래도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보다, 살다가 어떤 어려움과 만났을 때 한번 정도는 생각하고 떠올려주기를 바란다면, 그건 욕심인 걸까. 그에게 묻고 싶었다. 용서받지 못할 욕심이어도 마음에 품고 살면 그건 죄인지 아닌지를. 



전화를 끊고 한참을 멍하게 펼쳐진 책에서 눈을 떼지 못했었다.  

그 날 저녁, 일찍 퇴근한 남편과 아이와 함께 모처럼 동네 산책을 했던 나도 나이고, 지우의 어리광을 모두 받아주는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이고, 우리 부부는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며 웃었던 장면 속의 나 또한 나임을, 나는 부인하지 못한다. 



'가족'으로 맺어진 둘을 향한 나의 마음을 고스란히 간직하면서도 동시에

그토록 그리운 순간이 내 삶에 또 있었던가 싶어서 눈물이 갑자기 하염없이 눈동자 위를 차고 올라 결국 볼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이런 벅찬 감정을 주고받았던 관계를 경험했던 것만으로도 충분해야 하는 내가,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그와의 시간이 앞으로 우리들에게 삶의 흑이 될지 백이 될지, 딱 잘라 말할 수 없지만. 



나는 정말이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한 번만, 그의 품에 안길 수 있다면.  


그때 눈에 들어온 소설 문장만이 내내 도돌이표처럼 반복되어 흘렀다. 

'단지 아름다운 것을 접하는 것뿐 아니라, 그의 품에 안겨 버렸다면 내 인생은 지금쯤 어떻게 달라졌을까. '




우리의 시간은 그렇게 2년을, 각자 흐르고 있었다. 

그토록 그리운 목소리가 다시 나를 찾아오기 전까지는. 진동이 끊이지 않는 울리는 전화기를 붙잡고 한참을 창 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받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른 채로.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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