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완벽하게 좋은 순간, 그것을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자신에게 유익한 것인지.
- 나는 당신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
만약, 완벽하게 좋은 순간이 바로 '지금' 이어야 한다면.
다행이다. 나의 '지금' 은 완벽하지 않지만 꽤 좋은 상태니까. 비가 내리는 금요일, 밤 10시가 다가오는 걸 지켜보며 두 손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다 잠시 멈추고 오른손으론 캔맥주 한 모금을 입술에 갖다 댔다. 동거 중인 남자 1,2,3호의 급 시댁 소환의 마법(?) 이 일어난 시간 덕분에, 나는 식탁 위에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동반자는 캔맥주,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흐르는 요즘의 무한 반복 노래, 그리고 핸드폰, 보다만 원고, 그리고 이 책.... 읽자마자 마음에서 마구 일렁이는 어떤 문장을 적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하찮은 핑계를 대본다.
나는 당신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김종관, 아르테(arte), 2019.09.04. p. 248
영화를 만들고 글을 쓰는 사람.
이런 감성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진실과 허구 사이에서의 경계 어디쯤을 계속해서 '기억' 하는 직업, 혹은 천직, 혹은 그냥 그가 몰두하는 그 시간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그의 마음가짐이 있어서인 걸까. 뭐랄까 그냥.... 참 다행이다 싶었다. 비 오는 금요일에 읽지 않았다면, 솔직히 와 닿지 않은 문장들이었을지도 모를 거라는, 그냥.. 그런 생각이 앞섰던 '오늘'이었기에. 고단함의 연속, 그 끝에 잠시 찾아온 외로움, 그러다 사라지는 그 감정들 모두, 어떤 '위로' 같기만 하다는 걸, 읽으면서 그에게 '공감'받는 것 같았으니까. 역시 정서적 공감대가 만들어지는 관계는, 나로선 반갑고 고마운... 그런 것들이다. 눈엔 보이지 않을지언정. (그래서 아쉽지만 그래서 또 괜찮을 수 있는)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당시의 고단함을 이겼던 힘은, 가지지 못한 그 위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가지지 못한 위로야말로 때로는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희망으로 둔갑하곤 하니까.
사랑은 소유가 아니지만, 때론 그 사랑을 '소유' 하고 싶은 욕망이 일렁일 때가 있다.
가졌다고 생각한 사람이지만, 절대 가질 수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면 더더욱. 그렇지만 우리에겐 '기억'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하기에 그 기억을 붙잡은 관계들은 '인연' 이 될 수 있는 것이라는 걸, 그도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기억은 스러져가는 환영을 잃어버리지 않는 단 하나의 방법이다.
예전에 북 콘서트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이런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다.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느린 템포의 목소리, 소년 같은 개구쟁이의 미소를 지었지만 그 안에 어떤 노곤한 어른이 담겨 있는 표정의 사람.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도 어딘지 그 '허구를 이야기하는 영화'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듯한 사람. 어떤 말들은 천천히 애써 숨긴 듯 웃으면서 침묵하듯 감췄던 그의 이야기가 시간이 흘러 이렇게 책으로 다시 엮어진 듯 (10년 전의 문장들의 개정증보판이라고 하니 어쩌면 그 예전부터의 이야기였을지도 모르겠다만) 문장으로 다시 만나게 되니 이상하게 반가운 건... 다시 목소리가 상상이 되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나지막하게 듣기 좋았던, 어떤 목소리를 생각나게 만드는 그런 그리운 듯 슬픈 듯한 그런 목소리가.
발끝이 짓무를 때까지 걷고 싶을 때가 있다.
그 어떤 것에서 나 자신이 가장 멀리 떨어지길 바란다.
새로운 세상을 찾아 여행을 할 때 마주치는 낯선 풍경은 우주가 아닌 이상
낯익은 일면이 도드라지게 다가온다.
영화라는 것은 버려진 시간들을 다시 주워 담아 그걸 장면으로 만들어 내는 것만 같다.
그래서 '기억'이라든지 어떤 간직하고 싶은 '장면'이라든지, 그런 것들을 섬세하게 담아내고 있는 그의 시나리오, 영화가 그래서 좋은가 싶다. 사라지는 걸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기억'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 같아서.
모든 것은 사라질 것이다.
사라지는 것을 잡을 수 있는 것은 기억뿐이다.
영화는 잊힐 모든 것들에 대한 기억이다.
편지를 곧잘 쓰곤 하는 나로서는, 그의 메시지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편지를 쓰는 이의 마음을 완벽하게 이해받은 것 같은 느낌이었어서, 반갑고 고마웠고 어딘지 모르게 위로받았던 것은, 그 편지를 쓰는 사람이 마주하는 '수취인 불명'의 시간조차도, 어떤 고단함과 외로움이 있다는 걸 분명 아는 사람이기에, 그런 '벗' 같은 느낌이어서. 아아... 비가 와서 그런가. 아무 말을 시전하고 있는 지금임에도.... 나는 수취인 불명으로 남겨질 어떤 편지를 잠시 떠올려 보게 된다. 그에겐 어쩌면 그런 답신 없는 편지 속 이야기들이 '영화'로 재탄생되는 건 아닐까...
영화가 가끔 편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내고 읽히기를, 마음에 가닿기를 바라는 것. 그러한 목적이 살아 있을 때 영화도 살아 있다.
하지만 영화는 고단한 여정에 아랑곳없이 수취인 불명의 편지가 되어,
무관심 속에 서서히 죽음을 맞기도 한다. 긴 죽음의 시간.
오랜 세월이 지나고도 위로를 건네기 위해 어떤 이에게 도착한 편지처럼,
우리 앞에 당도한 영화인 것이다. 수취인 불명의 은밀한 편지들이 아직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통증이 없는 슬픔은 단순하다.
깊이 없는 슬픔이라 금세 잊을 수 있을 것 같아도 오히려 잔잔해서 오래가는 슬픔들이 있다. 문득 떠오르는 그리움을 동반한 단순한 기억, 그것과 함께 찾아오는 슬픔이라는 감정, 그러나 어쩌면, 깊은 통증이 없기에, 그래서 또 충분한 기쁨조차 맞이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준다고.... 그럴 수 있는 감정들이라고. 과거의 '그'와 많이 다투었고 서로 할퀴어 생채기를 냈었던... 그 기억이 생각나서 잠깐 키보드 위에 올려진 손을 멈춘 채, 흐르는 음악을 마냥 듣고 있게 되는 '지금'의 '나'는....
단순한 슬픔이 찾아오려 한다.
적막한 거실 속 이미 밤 10시를 지나가고 있는 이 시간. 누군가 들을 떠올리며... 슬픔을 가져다주는 이들과 반대로 또 충분한 기쁨을 가져다주는 이들... 같은 존재들, 나의 남자 세 명... 때로 나의 모든 것을 주고 싶지만 사실 절대 줄 수가 없는.... 그들을 향한 이 마음의 정체를, 애써 정의하려 하진 않는다. 다만....
나누겠다고.
이 슬픔마저도 언젠가 그들과 나누고 싶은 만큼의 '사랑' 이, 이것도 내가 만들어내는 또 다른 사랑의 형태라면. 나는 오늘의 이 기억조차 '사랑'으로.... 간직하고, 언젠가 담담하게 고백해보리라.
"사랑.... 하지만. 가끔 그 사랑을 의심한다. 보고 싶지 않을 때가 생기니까...
내가 너무 지칠 때. 그냥 그럴 때. 막상 당신들의 부재가 다가왔을 때의 상실감은 '오늘' 같이 뒤늦게야 찾아오지만. 그래서 단순한 슬픔을 주는 나의 당신들은, 그렇지만 반대로 내게 충분한 기쁨을 주는 존재라는 것도 이제는 알기에...
너희 둘... 그리고 당신. 나의 '그'라는 대명사..' 당신들과의 매일 이 일상은 나로서는 '영화' 같은 장면으로 훗날 기억될지 모르니까. 그땐 붙잡고 싶은 '과거'로 변해있을 '현재'가 아주 소중한 당신과 나의 영화였다고... 그렇게 아름답게 그립다고... 나누고 싶다고 말할 수 있기를. '지금' 혼자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어떤 그리운 장면에 닿지 못해도, 내내 그리는 것처럼.
영화를 보고 낯선 이국의 겨울로 걸어 나왔을 때 나에겐 슬픔이 붙어 있었다. 그 슬픔을 가장 소중한 이와 나누고 싶었다. 가장 소중한 영화를 만났을 때 그 영화를 같이 봐야 할 가장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영화는 짙은 공감을 불러일으켰지만, 그 소중함을 나눌 소중한 얼굴이 그때는 없었다. 문득 떠오르는 그리움이 있었겠지만 다치지 않기 위해 덮어두었다.
나는 여기에 있지만, 그는 여기에 없다.
그런 '오늘' 나는 이렇게 기록하지 않으면 금세 사라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 장면을, 다 사라지고 남은 건 그저 밤 10시가 지난 이 '밤'에, 접힌 책의 페이지에 다시 눈길을 돌려 본다. 그러면... 이 알 수 없이 외로운 어떤 공허한 마음이 조금은 사라질 것만 같아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렇게 아무 말을 시전해도 괜찮겠지 싶다. '당신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라고 말해준다면 정말 기쁠 것 같은, 상상 속 그리운 목소리에 의지한 채로.
#캔맥주_한 캔에_책_한 권_뚝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