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븐 Sep 18. 2019

그리움의 장소가 이끄는 대로, 갈 수만 있다면

그 여름, 그 섬에서  

모험을 할 때는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게 되고, 들어야 할 이야기를 듣게 된다는 걸 믿으세요. 

정말로 중요한 것들에 대해선 계획을 세울 수 없어요. 


- 그 여름, 그 섬에서 - 





아픈 상처를 겪었던 사람들에겐, 그리움의 장소가 더 선명하게 생각 나는 법일 지도 모른다. 

가령 나에겐 미국의 곳곳이 그랬던 것처럼. 7년 전 샌프란시스코에서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롬바르트 거리를 마냥 왔다 갔다 오고 걸었던 햇볕 쨍쨍한 10월의 날들, 피셔맨스 워프에서 늘어져있는 바다 물개들을 그저 하염없이 쳐다보며 약간의 부러움을 먹었던 때, 골든 게이트 브리지를 건너와 부디 베이커리에서 사 먹었던 크랩 샌드위치의 환상적인 맛에 흠뻑 취했던 시간. 



5년 전, '나의 필라델피아'는 또 어땠었나. 이곳으로부터 약 11,000km의 '도주'를 했었던 그 시간 말이다. 

아픈 기억을 흘려보내려는 듯 급으로 급하게 떠나버리고 말았던 그 해, 나는 벤저민 프랭클린 기념관 앞에 서서 세상이 멈춰버렸으면 싶다고 잠시 생각했던 추운 겨울 거리를 여전히 기억한다.  펜실베이니아 교내에 있었던 아델의 노래가 조용히 흘러나왔던 스타벅스 안에서 잠자코 적어내렸던 몇 통의 수취인 불명의 편지들마저도. 여전히. 아 여전히도... 나는 그 겨울, 그곳이 참 좋았고 여전히 그립다. 



그 여름, 그 섬에서, 다이애나 마컴, 흐름출판, 2019.08.26. p.384 



저자도 그랬을까 싶었다. 에세이가 이렇게 평화롭게 '읽힐' 수도 있구나 싶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노라고. 어쩐 지루함과 따가움과 옅은 아픔을 애써 감추듯 살아가는 듯한 '기자' 출신 작가의 '아조레스' 섬, 그곳의 사람들, 그곳에서의 기억들을 마냥 그리워하는 마음을 내내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왜 그리워했는지도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인생이 생각한 대로 흐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아프게 깨닫는 그 시간들은, 반대로 인생에서 최고로 괜찮았던, 사랑스러웠던, 여전히 사랑하고만 싶은 '기억'과 '그리움' 그런 장소, 사람, 시간들에... 우리들은 의지하고 싶은 걸 테다. 난 그랬는데... 작가는 어땠을까.. 




과거에 정말로 굉장히 힘든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깟 사소한 회사 일 따위로 소파 위에 널브러질 게 아니라 그냥 대수롭지 않게 훌훌 털고 넘어갈 수 있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인생은 그런 식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퇴직 위로금을 받은 다음 날, 나는 아조레스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샀다. 

벼랑 끝에 몰려도 죽으란 법은 없다는 자연의 섭리를 진작 알고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 추웠던 눈이 많이 내렸던 날, 그래도 별은 선명하게 보였던 그 해 그 겨울의 미국을... 나는 가끔 그린다. 여전히.



여행에 이유라는 게 딱히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굳이 어떤 이유들을 붙여보자면 어쩌면  각자의 '그리움' 때문은 아닐까 싶다. '나'의 이야기를 조금 더 정제하고 싶을 때, 혹은 도망치고 싶을 때. 떠났을 때 다시 쓰이는 어떤 이야기를 다시 '그리워' 하는 '나'를 발견할 때... 보통 내가 떠나고 싶은 순간은 그러했는데. 어쩌면 섬으로 다시금 떠나기로 결심했던 작가도 그러셨을지 모른다며, 읽는 내내 그녀가 섬에서 느꼈던 정취, 풍경, 심지어는 바다 냄새마저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정말로. 




누구나 바라는 걸 바라겠죠. 자기들 이야기를 알아줄 사람을 바랄 거예요. 

아, 그리고, 그 이야기라는 게 당신 이야기의 일부가 될지도 모르죠. 

그는 내가 놓친 걸 콕 집어줬다. 내 이야기라니. 


모든 멋진 순간이 마치 영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죄다 생생히 기억난다는 사실이 참 놀랍다. 

그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질 때면 나는 어김없이 관람객이 된다. 그러나 그렇게 돌아본 기억이 내 발목을 움켜잡고 시공간을 뛰어넘어 나를 그 섬으로 데리고 가, 어느새 내가 바다 냄새를 맡고 바닷바람을 느끼게 될 때면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이내 후회하고 만다. 




살면서 사람 사이 어떤 관계들을 맺다 보면 때때로 어떤 '애잔함'을 느끼곤 한다. 

작가에겐 아조레스 섬에서 만났던 이민자들, 친구가 된 사람들, 심지어는 '사랑'을 느끼고 싶었던 그녀의 '상남자 작가' 마저도.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그리운 인물들이 있기에, 더욱 어떤 장소는 '그리움' 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픔이 더해가는 어떤 순간이면, 그 장소와 그 인물들이 결국 그리워지기 마련이기에. 그렇게 잠깐 동안은 정착하고 싶어 지기도 하기에. 



작가에겐 여름의 그 섬에, 나에겐 동부에서의 그 눈발 흩날리던 겨울이... 모두 '그리움'의 장소이겠다.




그리하여 만약 그리운 장소가 이끄는 대로 떠날 수만 있다면.

떠나는 게 좋겠다... 사실 '떠날 수 있을 때 떠나는 환경' 이 주어진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행복이자 행운이고, 또한 감사 그 자체이지 않을까. 때때로 그런 감사함을 만들고 싶어도, 아이를 키우는 '나'가 되고 나서부터는 이젠 떠나고 싶어도 쉽게 그러지 못하는 형편임을 너무나 잘 알기에. 다만 어떤 그리움의 장소가 나로 하여금 종종 나를 두드릴 때면, 갈 수 없는 애잔함 대신, 다만 스스로의 기억으로부터 농밀한 어떤 고마운 장면들을 떠올려내곤 한다. 아픈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나'와 마주할 때면,  더욱 선명하고도 진하게... 천천히 그리워한다... 




아조레스에 다녀온 지 6년이 흘렀다. 그러나 어딜 가든 늘 테르 세이라 섬이 생각났다. 

가끔은 한밤중에 아조레스의 짭조름한 공기를 타고 오는, 꿀처럼 달콤한 꽃향기가 생각나 잠에서 깨곤 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별이 가득 수 놓인 밤하늘이 생각날 때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고개를 뒤로 넘기고 머릿속에 그 장면을 천천히 그리고 싶어 졌다. 




그 겨울의 미국, 그 곳곳의 장소들은 여전히 나에겐 충분한 완벽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완전한 아름다움과 합일이 되고 했던 그 거리, 눈발이 휘날리던 바깥 풍경을 카페 안에서 바라보며 편지를 써 내렸던 그 장면 속의 '나'는.... 어이가 없는 어떤 상상을 했었다. 참 행복했고 기뻤었는데... 이루어지지 않은 상상인 줄 알면서도 그냥 막연히 좋았던 그 마음, 그 느낌을.... 흐르는 그 노래를 시간이 지나 우연이라도 듣게 되는 날이면, 마음이 그렇게 저리듯 좋을 수가 없는 거다. 작가에겐 아조레스의 모든 시간이 그러하였듯이, 나로 하여금 미국의 시간이 그러했듯이. 




삶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는 늘 순간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아름답고 완전하게 만드는 건 우리가 다음에 무엇을 할지 상상하는 일이다. 




밤공기가 참 좋은 요즘은 하늘을 자주 보려 한다. 특히 될 수 있으면 밤하늘을. 별은 어두울 때 더 빛이 나는 법이니까.



문득 이 글을 쓰는 지금,  유펜 안 스타벅스에서 흘러나왔던 그 노래를 들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결국 플레이리스트를 바꿔버리고 만다. (아뿔싸, 이 밤늦은 시간에 이 노래는 위험하지만...) 그 여름의 아조레스, 그 섬에서 작가는 어떤 노래를 들으며 그녀의 낯설고도 가까운 자기 자신을 찾으려 했을까를 잠시 궁금해하며 나는 이 가사를 지금. 중얼거려본다. 아울러 또 생각했다. 그는... 내가 이 노래를 왜 좋아하는지, 알고 있을까. 아니, 이제라도 알고 싶기는 할까라는 어리석은 마음을 품어본 채로. 




나의 오랜 친구... 왜 그리 수줍어하나요 

감정을 숨기고 어둠 속에 숨는다면, 그건 당신이 아니죠

내가 갑자기 불청객 마냥 나타나는 건 원치 않지만 

난... 멀리할 수도 없고, 그러려고 (나와) 싸울 수도 없습니다. 

전.. 바랐죠. 당신이 내 얼굴을 보고 나에게 알려주었으면 하고. 

아직. 끝이. 아니라는 걸. 

It. isn't over... 




밤하늘은 여전하겠다. 시간이 흘러도... 참 멋질 것 같아.. 그곳은 여전히도.



당신의 그 섬도, 그만큼 아름다웠겠죠. 그래서 그리웠겠죠.



#someone_like_you   

#가벼운_서평을_쓰고자_했지만_결국_또_이렇게_되어버리고 만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 달의 한 번, 너와 만나는 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