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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Feb 11. 2020

여성은 자신을 돌봐야 한다. 최소한 식탁에서만큼은

정치적인 식탁 

먹거리를 기르고, 만들고, 먹고, 치우는 모든 문제가 정치적이다. 

밥상 뒤엎는 사람, 밥숟가락을 먼저 들 수 있는 사람, 식사 중에도 계속 움직이며 시중드는 사람

직사각형 식탁의 가장 '윗자리'에 앉는 사람, 준비된 음식을 앞에 두고 '설교' 하는 사람

제사상의 도리를 입으로만 따지는 사람, 성별에 따라먹는 입과 노동하는 손의 역할을 구별하기 등

식탁에는 권력이 오간다. 


- 정치적인 식탁 - 





먹기. 

이 '먹다'라는 동사가 때로는 정말 음식을 '먹다' 로만 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간혹 하게 된다. 그러나 어디 언어가 그러한가. 남녀 간 성관계를 지칭하는 비속어로 흔히 '먹다'라는 동사를 쓴다는 걸 나는 대학에 가서야 나중에 알게 되었다. '여성' 은 '음식' 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니 충분히 여전히 '먹는 대상물' 이 되는 범주 안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음식'의 대상물이 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한때 '아웃사이더'였다. 

여고시절을 거쳐 '여대'가 아닌 '그냥 대학교'라는 곳에 가면서 첫 MT 때 인문학부 내 선배들이 밤에 주고받는 대화를 얼핏 들으면서 적잖은 충격으로 20대를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 이후, 내 입은 '오빠' 소리 대신 '선배' 소리를 달고 사는 '이상한 여자 후배'가 되었고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약간의 '아웃사이더'로 (한편으로는 부디 아웃라이어 성향이기를 바랄 뿐) 아르바이트하고 공부하면서 '연하' 남자 친구들'만' 만났다. 



이상하게 '오빠' 소리는 그렇게도 하기가 싫더라. 

친오빠도 아니면서 왜 '오빠' 여야 하는가 싶었기에. 여전히 그런 생각이기에 '오빠'라는 소리는 뭐랄까 거북하다. 이런 '나' 여서인지 '정치적인 식탁' 은 그야말로 무릎을 탁 치면서 할 말을 긴히 쏟아내 뱉게 만들고 마는 책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 왜 연하일까 싶었는데 최소한 그들은 나를 '여자' 이전에 '인간'으로 대해주더라. 그냥.. 그랬던 것 같다) 



정치적인 식탁, 이라영, 동녘, 2019.09.20.



강간 약물을 여성에게 먹이며 남성들은 흔히 말한다. '따먹다'라는 말을. 

'먹는 여자'는 어떤가. 미디어에서 한때 흔히 볼 수 있었던 '먹는 젊고 아름답고 날씬한 여성' 은 이미 공식적인 '상품'으로 '간접적인 포르노적 미디어 소비' 물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결국 먹히거나 보이기 위해 여성은 '먹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세상이 그렇다는 걸... 나는 모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 말이 없어지곤 한다. 그런 행위들, 그런 단어들, 일상 속의 어떤 장면들을 목격하게 되고 마노라면. 





여자와 관계 맺을 줄 모르기 때문에 여자가 자발적으로 가만히 있지 않으면 강제적으로 '가만히' 있는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 각종 약물을 개발한다. 데이트 강간 약물은 미국에서도 캠퍼스 강간의 주요한 한 축이다. 


수십 년 전 홍준표 후보와 하숙집 친구들의 행태는 정확히 이 경우에 해당한다.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 대마초도 합법화되지 않은 나라에서 생명에 지장을 줄 수도 있는 약물을 여자에게 먹이는 '놀이'에는 어쩜 이리도 무감각할까. 



여성작가들의 시와 소설은 그래서 이상한 끌림이 있는 걸지 모른다. 대상의 객관화, 드러나지 않는 불편한 것들의 드러남...




책을 읽는 '남성 독자' 분들은 불편해하실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만큼 여성이, 여성만이 느끼는 불편한 것들이 속속들이 시원시원한 문장으로 책 속에서 계속해서 뿜어져 있었기에. 한편으로는 '여성 독자' 들은 어떻게 읽으셨을지 궁금하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번 정도 해보신 적이 있을까 싶다. 여성 노동의 묘하게 불합리한 현실, 여전히 고루한 시선들과 가부장적 속마음들, 겉으로는 여권 신장을 주장하면서도 결국 이해관계로 엮여서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야 한다면 흔히 타고난 젠더 권력으로 '어쩔 수 없었다'면서 행해지는 은연중의 사내 성 불평등한 문화들, 관리자로 승진시키지 않고 권력이 없는 영역에 처박아놓는 남성 상사들과 고위직들의 '당연' 하다는 처사들. 어쩌면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슬프지만 인정해야 하는 부분도 있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왜 그래야만 하는가 싶은 생각에 괜히 책 페이지를 넘기면서 '울컥' 해질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으로 식당은 여성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미국의 경우, 초기 여성 운동 당시 여성들은 '혼자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할 권리'를 얻기 위해서도 싸워야 했다. 남성 보호자를 동반하지 않고 여성이 '밖에서 밥을 먹기'라는 어려웠다. 여자가 식당에서 밥을 먹는 행동은 정숙하지 않은 태도였다. 여성들은 주로 집에서 집으로 방문하며 차를 마시거나, 가족을 동반한 저녁 초대에 참석하는 정도였다. 여성이 남자 없이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소문의 대상' 이 된다. 수군수군. 




소위 '얼평, 몸평' 은 여성들에게 조금 더 가혹한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 

365일 다이어트는 남성보다는 여성 쪽에 가까운 단어일지도 모르니까. 나도 한때 그랬었다. 지금이야 살이 저절로 빠지는 기이한(?) 현상마저 겪게 되었지만 (둥이들 키우다 보니 그렇게 살게 되었다)  살이 조금만이라도 찌면 그것은 건강함과는 상관없이 그저 '보이는 미의 기준'에 대해 한때 타인의 시선을 여간 신경 써야 했었다. 70kg가 육박한 가임기 시절에 이 살들이 과연 다 복귀될 수 있을까 하는 어떤 노파심마저도, 결국 여성 쪽에 조금 더 철저하게 지켜져야 하는 일종의 암묵적인 '몸무게'가 있을 테니. 뷰티 사업의 대부분의 1등 소비 공로자들은 다름 아닌 '여성'이지만 한편으로 그 여성이 여성 자체를 어떤 일정한 누군가들의 사회적 기준과 규범에 '껴 맞춰서' 생활이 돌아가는 이상한 모순의 순환은 계속되는 듯싶다. 





사람을 만나면 일단 외모에 대해 언급하는 태도가 일종의 '인사' 나 다름없다. '살쪘네, 살 빠졌다' 혹은 나 살쪘지라고 먼저 묻기도 한다. 많은 여성들이 음식을 앞에 두고 '살 빼야 하는데'라는 말을 습관처럼 뱉는다. 


적지 않은 여성들이 먹기와 살 빼기 사이에서 불필요한 죄책감을 강요받는다. 반복적으로 '살 빼야 하는데'라고 말하며 숟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는 행동은 '먹기'에 대한 죄책감 속에서 일종의 고해성사나 다름없다. 





레드 립에 환장한 사람들은 여전히 주변에 가득.. 그것을 적절히 '이용' 하는 것도 나름의 전략.... 일지도.....; 세상은 요지경




'엄마'가 되어 보니 이제는 그 '엄마'의 존재에서도 여러 생각들이 하루에도 수십 번 튀어나오곤 한다. 

나의 '친정 엄마'와 '할머니'를 돌아보게 되고 막상 양육 과정의 이 시절을 통과하면서 숱한 '감정' 들과 '현실' 들과 대면하노라면, 나는 적잖은 좌절과 분노와 고통에 휩싸이고 만다. 왜 한때 엄마가 밥상에서 남은 음식을 아깝게 드시지 않고 모조리 다 버리셨는지 이제는 알 것 같으며, 왜 한편으로 여전히 양가 '아버지'의 '행동' 들에서 적잖은 슬픔과 어쩔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도 침묵하는 여성이어야 화평을 유지할 수 있기에 되도록 분노 게이지도 '마음 챙김'으로 단련시켜야 살아갈 수 있는 엄마와 나의 삶인지 마저도... 




가부장제란 어머니의 밥으로 아버지의 법을 굴러가게 하는 제도다. 그렇게 밥만 남기고 사라지는 어머니들의 육신이 쌓은 침묵의 무덤이  식구(밥 먹는 입)의 안식을 받쳐 들고 있다.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아이가 남긴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질문이 엄마에게만 도착하고 있으며, 아이가 남긴 밥을 먹어야 '보통 엄마'라고 규정하는 '문화'가 여성을 검열하게 만든다. 나는 내가 남긴 밥을 엄마가 먹지 않았음을 알게 되어 좋았다. 엄마한테 덜 빚진 기분이다. 


날마다 내가 쏟아내는 오물을 처리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엄마 뱃속에 들어가는 음식마저 내가 뒤섞어놓은 잡탕일 필요는 없고, 내가 남긴 밥을 엄마가 꼭 먹어야 모성을 인증하는 것은 아니니까. 엄마 밥상의 존엄을 빼앗으며 자식에 대한 사랑을 요구할 필요도 없다. 엄마가 무슨 잔반 처리기인가. 




여성은 결국 끊임없이 타인을 '돌보는' 존재다. 

반면에 남성은 '돌봄 받는' 존재라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여전히 남겨져 있는 듯싶다. 배우자는 알까? 사계절 우리 집의 이불 관리와 옷장 관리, 그릇 정리와 냉장고 정리를 '하는 아내'가 있기에 당신이 소위 그 '바깥일'이라는 것을 잘할 수 있는 것인지를. 한편으로 인정받으려 하는 가사 노동은 아니지만 여전히 양가 '아버지'의 위치에 있는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떠올리자면..... 



가족이라 해도 적잖은 눈살 찌푸림의 행위들은 여전히 잔존한다. 

그것조차 '사랑'이라는 이상한 도구로 이해하고 해석하려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냉정하게 생각하자면 나이를 먹을수록 그 남성들을 지켜주는 대상은 여성이라는 것을, 그들은 정말 알기나 알까?  그를 둘러싼 '여성들의 돌봄에 어느덧 나이가 들면서부터 적잖은 의지를 해야 하면서도, 뭐가 그리 잘나셨는지 고마워할 줄 모르는 '남편' 들이 여전히 세상에 버젓한 현실임을. 그러면서도 '여성을 보호' 한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밥을 스스로 해 먹지 못하는 그들은 알 턱이 아직 없지 싶다. 알아도 겸연쩍어서 모른 척할 뿐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식구의 의미란.




책을 다 덮고 어떤 생각이 앞선다. 최소한 '식탁' 에서만큼은 공정하게, '감사' 할 줄 알자고. 

밥을 차리든 차리지 않든, 설거지를 하든 하지 않든, 제사 음식을 만들든 그냥 떠받쳐주는 식탁을 가만히 먹고 앉아서 즐기기만 하든, 그 모든 준비 과정을 거쳐 먹는 행위와 먹고 난 이후의 시간들 속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해 '늘 그래 왔으니까'라는 프레임에서 조금은 벗어 나와서 한편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여성'의 숫자가 조금 더 많아지기를. 절대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엄마'가 되고 난 이후의 여성들에게는. 자신을 감춘 채 누군가를 돌보는 행위가 이제는 주 업무가 되어 버린 그녀들에게는 자신을 돌본다는 것이 물리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쉽지 않기에. 



그렇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먹고살기에만 매몰된, 남들 챙기느라 자신을 다 소비해버리기 전에 

챙겨야 한다... 최소한 식탁에서만큼은. 자신을 위한 밥상을, 그 시간과 공간을 부디 허락하기를... 이 말은 어쩌면 내가 스스로 내게 건네는 요즘의 위로이자 어떤 암묵적인 다짐일지도 모를 테지만. 





덧, 다음 책들을 추가로 더 읽어볼 작정이다. 일단 재밌어서... 자꾸 끌린다.





#엄마_고마워요_당신의_식탁덕분에_자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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