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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Feb 19. 2020

조금씩 어긋나도

퇴사 D-10일 

그냥 시간에게 널 맡겨봐. 그리고 너 자신을 들여다봐. 

약간은 구경하는 기분으로 말이야. 적어도 시간은 우리에게 늘 정직한 친구니까. 


- 사랑 후에 오는 것들 - 





- 아이 키우며 일 병행하는 데 배려... 많이 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희망 퇴직서에 사인을 했다. 

팀장에게 건넨 마지막 문장은 고맙다는 말이었다. 앞 서 사측의 '사업화 축소로 인한 인원 감축'이라는 변명을 조금 들었고, 거기에 어떤 반문을 달진 않았고, 다만 이로 인한 어떤 행정처리가 남았는지를 물었다. 그러고 나서 한 말... 고맙다라니. 어떤 것에 고맙길래 나는 선뜻 그 문장을 내보냈을까.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했고 그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회사에 최적화된 인간이었음을 느꼈다. 

슬프게도. 직장이라는 일터에 '충성' 하지 않는 사람이 되자고 생각했지만 꽉 찬 12년을 '일'만 했던 나는 어느덧 나도 모르게 충성하고 있었다는 걸 잠시 느꼈다. 스스로는 일터를 '좋아한다'라고 나름 여겼지만 좋아함과 충성함은 조금 의미가 틀리다. 여기서 말하는 '충성'이라 함은 회사의 입장에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려 하는 나라는 것. 그게 끝까지 나였다는 것을 잠시 느끼자마자 알 수 없는 묘한 슬픔이 밀려왔다.



나를 많이 걱정해주는 동료 두 명과 점심을 먹었다. 

그중 한 선배님은 이런저런 내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한숨을 쉬시며 말을 건네주셨다, 회사가 급히 사람을 아무 사유 없이 자르는 이유는 그만큼 이유 없이 자르고 난 이후의 공백과 향후의 운영방침에 문제가 있어도 다 그건 회사의 몫이지 나가는 사람이 애써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권고 퇴사받는 비자발적 퇴사의 입장에서 인수인계를 걱정할 정도로 그렇게 끝까지 사측 편에서 잘할 필요 없고 남은 일 생각 사실 안 해도 된다는 것을. 급히 내보내면서 책임은 책임대로 사측이 아닌 업무를 개인의 책임으로 지우는 건 아니라는 것, 그러니 나는 인수인계를 사실 '안' 해도 괜찮고 오히려 이제는 개인의 건설적인 것들을 해 나가라는 것, 일단 쉬라는 것을....




 퇴근을 하고 육아 퇴근까지 끝내면 비로소 쉬는 것. 그 쉬는 시간이 더 값진 건 '출근' 을 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같이 밥을 먹어준 고마운 동료 두 명에게 점심을 샀다. 

그들의 이야기를 웃으며 담담히 듣고 있으면서도 사실 마음속으론 조금 울고 있었지만 겉으론 웃으면서 나는 그에게 말했다. 



- 제가 작년에 급히 나가신 분께 인수인계받으면서 잘 못 받아서 많이 힘들었어요. 그렇게 다시 상황 반복하고 싶진 않은가 봐요. 당한(?) 적이 있다고 보복하듯 저도 당해봐라 하는 건 제 성격이 못 되나 봐요. 그냥 힘들지 않은 선에서 마지막 마무리 잘하고 나가려고요. 솔직히 하기 싫어도, 나 몰라라 할 수도 있겠지만, 이게 저인걸 어쩌겠어요. 고마워요..  



차를 마시고 나는 잠시 회사를 떠나지 않고 공용 회의실에 숨어서 노트북을 켰다. 

아웃룩의 메일들을 바라보며 해야 하는 최선과 최소의 업무 메일에 회신을 보내고 노트북을 덮었다. 회사주소로 도착된 물품들을 우편함에서 찾았다. 모두 거의 책들이었다. 도착지 주소를 옮겨야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꽤 귀찮은 자잘하고 소소한 일들이 앞으로 수두룩 남아 있을 게 예상되었다.



해야 할 것들을 적어보았다. 오늘의 업무 일기 대신 이제는 오늘의 '리스트' 를 더 상세히 적어보기로..했다. 



출근할 날이 며칠 되지 않아 왔을 때 미리 인사하고 싶었던 동료들을 찾아갔다.

몇 명에게 넌지시 인사를 건네고 놀라는 그들에게 나중에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긴 채 뒤를 돌아 나오는데 복도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이직을 하여 자발적 퇴사를 하는, 같은 해 입사하고 당장 내일 퇴사를 앞둔 그는 나와 한때 프로젝트를 같이 했었던 동료였고, PM으로서 일 처리가 꼼꼼하고 외국어도 유창한,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것처럼 '보였던' 한 때 내가 선망했던 업무 선배님이셨다. 그의 퇴사 소식은 진작에 건너 들었는데 막상 직접 듣고 대면함은 처음이었다. '마지막' 이 각자 비슷했기에 자연스럽게 그 마지막을 빌미로 잠시 차를 마시게 되었다. 



- 퇴사 축하해요. 위너네 위너 

- 떠밀리듯 나가는데 뭐가 위너예요 

- 나는 나가면서 돈 한 푼 못 받는데, 희망퇴직이니 위로금 받고 실업 급여도 받으니 잘 된 거지 

- 돈... 뭐 그렇긴 하죠. 단타적으로는. 근데 제가 단타 별로 안 좋아해서. 

- 좋게 생각해요. 진짜 좋아하는 거 이제 할 수 있는 기회고. 내 눈엔 앞으로 더 잘 될 거 같은데

- 팀장님은..... 어디로 가세요 

- 아직 못 결정했어요. 

- 그래도 이직도 수월히 하시고 팀장님도 대단하세요. 같이 한번 더 일 해보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 나 일 잘 못해. 그래서 나가는 거지. 맘 떠나서. 

프로젝트 매니징 하셨을 때, 같이 일 하면서... 그 프로젝트, 제 최고의 프로젝트였습니다. 많이 배웠어요. 가장 열심히 즐겁게 일 했고..팀장님, 그 때 일 잘하셨습니다. 감사했어요.. 

- 그랬어요? 고맙네. 그렇게 생각해주고. 

- 네.... 그랬어요. 그때 정말 열심히 일 했거든요.. 많이 배웠고, 많이 힘들기도 했고.

- 같은 해 입사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떠나니 신기하네. 

- 그러게나 말입니다. 서로의 마지막에... 이렇게 살구 실론티를 마시고 있을 줄이야. 인생 참 모르는 거죠. 

- 잘 지내요. 힘 내고. 잘 됐고 잘 될거니까. 

- 여전하십니다. 말투는. 네. 잘 되야죠...조금씩 어긋나도... 잘 되겠습니다. 

- 말투는 혜원도 여전하네. 




그와 차를 마시며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던 해맑은 어린 내가 떠올랐다. 

대화를 마치며 어른이 한참 되어 버린 나로 다시 돌아오면서 어떤 헤어짐과 마지막에 대한 생각을 했다. 거자필반 회자정리라고 했던가. 실수나 후회로 점철되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 아는 어른이 된 우리는 서로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봄 꽃 같았던 서른의 나를 떠올렸다. 대화하는 내내 나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서...한참을 마음을 쓸어야했다. 




언젠가는 헤어지고 누구에게나 마지막이 찾아오고 이별을 하며 사는 우리는

그래서 더더욱 서로에게 더 고마워하고 친절하고 다정하게... 마음껏 '그 순간'을 사랑하면서 살아야겠노라고, 나는 10년이 지나서야 조금 떠 진하게 깨닫게 되었다. 희망 퇴직서에 사인하던 날. 입사일을 적으며, 공식적으로 인쇄된 2월 28일이라는 마지막 날짜를 떠올리며.



스스로에게도 다정한 내가 되어야겠다고, 좀 더 있는 힘껏 사랑하며 살아야겠다고 

나는 생각했다...'마지막'과 '시작' 들 사이에서. 

그렇게 흘러가보겠다고....



흐름에 맡겨본다. 흐르는 강물처럼... 



#하루_지나_올리는_퇴사_D-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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