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D-2
한쪽의 수고로 한쪽이 안락을 누리지 않아야 좋은 관계다.
-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
수요일의 출근길, 이제 서서히 봄이 오나 싶었다.
쌍둥이들을 웨건에 싣고 어린이집으로 향하는 길이 이상하게도 무겁지 않았다. '마지막 출근길'이라는 수식어가 자꾸만 이번 주 내내 따라붙어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다른 때 같으면 40kg가 넘는 유모차나 웨건에 50kg를 간신히 넘는 내 몸을 역으로 지탱하며 밀어헤치며 헉헉거리기 일쑤였겠지만. 어쩐지 오늘은 달랐다.
회사에 도착해 미리 인쇄해 둔 퇴직원 서류를 노트북 가방에서 꺼냈다.
오전 업무 시작과 동시에 한 사람 한 사람 퇴직원에 확인 사인을 받아야 할 각 부서의 '퇴사 전담 사인 창구' 직원들에게 연락을 하고 시간 확인을 했다. 어려운 건 없었지만 그냥 나갈 수도 없는 게 바로 '퇴사' 절차라는 걸 처음 알았다.
하긴 퇴사는 처음이니까. 마치 엄마로 사는 삶이 처음인 것처럼 서투른 건 매 마찬가지인가 싶었다.
독서모임 동료들과 잠시 차를 마시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퇴직원에 사인을 받으러 몇 군데 돌아다니는 동안, 나는 시종일관 겉으로 씩씩하게 웃고 다녔다. 마지막 인수인계까지도 끝까지 웃으며 해내려 했다. 복도에서 만난 두 사람을 만나기 전 까지는...
결국 영문 모를 '두 사람' 과의 마주침 덕분에 기어코 화장실에서 눈물을 쏟고 말았다.
한 사람은 오래 회사를 다니셨다던 어떤 50대 부장님 급의 책임님이셨다. 그분의 책상엔 늘 '책' 이 있었다는 게 문득 기억났다. 역사나 철학 책이 놓인 그의 책상이 떠올랐고 동시에 20년 이상을 근속하셨다던 그분의 존재가 사뭇 대단하게 느껴지다 못해 안쓰러웠고 그만큼의 존경이 동시에 밀려왔다. 직장인으로서는 가늘고도 얕게 '위너' 임에는 분명하셨지만 그 자리를 지키기까지 오랫동안 얼마나 힘드셨을까 싶은 괜한 오지랖에...
무엇보다 눈을 마주쳤을 때, 그분은 피하지 않아 주셨다.
다른 동료들은 권고 퇴사 통보를 받은 이후 뭐랄까 데면데면한 채 한 때 같은 팀 동료였지만 이젠 정말로 '남'인 마냥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는데... 그분은 내 인사를 받아 주셨다. '아... 그래요.. 들었어요. 잘 가요'라는 그 목소리 덕분에. 기어코 밀려오는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눈물이 그대로 눈가에 고이기 시작했다.
복도를 다시 지나가는 데 마지막으로 남자 화장실에서 나오는 한 여성분과 마주했다.
바로 우리 회사에서 내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최애 동료... 바로 탕비실 곳곳과 건물 각 층 여기저기를 이른 새벽부터 나와서 청소해주시는 탕비실의 여사님이셨다. 12년 전 신입사원 시절에도, 10년 전 엄마의 병시중을 위해 병원에서 회사까지 출퇴근을 오고 갔던 그 해도, 8년 전 첫 유산을 했을 때에도, 4년 전 복직하고 쌍둥이들을 키우며 회사를 다녔을 때도...
나의 우는 모습을 보고 다독여주신 유일한 나의 '동료', 바로 청소하는 여사님들이셨다.
그분들을 보면 이상하리만치 '친정엄마'가 떠올라서 나는 더 울 수밖에 없었다는 걸, 그분들은 아셨을까. 비록 같은 분이 아니라 해를 거듭하면 자주 바뀌던 계약직 청소노동자셨지만, 나는 한번 안면이 틘 여사님들께만은 늘 깍듯하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허리가 숙여지고 인사를 먼저 건넸을 뿐인데. 그 덕분에 어느새 여사님들 사이에서 나는 '인사 잘하는 아가씨'가 되어 있었다는 걸... 뒤늦게 이제야 알았다... 누군가에게 내가 '아가씨' 였다는 걸...
- 안녕하세요 여사님... 고맙습니다.
- 인사 잘하는 아가씨가 한동안 안 보여서 휴가 갔나 했어요. 우리끼리 막 얘기했다니까. 가끔 차도 사주는 그 싹싹한 아가씨 안 보인다고.
- 아... 여사님... 저 사실 아가씨 아니고 아들 쌍둥이 키우는 애 엄마입니다. 감사.. 해요..
- 어머. 애 엄마였어요?
- 사실.. 오늘 여사님 뵙는 마지막 날... 같아서 왔을 때 마지막으로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다행이에요.
- 아니 왜.... 회사 나가요 아가씨? 아니 쌍둥이 엄마..
- 네. 그렇게 됐어요. 여사님... 화장실... 늘 깨끗하게 청소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 아쉬워서 어떡해... 우리가 더 고맙지 뭐. 고맙다고 해 주는 사람 있어서 우리도 좋았는데. 잘 가요.
여사님은 모르실 거다. 내가 당신들에게 유난히 더 90도로 허리를 숙이고 싶었다는 것을.
왜냐하면... 그건 화장실 덕분이었다고. 내가 오래 회사를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나만의 '울 수 있는 방', 화장실의 존재 덕분이었고 그곳은 언제나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기에. 여사님들의 수고스러움 덕분에 이 회사의 '기본' 이 깨끗하게 유지될 수 있다는 걸, 언제나 보이지 않는 세심한 배려와 디테일함은 바로 그런 '기본'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당연히 회사에서 제일 인사를 받아야 마땅한 건 제일 밑바닥에서 일을 하시는 그녀들이라는 것을
나는 여사님께 말씀드리고 싶었다. 당신들의 고된 수고스러움 덕분에 일터가 잘 돌아가고 있다고. 고연봉의 직원들만이 '다'가 아니라고. 노동을 하고도 그만큼의 보수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저임금 시장에서도, 고연봉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투명하고 정직하게' 매 순간 고군분투하시는 당신들의 존재에 그만큼 감사하다고 존경한다고도...
퇴사 D-2일.
내일은 아이들과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서 틈틈이 회사 노트북 속 메일을 정리할 예정이다. 그리고 디데이가 다가올 테다. '잘 가요'라는 나를 외면하지 않은 두 사람의 따뜻한 말 덕분에, 탕비실 여사님의 '아가씨'라는 말씀 덕분에, 나는 어딘지 우스운 자신감이 잠시 서려서 웃고 만다.
아울러 약속하듯 그 '잘'이라는 단어를 지켜내도록. 나는 잘 이겨내려 한다.
회사가 주는 위로금은 이젠 무쓸모 한 인간으로 떠밀리듯 쫓겨나는 나로서는 그 어떤 '위로'를 건네지 못하는 게 사실이지만, 아마 어떤 사람들은 '좋겠네 돈 받고 나가서'라고 할 테다. 그럼 나는 마지막까지 어떤 관계 정리가 될 것 같기만 하다.
퇴사를 하면서 비로소 보이는 관계 정리가...
#여사님들_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