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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Feb 26. 2020

탕비실 여사님 덕분에 '아가씨'가 되던 날  

퇴사 D-2  

한쪽의 수고로 한쪽이 안락을 누리지 않아야 좋은 관계다. 


-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 





수요일의 출근길, 이제 서서히 봄이 오나 싶었다.

쌍둥이들을 웨건에 싣고 어린이집으로 향하는 길이 이상하게도 무겁지 않았다. '마지막 출근길'이라는 수식어가 자꾸만 이번 주 내내 따라붙어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다른 때 같으면 40kg가 넘는 유모차나 웨건에 50kg를 간신히 넘는 내 몸을 역으로 지탱하며 밀어헤치며 헉헉거리기 일쑤였겠지만. 어쩐지 오늘은 달랐다.  



회사에 도착해 미리 인쇄해 둔 퇴직원 서류를 노트북 가방에서 꺼냈다. 

오전 업무 시작과 동시에 한 사람 한 사람 퇴직원에 확인 사인을 받아야 할 각 부서의 '퇴사 전담 사인 창구' 직원들에게 연락을 하고 시간 확인을 했다. 어려운 건 없었지만 그냥 나갈 수도 없는 게 바로 '퇴사' 절차라는 걸 처음 알았다. 



하긴 퇴사는 처음이니까. 마치 엄마로 사는 삶이 처음인 것처럼 서투른 건 매 마찬가지인가 싶었다.

독서모임 동료들과 잠시 차를 마시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퇴직원에 사인을 받으러 몇 군데 돌아다니는 동안, 나는 시종일관 겉으로 씩씩하게 웃고 다녔다. 마지막 인수인계까지도 끝까지 웃으며 해내려 했다. 복도에서 만난 두 사람을 만나기 전 까지는...




결국 영문 모를 '두 사람' 과의 마주침 덕분에 기어코 화장실에서 눈물을 쏟고 말았다. 

한 사람은 오래 회사를 다니셨다던 어떤 50대 부장님 급의 책임님이셨다. 그분의 책상엔 늘 '책' 이 있었다는 게 문득 기억났다. 역사나 철학 책이 놓인 그의 책상이 떠올랐고 동시에 20년 이상을 근속하셨다던 그분의 존재가 사뭇 대단하게 느껴지다 못해 안쓰러웠고 그만큼의 존경이 동시에 밀려왔다. 직장인으로서는 가늘고도 얕게 '위너' 임에는 분명하셨지만 그 자리를 지키기까지 오랫동안 얼마나 힘드셨을까 싶은 괜한 오지랖에...



직장인, 정글에 비하면 안전한 울타리, 그러나 유지함에도 만만찮은 직업... 




무엇보다 눈을 마주쳤을 때, 그분은 피하지 않아 주셨다. 

다른 동료들은 권고 퇴사 통보를 받은 이후 뭐랄까 데면데면한 채 한 때 같은 팀 동료였지만 이젠 정말로 '남'인 마냥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는데... 그분은 내 인사를 받아 주셨다. '아... 그래요.. 들었어요. 잘 가요'라는 그 목소리 덕분에. 기어코 밀려오는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눈물이 그대로 눈가에 고이기 시작했다. 



복도를 다시 지나가는 데 마지막으로 남자 화장실에서 나오는 한 여성분과 마주했다. 

바로 우리 회사에서 내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최애 동료... 바로 탕비실 곳곳과 건물 각 층 여기저기를 이른 새벽부터 나와서 청소해주시는 탕비실의 여사님이셨다. 12년 전 신입사원 시절에도, 10년 전 엄마의 병시중을 위해 병원에서 회사까지 출퇴근을 오고 갔던 그 해도, 8년 전 첫 유산을 했을 때에도, 4년 전 복직하고 쌍둥이들을 키우며 회사를 다녔을 때도...



나의 우는 모습을 보고 다독여주신 유일한 나의 '동료',  바로 청소하는 여사님들이셨다.

그분들을 보면 이상하리만치 '친정엄마'가 떠올라서 나는 더 울 수밖에 없었다는 걸, 그분들은 아셨을까. 비록 같은 분이 아니라 해를 거듭하면 자주 바뀌던 계약직 청소노동자셨지만, 나는 한번 안면이 틘 여사님들께만은 늘 깍듯하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허리가 숙여지고 인사를 먼저 건넸을 뿐인데. 그 덕분에 어느새 여사님들 사이에서 나는 '인사 잘하는 아가씨'가 되어 있었다는 걸... 뒤늦게 이제야 알았다... 누군가에게 내가 '아가씨' 였다는 걸... 



- 안녕하세요 여사님... 고맙습니다. 

- 인사 잘하는 아가씨가 한동안 안 보여서 휴가 갔나 했어요. 우리끼리 막 얘기했다니까. 가끔 차도 사주는 그 싹싹한 아가씨 안 보인다고. 

- 아... 여사님... 저 사실 아가씨 아니고 아들 쌍둥이 키우는 애 엄마입니다. 감사.. 해요..

- 어머. 애 엄마였어요? 

- 사실.. 오늘 여사님 뵙는 마지막 날... 같아서 왔을 때 마지막으로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다행이에요. 

- 아니 왜.... 회사 나가요 아가씨? 아니 쌍둥이 엄마.. 

- 네. 그렇게 됐어요. 여사님... 화장실... 늘 깨끗하게 청소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 아쉬워서 어떡해... 우리가 더 고맙지 뭐. 고맙다고 해 주는 사람 있어서 우리도 좋았는데. 잘 가요.




아가씨로 봐 주셔서 덕분에 그 '아가씨'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고맙습니다...



여사님은 모르실 거다. 내가 당신들에게 유난히 더 90도로 허리를 숙이고 싶었다는 것을. 

왜냐하면... 그건 화장실 덕분이었다고. 내가 오래 회사를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나만의 '울 수 있는 방',  화장실의 존재 덕분이었고 그곳은 언제나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기에. 여사님들의 수고스러움 덕분에 이 회사의 '기본' 이 깨끗하게 유지될 수 있다는 걸, 언제나 보이지 않는 세심한 배려와 디테일함은 바로 그런 '기본'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당연히 회사에서 제일 인사를 받아야 마땅한 건 제일 밑바닥에서 일을 하시는 그녀들이라는 것을 

나는 여사님께 말씀드리고 싶었다. 당신들의 고된 수고스러움 덕분에 일터가 잘 돌아가고 있다고. 고연봉의 직원들만이 '다'가 아니라고. 노동을 하고도 그만큼의 보수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저임금 시장에서도, 고연봉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투명하고 정직하게' 매 순간 고군분투하시는 당신들의 존재에 그만큼 감사하다고 존경한다고도... 



퇴사 D-2일. 

내일은 아이들과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서 틈틈이 회사 노트북 속 메일을 정리할 예정이다. 그리고 디데이가 다가올 테다. '잘 가요'라는 나를 외면하지 않은 두 사람의 따뜻한 말 덕분에, 탕비실 여사님의 '아가씨'라는 말씀 덕분에, 나는 어딘지 우스운 자신감이 잠시 서려서 웃고 만다.  



아울러 약속하듯 그 '잘'이라는 단어를 지켜내도록. 나는 잘 이겨내려 한다. 

회사가 주는 위로금은 이젠 무쓸모 한 인간으로 떠밀리듯 쫓겨나는 나로서는 그 어떤 '위로'를 건네지 못하는 게 사실이지만, 아마 어떤 사람들은 '좋겠네 돈 받고 나가서'라고 할 테다. 그럼 나는 마지막까지 어떤 관계 정리가 될 것 같기만 하다. 



퇴사를 하면서 비로소 보이는 관계 정리가...



제겐 여사님들이 꽃 같으셨습니다. 아가씨보다 더 소녀같이 투명한 삶의 꽃.... 


#여사님들_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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