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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Mar 07. 2020

철들어 견디는 삶일지라도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이제는 아픔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매를 많이 맞아서 생긴 아픔이 아니었다. 

병원에서 유리 조각에 찔린 곳을 바늘로 꿰맬 때의 느낌도 아니었다. 

아픔이란 가슴 전체가 모두 아린, 그런 것이었다. 

아무에게도 비밀을 말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죽어야 하는 그런 것이었다. 


-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 





'제제'의 이야기는 몇십 년이 지나도 '눈물'을 남기고 만다. 

집에선 허구한 날 슬리퍼로 매를 맞기 일쑤인, 이 예민한 감수성의 순수한 영혼은 그럼에도 세상을 향한 호기심을 그 나이에 맞게 표출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장난을 멈추지 못한다. 그런 소년을 두고 '어른' 들은 때로 악마의 모습으로 둔갑한 어른이 되어 매질을 일삼으면서도 너무 당연하게 이 여섯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그래도 언젠가는 철들 날이 올 것'을 종용한다. 세상엔 그런 '제제들' 이 여전하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여전한 슬픔을 선사하고 만다.  




나는 모든 것을 집 밖에서 배웠다. 집에서는 나 혼자 눈치껏 행동해야 했기 때문에 실수하기 일쑤였고 그 때문에 걸핏하면 매를 맞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를 때리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사고뭉치라는 것을 알아챘는지 누구나 나를 볼 때마다 망나니라느니, 나쁜 놈이라느니, 억센 털 러시아 고양이 같은 놈이라느니 하며 욕을 해 댔다. 이런 것들은 이제 생각도 하기 싫다. 


p. 11, 12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오리지널 커버 에디션), J. M. 데 바스콘셀로스, 동녘, 2020.02.25.



온몸에 멍 꽃이 피기 일쑤인 어린아이들은, 그럼에도 '부모'를 걱정한다.

때로 악마들은 세상에 내려와 '어른'의 모습으로 누군가의 시간을 지배하기도 한다. 그 어른은 '부모'라는 이름으로, '나이를 더 먹은 자'의 이름으로 순수한 어린아이의 영혼들을 갉아먹기 일쑤다. 때론 학대로, 때론 방임으로, 때론 냉정한 무시라는 이름으로. 그러나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것들은 바로 그런 순수한 '아이' 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들을 걱정하고 안타까워한다는 사실이다. 




엄마가 몹시 불쌍해 보였다. 엄마는 태어나면서부터 일만 했다. 공장이 들어서던 여섯 살 때부터 일을 했다. 사람들이 엄마를 작업대 위에 올려놓으면 엄마는 쇠붙이를 닦고 훔쳐야만 했다. 너무 어려서 혼자 내려올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위에서 소변을 보았다. 학교에 다녀 본 적도 없고 읽는 법을 배운 적도 없었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난 너무 마음이 아파서 내가 커서 시인이 되고 만물박사가 되면 꼭 내 시를 읽어 드리겠다고 맹세했다. 


p.42




꽃의 맹세는 살아내려는 의지일까 



'제제'가 뽀르뚜가 아저씨를 유일한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건  단 한 명의 사람이었기 때문이겠다. 

자신에게 칭찬을 건네고 호의를 베풀며 따뜻한 진심을 느끼게 만들어 준 '단 한 사람'의 지지자 같은 사람이었기에... 제제 주변의 댁 내 사람들은 모두들 말로 때리고 손으로 때리고 슬리퍼로 때리기만 하는, 상처를 주기만 하고 제제로 하여금 터무니없는 '철듦'이라는 그 나이에 맞지 않는 것들만을 강요하는 이들이기에. 




모두들 그 애를 너무 때려요. 오늘 아주 풀이 죽어 있더라고요. 세 차례나 매를 대다니 너무 심하잖아요. 

하지만 녀석은 완전히 구제불능이야. 매를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고. 너는 한 번도 때린 적 없어?

웬만해선 안 때리려고 해요. 정말 몹쓸 짓을 하면 귀를 잡아당기는 정도예요.

아무튼 그 앤 아직 여섯 살도 안 됐잖아요. 장난이 좀 심하긴 해도 아직은 어린애라고요. 

p.174



'넌 아주 용감한 사내야. 꼬마야' 

난 아픈 가운데서도 웃어 보였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이제 포르투갈 사람이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p.180



살게 만드는 소박하지만 중요한 것들이 있다. 빛과 같은 것들.



세상의 '제제들'에게 어른들은 때로 철이 일찍 들기를 강요한다. 

사실 반성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던 건, 나 또한 양육의 세계로 진입하면서 마음속으로는 몇 번이고라도 아이들을 때리고 싶은 마음을 참아내기 일쑤인 그 감정선을 경험하고 말기 때문이다. 찢어지게 울어대는 아들 쌍둥이들의 거친 울음소리와 성화, 그치지 않는 떼씀의 연속은, 내면의 괴물적인 본성을 끄집어내고 말아서 주변의 물건들을 다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늘 선사한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대신 나를 자학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고 우울로 인해 내 마음을 갉아먹기를 선택한다. 그렇게라도 함으로 인해 나의 사랑들을 지켜낼 수만 있다면... 스스로 상처 받기를 허락하는 것이 때로는 '사랑을 주려고 하는 부모'의 마음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 복잡한 감정은 '돌봄'을 해본 이들이라면... 사랑으로 지켜내려는 부모라면 아실지도 모르겠다만. 슬픔을 겪지 않아야 하는 것이, 부모 선택권이 없이 태어난 '아이들'이라는 걸 나는 알기에... 아는 진짜 어른들은 함부로 아이들에게 매질을 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아이들은 죄가 없으니까. 있다면 그것은 모두 어른들 탓이다. 악마의 본성을 참아내지 못하는 어른 같지 않은 어른들의 탓. 




누나는 그 순간 그 자리에는 더 이상 아이들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두가 어른이었다. 그것도 아주 슬픈 어른. 

슬픔을 조각조각 맛보아야 하는 어른들뿐이었다. 

p. 72




하루가 여전히 어떤 때는 빨리 지나가기를 나는 눈을 감고 기다린다......



소중한 사랑의 존재가 상실되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의 세계도 금세 무너지게 된다. 

'제제'에게 '또르뚜가'라는 사랑도 그랬으리라. 자신을 유일하게 믿고 지지해 준, 따뜻한 말 한마디와 그로 인한 '사랑'을 깨닫게 해 준. 아니 어쩌면 살고 싶지 않은 시간 속에서 그래도 살고 싶다는 작은 '희망'을 선물해 준 그 사랑의 존재... 그런 이의 상실로 인한 제제는 맞는 것보다 그 사실 자체에 더 큰 슬픔을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이틀 동안 뽀르뚜가를 보러 갈 수가 없었다. 식구들은 나를 학교에도 보내 주지 않았다. 잔인한 매질로 엉망이 된 내 몰골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얼굴의 부기가 빠지고 터진 입술이 아물어야 내 생활이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말하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져 그저 동생과 함께 밍기뉴 곁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모든 것이 두려웠다. 아빠는 잔디라 누나에게 한 번만 더 그런 욕을 한다면 나를 가루로 만들어 놓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숨 쉬는 것조차 두려웠다. 내 라임오렌지나무 그늘 속에 있을 때가 그나마 맘이 가장 편했다. 


p.212-213




아픔과 고통의 연속이어도 시간은 쉼 없이 지나간다.

어느새 6살이 채 되지 않은 그 소년은 48세가 다 되어 가는 성인 남성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지난날을 추억하며 이 말을 건넨다. 애틋하게 아련한, 여전히 그 '단 한 사람' 일 수 있는 자신을 믿어준 유일한 사랑을 향한 깊은 그리움의 고백을... 




때로는 그리움 속에서 어린 시절이 계속되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언제라도 당신이 나타나셔서 제게 그림 딱지와 구슬을 주실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나의 사랑하는 뽀르뚜가, 제게 사랑을 가르쳐 주신 분은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구슬과 그림 딱지를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사랑 없는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제 안의 사랑에 만족하기도 하지만 누구 나와 마찬가지로 절망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 시절, 우리들만의 그 시절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먼 옛날 한 바보 왕자가 제단 앞에 엎드려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물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왜 아이들은 철이 들어야만 하나요?'


사랑하는 뿌르뚜가, 저는 너무 일찍 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영원히 안녕히. 


p.289-290




상실의 슬픔 끝에서 우리는 삶의 중요한 가치를 다시금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건 결국 '사랑'... 이 아닐까 싶고.




이 서평을 세 번의 리셋 끝에 '겨우' 한 편의 저장을 해 놓고 마는 토요일 주말 오전. 

아이들의 아침은 배부르게 시작했고 배우자는 일로 인한 외출을 시도한다. 식탁 위 노트북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둔 나는, 아이들의 아침 아이스크림 성화에 급기야 버튼 하나로 인해 연속적인 글 실수를 범하고 만다. 둘째 둥이는 급기야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온 거실을 찐득함으로 만들어 버리는 장난을 일삼는다. 나는 화를 내 버리고 말았고 그런 나를 바라보며 첫째 아이는 '엄마 괜찮아'를 말하기 일쑤다. 반복되는 일상... 그리고 더 반복되는 주말의 시간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한다. 



큰 '제제' 도 여전한 절망과 고통이 연속일지도 모를 것이라고. 

그럼에도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용기는 바로 자신이 받았던 '지난 사랑' 들을 생각하며 견디는 것이라고. 


이 삶은... 견뎌야만 하니까. 어떤 방법으로든. 

나는... 견디듯 그렇게 마음을 꾹꾹 눌러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떠올린다.... 

그렇게 하루의 오전이 지나가고 있다. 




#나같은_모자란_사람이_도대체_왜_쌍둥이_엄마가_되었단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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