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 보이는 것들을 찐 교훈으로 간직한 채 나는 씁쓸한 회상을 거듭하며 그 교훈을 오래 간직하고자 지금 이 글을 쓰려 노트북 위에 손을 올리고 깜빡이는 커서를 멍하니 바라보다 의식의 흐름대로 텍스트를 적어보고 있다.
만약 예전 회사의 '그녀'가 이 글을 본다면, '그'가 이 글을 본다면.
나에겐 한 때 '친구' 였던, 그러나 그들에게는 내가 결국 친구도 뭣도 아니었던. 오히려 없어지고 난 이후에 까대지나 않음 다행일지도 모를... 그들은 내가 무척이나 우스울 것이라는 걸 여전히 각오하고서라도. 한번 정도는 써 보고 싶었다. 내가 느꼈던 직장 생활의 참담한 교훈에 대해서. 조직 생활 12년 3개월을 끝으로 권고 퇴사하고 나니 비로소 알게 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착각' 하고 사느라 뼈 때리는 추억도 꽤 많이 만들어냈었기에 말이다. 누군가는 그런 우매함을 범하시지 않으시도록...
결론부터 말하자면 회사란 일을 하는 곳이다. '친구'를 찾는 곳이 아니라는 소리다.
나는 그걸 아주 나중에야, 10년이 지나서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 진짜 의미를. 사회 초년생 땐 그 말의 의미를 사실 몰랐다. 회사 동료들 속에서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일을 주고받으며 나와 소위 코드가 통하고 대화가 부드러운 '동료' 에게는 마음을 드러내도 될 것 같았다. 다시 말하자면 감정을 드러냈다는 소리다. 가감 없이. 그 뒷감당의 무서움도 모른 채... 감정을 드러낸다는 건 '사적'인 '개인' 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아뿔싸. 그걸 드러내면 안 됐었다.
혼자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산 건 나 때문이었다... 친구를 찾으려 했던 나 때문에...
결국 감정을 드러내고 말면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또 다른 '나' 들이 속속들이 파생된다.
설령 그것이 좋은 '나'의 모습으로 사내에 퍼지면 상관이야 없겠지만, 보통 인간 본성의 법칙 상, 우리는 누구를 '까대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잠재된 인간들이다. 까대는 건 쉽다. 키보드 워리어들이 강하게 자생할 수 있는 것도 그런 '본성' 때문이리라. 회사라고 다를까? 오히려 더 심하게 까일 수 있다. 어디에서? 바로 '뒤'에서. 내 앞이 아니라 내가 없는 그 '뒤'에서 말이다.
'친구'는 제2의 '나'라고 아리스토 텔레스 님은 말하셨단다.
제2의 나는 그럼 어디에서 찾는가? 결국 회사 밖에서 찾아야 한다. 회사는 일을 하는 곳이니까. 커리어 경력을 회사 안에서 물리적으로 쌓고 그 외 개인 경쟁력을 자기 계발로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가면서, 결국 제2의 나는 회사 '밖'에서 내가 쌓은 무기를 통해 찾아야 한다는 걸, 나는 회사에서 존버 하면서 쫓겨나기 직전에야 겨우 알게 되었다. '친구'는 결국 '밖'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친구가 일을 못해도 친구니까, 우리는 이해할 수 있겠다. 사정을 '봐줄' 수 있는 관계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일을 못하거나 설령 일을 잘해도 조금이라도 자신과 성향이 안 맞거나 트러블이 생길 수 있는 동료라고 판단될 경우에는 '가차 없이 까이기' 십상이다. 더군다나 '진짜 친구' 라면 함부로 친구의 맥락을 알지도 못한 채 서스름없이 까대지 않을 것이다. 뒤에서 욕을 하는 친구는 진짜 친구가 아니라 가짜 친구겠지...
눈 앞에서는 모른다. 자리를 떠나봐야 안다. 정말 좋은 사람들은 떠났을 때에도 남는다.
여하튼 회사는 일을 하는 곳인데 나는 회사에서 친구를 찾으려 했다. 사람을 그렇게 잘 믿었다.
사담을 해도 된다고 생각해서 내 형편에 대해서 일정 부분 '믿었던' '친구 같은' 동료에게 고충에 대한 이야기들 털어놓은 적이 많았다. 상사든 후배든. 같은 동기든... 초반엔 그랬다. 생각해보면.... 내가 그렇게 나를 드러내는 동안 그 '친구 같은' 동료들은 뒤에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살을 덧붙여 파생시켜 놓았으리라. 더군다나 회사는 '입이' 많다. 입을 가진 사람이 많은 단체/조직이라는 소리다. 시간이 흘러 내 귀에 들렸던 건 '너만 모르고 있는 거 같아서 하는 말인데 네가 예전에 그랬다며?'라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들이었다.
회사 안에서 어디서든 만날 수 있을, 음성 지원 키보드 워리어들.
당신들이 판단하고 만들어 놓은 '나'는 진짜 '나'가 아니라는 걸, 나는 일부러 해명도 변명도 굳이 하지 않았다. 다만 혼자서 상처 받고 울 뿐이었다. 그랬다. 내가 친구를 회사에서 찾았기에 그 쓴 맛도 고스란히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걸. 나는 사회 초년생 때 알지 못했다. 친구를 함부로 사귀는 것도 아니어야 할뿐더러 사실 나는 친구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사실 진짜 친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나는 잘 몰랐다. 사실 여전히 반은 알고 반은 잘 모르겠다. 어떤 사람들을 믿으며 살아야 하는 지를... 나는 친구로 생각하고 뭐라도 더 도와주거나 차 한잔을 더 사줄 생각을 했지만 따지고 보니 내 '친구들이라 믿었던' 사람들 중에 그렇게 '먼저 선뜻 연락하거나 주려는' 마음은 없었던 것 같다. 늘 아쉬울 때만 찾곤 했으니까. 한편으론 자기반성을해보기도 한다. 나도 그랬던 적은 없었는지를.
회사는 결국 '일'로 승부해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일로만 승부할 수 없는 곳도 바로 회사다.
사내 정치, 사바사바, 모 사바사, 뒷소문, 라인 타기, 이열치열, 동병상련, 좋은 게 좋은 거라 악순환적 시스템도 대충대충, 했던 일 그대로 계속 반복 또 반복, 의견에 '반문'을 제기하는 토론 문화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기업에서의 '발언자' 들은 까임 당하기 더 십상... 개인 MBO를 세팅하고 KPI를 통해 성과를 낸다고는 하나 대한민국에서 얼마나 '숫자'로 근거 있게 사람의 고과를 평가하는 곳이 있을까 싶다.... (자꾸 글이 길어지려 한다. 이제 줄여야겠다)
인정으로 인맥으로 봐 주는 것이 또 가능한 게 조직 아니겠는가.... 서글프지만 인정할 건 인정한다....
예전의 몇 소수의 동료들은 퇴사 후 밖에서 정말 따로 볼 수 있는 '친구'로남았다.
물론 회사에서 친구 찾지 말라 했지만 사실 이렇게 퇴사를 했어도 볼 수 있는 인연들은 친구로 결국 남는다. 그러니 회사 '밖'에서 친구를 진짜 찾은 셈... 이기도. 한편으로는 그렇게 친구로 남은 동료들의 특징은 그들이 정말 일을 '잘' 했고, 과묵한 편이며 함부로 발언을 일삼지도 않는 진중한 스타일의 선배들과 후배 몇 명 정도다. 생각하니 글이 또 길어질 거 같아서 다음 편엔그럼 그 '친구'로남는 사람들의 특징에 대해서 한번 적어볼까 싶다...
요즘은 재택근무 중이라 더 정신없다던, 나의 그 '친구' 들의 안녕을
오늘은 그들을 떠올리며 여전히 사내에서 고군분투할 친구들의 존버와 건투를 빌어 보며....
그래도 회사 다닐 때 좋은 추억도 많았습니다... 활짝 웃었던 기억도 적어볼 겁니다. 조금씩 퇴사의 추억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