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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Oct 11. 2017

28. 행복 보단 상처

상처 입은 당신이 끌려요. 그래서 좋아요

 눈길의 기준

 100세까지 산다는 보장이라면 이제 겨우 1/3을 지나고 있는 나는, 한 해 한 해 거듭할수록 호감 가는 사람의 기준이 달라짐을 느낀다. 일상이 그저 행복하고 여유 있고 편안한 환경의 사람보다는, 어딘가 그만의 상처를 견디며 살아야 하는,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눈길 한번 마음이 끌리는 요즘이다.   


 흰색 보단 회색이 좋다.   

 하얀 도화지 보단 회색 빛이 약간 도는 반투명한 미농지에 끌리는 편이다. 좀 더 적나라한 표현을 빌리자면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내면이 지극히 상처투성이인 그레이의 쓸쓸하고 삐뚤어진 사랑이 꽤 마음에 든다. (여담이나 그레이라는 캐릭터 자체도 매력덩어리긴 하다. 캐릭터 설정값 스펙 탓인가.... 젠장)


슈...슈트빨도 그레이하다.  넘나 멋진 하아...(feat. 멋진 행복성공가도의 주인공인 척 하는 상처 덩어리 그레이)


 어른이 되어 가는 걸까. 아니 이미 몸은 충분히 익은(?) 어른 이건만 마음은 우리 쌍둥이 아기들보다 못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닌지라 어른이라는 수식어가 나에겐 아직도 부끄럽지만 익숙지 않다. 하물며 같이 사는 나의 남자도 6년 동안 어른 명찰을 달아준 적 없기에 나도 인정한다. 아직은 어른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러나 우리는 사실 모두 어른 이자 어른이 아니다.
아이 혹은 어른이라는 기준을 판단하는 게 숫자라면
그건 성숙과는 무의미한 때가 꽤 많이 존재하니깐.   


사실 상처 하나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는 걸 안다.   

 행복하고 편안하고 여유 있어 보이는 사람도 속내를 여실히 까놓고 본다면 상처 하나 없는 투명인간이 아닐 것이다. 다만 그 혹은 그녀가 가진 상처를 드러내느냐 마느냐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다시 정의한다.


나는 그 상처를 타인에게 충분히 드러낼 수도 있는
열린 사람에게 끌리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것도 넌지시 담담한 어투로 꽤 정제된 어른의 익숙한 화법으로 이야기하는 자들에겐 마성의 매력이 넘쳐 흐름을 느낀다. 아주 많이 철철 흘러내린다. 그래서 내겐 충분히 이미 상처 입은 그와 그녀들에게 눈길 한번 마음길 두 번, 뭐든 주고만 싶어 진다 (모성애인가....... 하 모르겠다 쓰고 보니 뭔 말)


행복이라는 강박에 취하고 싶지 않다.   

 때론 행복에 굉장히 반항아적인 적대감을 표시하는 나 이기도 하다. 행복 강박증이 세상 도처에 깔린 것 같아서 어딘지 모르게 역겹기도 해서 말이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어쩔 수가 없다.


행복이라는 달콤함만 맛보려 하면, 어느새 미각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삶은 달콤 쌉싸름 찝찌름...다 겪어봐야 묘미니깐..
여기저기 미디어와 SNS, 콘텐츠물의 여기저기 행복 타령이 때론 그냥 싫다.   


 차라리 오히려 덜 불행하고 아직 불행하지 않다는 표현이 한결 편해진다. 내가 아는 어떤 멋진 작가의 대단한 책 타이틀도 행복보다는 불행에 초점을 맞추었고, 그 덕에 그 책은 꽤 잘 나가는 베스트셀러 목록에 한자리 차지하고 계시는 건 나와 같은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반증일지도...!


행복이 쉽지 않은 이유   

 누구 밑에서 개 같든 정승 같든 ‘돈’이라는 교환 가치를 지닌 화폐를 벌어본 사람이라면 적든 많든 얕든 깊든 느낀 순간이 있을 것이다. 있는 자들이 결국 독식해 나갈 수밖에 없는 그리고 부익부 빈익빈은 여전히 인류가 있는 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 자본주의의 썩어빠진 모순적 노동과 시장 시스템을 말이다.


 어디 그뿐이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현실의 여러 단면들에서는 이미 폭력에 노출되어 살고 있는 우리들이 아니던가? 행복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세계관에서, 행복을 개인에게 주입시키고 운운하는 건 옳지 않다고 본다.


'행복'이라는 가치가 때론, 상처 있는 개인 한 사람의 책임으로 돌리는 건
어딘지 모르게 무겁다. 행복에 취하다 어느새 벗어던지고 싶어 진다.  

 

 사실 고백하자면 그럼에도 나 또한 평범한 사람이기에 한동안 아니 최근까지도 ‘행복’이라는 그 말에 취해서 나의 지난 시간을 보냈고 지금도 보내고 있는 게 사실일지도 모른다. 나의 지인들의 대부분 ‘행복하세요 행복해야지 너 지금 행복하니’라는 말을 달고 사는 사람들 이니깐. 


차라리 행복하세요 라는 말보다 나는 '사랑하세요'라는 말을 더 하고 싶어 진다.

행복하세요 보다는 '사랑하세요' 라고 말할란다. 난 사랑이 좋다. (결국 사람이 좋다는 말의 반증이기도 할)

 

 행복의 여부가 환경의 문제이건 개인의 문제이건 그건 중요치 않다. 사실 행복보다 불행에서 나오는 상처를 스스로 부딪치고 그걸 통해 삶을 성찰하는 기회를 얻고 감내하지 못할 고난까지 닥쳤을 때, 불행하겠지만 결국엔 대응해 내고 마는 뚝심이 더 멋져 보인다. 상처는 결국 행복으로 가는 틈새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어서 그런가 보다.


 우리는 작고 크게 상처받으며 오늘을 산다. 그렇다면 차라리 행복보다는 상처받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대담하고 매력적인 용기를 선택하는 게 더 쉽고 멋져 보인다.


  시간이 걸려도 결국에는, 가짜 행복 타령보다, 진짜 스스로 행복해지는 순간은, 상처를 받아들이고 인내해서 무르익는 그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내 곁으로 배달되어 나와 마주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될 거라 본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행복보다 상처 입은 사람이 요즘은 더 좋다. 

 누군가 내게 상처를 이야기해 준다면 나도 기꺼이 나의 상처를 공유할 준비가 되어 있다. (고백이라도 해주시면 더 좋고..... 헛 또 헛소리... 역시 글은 밤에 쓰면 안 되는..) 


 상처의 질량과 크기가 작은 사람일수록 위험하고 무섭다.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무의식적인 행동에 익숙할 테니깐.

그들은 타인의 아픔을 공감할 수도,
공감해야 하는 이유조차 알지 못해서 안타깝다.


 최근 들어 많은 아동 혹은 여성과 같은 약자들의 인권 유린과 폭력의 현장을 여러 매체를 통해 너무나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우리들의 세상이 아니던가. 슬프다. 아주 많이 그리고 무섭다. 가해자의 행복관에는 피해자의 상처는 보이지 않을 테니 말이다.   

피해자의 아픔과 상처는 타인의 삶 수면 위로 떠올려질 수 없다. 다만 피해자 내면에서 어두움을 반복할 뿐..

 

나는 어설픈 행복 주창 자기계발서나 자라온 꽤 멋진 스펙의 환경 덕분에 성공한 사람의 성공기를 어느 순간 멀리 하게 되었다. 혹은 성공 운운하면서 그 성공기 이후에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겸손하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는 더더욱 매력 없다.  

 

 다만 오히려 바닥부터 끌어올려서 스스로를 부단히 다듬어오는, 느리지만 거친 환경에 노출되어있음에도, 그와 그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과 혼신의 힘을 쏟아낸 사람들의 상처와 그 걸 통한 배움과 발전의 결말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여전히 신화 같지만 실화일 수 있고 또 실화인 우리들의 이야기가 세상에 많아지기를 바란다.



얼마큼 스스로 움직이며 일궈내 나가는 사람인가   

 물론 행복보단 상처 입은 사람이 멋지고 매력적이라고 했다고 해서 너무 지속적으로 상처투성이를 반복하는 탓에 힘든 늪에 심하게 빠져 버리는 것은 곤란하고 위험하다. 다시 회생할 시간이 꽤 오래 걸릴지도 모르고 우리에겐 정말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 유한한 삶일 수 있기에 말이다. 


 다만 상처로 범벅이 되어 비루하고 남루한 현실을 탓하고
타인들의 용기 어린 응원 메시지와 감성 자체에만 젖어서
말미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의지박약만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서툰 감정의 표현에 미안한 마음 가득하지만, 의지는 약해질 수 있어도 최소한 사라지진 않았으면 좋겠다. 의지가 있다면 그 마음이 있다면 결국 어떻게 해서든 행동으로 연결되어 있을 거라는 걸 알고 믿고 있으니깐 말이다.


열려 있는 내면의 우리들의 마음이라면 겉은 아무래도 좋지 않은가. 상처 입을지언정 말이다.

 상처 입은 매력적인 당신이 그럼에도 얼마큼 스스로 오늘을 잘 메꿔 나가고 덜 불행하지 않으려 노력하다가 결국엔 순간순간 작은 행복을 쌓아갈지 나는 알고 있다고 감히 말하며 응원해 보고 싶다.   


상처로 인해 터득해 버린 삶의 혜안을 가진 솔직한 매력의 소유자,
그게 바로 당신과 나였으면 좋겠다. 

그러니 우리는 결국 '끌림'의 대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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