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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May 19. 2020

사랑이 지나간 자리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 


- 오만과 편견 - 




사람의 존재를 아끼며 정성을 다하는 마음. 

그것이 '사랑'이라면, 그와 나는 한 때 서로의 위치를 존중했고 서로의 꿈을 독려했으며 서로의 '오늘'을 살뜰히 챙기고 보살피려 했다. 오늘 점심은 무엇을 먹었는지, 저녁으로 무엇을 먹고 싶은지, 음식을 함께 먹는 식사 공동체인 '식구' 이자 법적 테두리 안에 소속체이기도 한 '가족' 이 된 이후에도. 그이의 일상이 궁금했던 나는 꽤 오랜 시간 주로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거나 음식을 해 주면서 그의 일상 속 안녕을 물었던 것 같다. 그게 오히려 좋았던 걸까. 열렬한 고백보다 그이는 일상 속 대화를 더 좋아했던 것 같다. 어제와 같은 평범한 대화에서 그이는 무엇을 느꼈을까. 



- 오늘은 두부김치야. 냉장고 털었다. 

- 역시 집밥이 최고지. 

- 집에 와서 밥 먹어. 먹고 싶으면 말해. 밖에서 먹는 밥, 지겨울 텐데... 

- 칼퇴하고 집에 와도 너무 늦고 애들 보는 것도 고생이니까.

-.... 그게 이젠 내 일이야. 자기는 자기 일 하고 나는 내 일 하고 그럼 됐지. 

- 이제 좀 괜찮아? 많이 순해졌네 

- 순한 게 아니라 이게 진심인 거야. 밥을 진짜 해 주고 싶은 마음. 

- 엄마 다 됐네

- 밥은 아빠도 할 수 있어. 물론 지금은 둥이 어미고. 집 밥이든 집 밖 일이든 힘든 걸 아는 사람이고.  

- 기운 좀 보여서 다행이네. 

- 고맙네. 내 걱정해줘서. 

- 내가 고맙지. 애들 잘 봐줘서. 

- 그래...



요리를 해주고 싶은 마음, 먹을 걸 건네고 싶은 마음은 '사랑' 이었다. 나의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유산을 하기 전엔 살가운 안부의 목소리를 주고받았었다. 

연속적인 유산을 하기 전 까지는. 그 이후에 우리 두 사람에겐 여러 자잘한 일상 속 사고들이 터져 나왔고 그이는 그 시간을 연륜으로 경륜으로 버티려 했다는 걸 알았지만, 당시의 나는 버티질 못했었다.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하고 싶었지만 결혼이라는 선택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었다는 걸 아주 뒤늦게 알았다. 당시엔 무지하게도 어렸고 어리석었고 무능했고 무기력했고 유치한 몸만 어른이었다. 독이 묻은 문장을 참 많이도 그이에게 내뱉었었다. 생각해보면 결혼 이후의 다툼이나 싸움의 주원인은 그가 아닌 그의 주위 관계들로 인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그 관계의 대응을 유순하게 관리하거나 처리하지 못한 책임을 굳이 따지자면 그와 나에게 있었을 테다. 결국 남을 탓하는 건 핑계이고 남이라는 타인을 대하는 태도나 신념, 가치관과 생활 철학은 결국 '나' 에게 있을 테니까. 



내가 선택한 사랑의 대상을 많이 아프게 했었다. 아이를 낳기 전 몇 년 간은 내내 그랬다. 

이대론 같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숨 막힘의 원인은 내게 있었다. 내게 있었다는 것을 나는 시간이 아주 오래 지난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언제나 경험이 먼저이고 깨달음은 뒤늦다. 사랑을 하다 보면 상처도 비례하듯 어쩔 수 없이 묻어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스스로 종용하려 했던 '사랑'의 형태는 양방이 아닌 일방적 '기댐'이나 '바람'으로 인한 유치한 어린아이의 마음이었던 것인지. 하여튼 지간에 인생의 바쁜, 구질구질한 속삭임의 연속 덕분에 신혼임에도 불구한 우리 부부는 꽤 오랜 시간 내내 고달팠던 것 같다. 



바싹 마른 시간이었나 싶어서 좀 아쉽고 그렇다. 



쌍둥이 출산 이후 모든 대화의 주 골자는 아이들이 되어버렸다. 

나 조차도 심지어는 아이들 혹은 '가족'이라는 '단체'를 향한 대화가 대부분이지, '그'를 향한 대화에서 많이 벗어난 느낌이다. 사실 의식적으로 그러지 않으려고 때때로 어떤 노력들을 한다. 여저히 열심히. 그의 오늘 하루 중 가장 좋았거나 슬펐거나 기뻤거나 뿌듯했던, 오로지 '그'의 시간 자체를 묻곤 하는 나는, 이런 안부들이 어쩌면 '그'에 대한 이성적 사랑을 지키려는 최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제는 익숙해진 건지 아니면 편안함에 안주하려는 것인지, 이성적 사랑을 지키려는 생각도 많이 흐릿해져 가고 현실을 그저 순탄히 잘 살아내려는 다분히 실존적 사랑만이 남는 것 같다. 대화와 생각의 끝에선 언제나 '가족' 이라든지 '아이들'과 같은 집단 속 구성원의 '잘 살아냄' 이 남을 뿐, '그'라든지 '나'라는 개인이 화두로 떠오르진 않는다. 



10년 차를 바라보는 부부, 아직 한참 손이 많이 가는 영유아 부모로서의 우리 두 사람에게 

이것이 더욱 자연스럽고 편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개인이 아닌 사회 공동체인 '우리'를 생각하는 것. 그것이 결혼 이후의 서로에 대한 '예의'이고 '최선'이며 '책무'라는 신념을 더욱 선명히 굳히게 되었다. 그 신념이 없으니 '부부의 세계'가 탄생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한편으로 나의 현재 '가족'을 생각할 때 편하고 안정적이고 안전하다는 느낌을 갖는 것은 한편으로 얼마나 큰 축복인지도 알게 되었다. 집 안과 밖에서, 부부 두 사람은 각자가 영속된 자리에서의 책무들을 챙기고 살피고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하루는 바짝 지나가 있을뿐더러, 늦은 밤, 아이들이 잠에 들거나 집밥을 먹는 식탁 위의 대화들을 잠깐이나마 주고받는 그 시간조차도 쉬이 내지 못하거나, 깨진 유리조각을 힘겹게 붙여서 겨우 관계 유지만을 위해 인내심만 남은 채 살아가는 '이상한 정상 가족' 들도 있는 것이 이 시대 속 가려진 현실일지도 모르니까. 



그가 보이지 않는 평일 아침이 이제는 익숙해졌다. 



이젠 아침에 일어나 옆을 바라보면 어린 두 명만이 보인다. 

새벽 출근이 일과가 되어 버린 그를, 평일에 볼 수 없는 시간이 더욱 많아졌다. 익숙해진 텅 빈자리,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서 남겨진 사랑들을 챙기기 위해 나는 다시금 분주한 아침을 맞이한다. 아빠를 닮은 아이들은 옆에 없는 아빠를 찾는다. 그가 오기 전까지 그의 몫까지 최선을 다해 사랑을 건네줘야겠다는 이상한 각오가 생겨버리고 만다. 아울러 그를 향한 과거의 낯선 오만과 편견 또한 아이들을 살피느라 둘이서 각자의 위치에서 고생한 시간들이 겹겹이 쌓여가면서 이렇게 조금씩 씻겨 내려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그리하여 나는 아이들에게 이 말을 건넨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하루를 지켜내려는 진심... 



- 사랑해, 잘 일어나 줘서 고맙다.



아침이 좋기를 바라는 마음도. 



그에게는 어쩐지 이제는 쉽게 전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 말. 

사랑이 지나간 자리를 보며 아이들에게 대신 전하게 되어 버린 말. 

그의 오늘이 많이 속상해하지도, 다치지도 않기를 바라며 혼자 내뱉는 말. 

부부가 되어 버린 우리에게 사뭇 낯설게 되어 버린 이 문장을



그가 자신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다른 두 사람에게 대신 건네며 아침을 시작한다. 

그것이 내가 가장 빨리 실행할 수 있는, 세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기에. 






나의 세 사람..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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