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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May 21. 2020

리스 부부, 사랑의 온도

원하는 것을 자신의 공간에 단단히 붙잡아둘 수 있는 용기가 부럽네요.

칸트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결국, 우리는 넘어진 곳에서만 일어설 수 있으니까요. 


-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 줘 - 




나는 아주 가끔. 그러니까 정말 아주 가끔 우리가 '리스' 인지를 스스로 묻곤 한다.

어제도 그랬다. 세탁기 안에서 빨랫감을 꺼내 탈탈 털어 건조대 위에 하나씩 가지런히 옷가지들을 널고 있을 즈음이었다. 비 개인 날씨가 참 좋아 보였다. 나가지 않아도 분명 좋은 날씨라는 게 선명히 보여서 마치 밖으로 나가 햇볕을 쬐지 않으면 이 좋은 선물 같은 날씨에게 미안할 정도의, 그런 엉뚱한 생각이 절로 나게 할 만큼의 오월의 낮, 봄 날씨였다. 나도 모르게 옷장으로 다가가 요 근래 내내 생각'만' 했던 원피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거울 앞에 여자를 바라보다 멈춰 섰다. 이제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나는 잠깐 망설였다. 예전엔 한 번의 망설임 없이 원피스에 손을 대던 나였는데, 지금은 망설인다. 그렇게 변했다. 이제는 예쁜 옷도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어쩌면 그에게 나는, 그리고 나에게 그는 지금의 '원피스' 같은 존재가 되어버리는 중인 걸까. 

나는 생각한다. 아니, 사실은 생각이 아니라 여전히 궁금해한다. 법적인 서류상 '부부'로 결속된, 기혼 제도의 이성의 범위 안에서 (소수자를 존중한다. 따라서 동성 간 혹은 폴리아모리의 다자간 자유연애방식을 채택하여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그런 사랑도 존재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라서) '리스 부부' 란 과연 어떤 부부인지. 우리는 그 안에 속하는지 아닌지. 



반지에게 미안해졌다. 생활력이 강하다 보니 거추장스러워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거지... 



그이에게 아주 가끔, 정말 가끔 묻곤 한다. 어제처럼. 

대놓고 물어봤을 때 멋쩍어하는 그이와의 대화는 의외로 유쾌하다. 그와 주고받는 문장과 문장 사이에 왠지 모르게 발랄한 재미가 은연중에 느껴지는 대화를 주고받다 보면 다행이지 싶기도 하다. 물론 나의 꽤 진지한 다큐적 대화의 시작은 순식간에 곧잘 예능이 되어 버리곤 하지만. 뭐 다큐보다야 예능적인 삶이 요즘은 감사하기도 하다. 인생 자체는 고해, 고통의 바다라 그 바다를 넘는 데 무엇보다 필요한 건 다름 아닌 예능적 즐거움, 일상의 행복은 그런 사소한 것들에 있을 테니까...



- 여보. 요즘은 왜 안 건드려? 

- 왜 이래 갑자기. 

- 아니, 예전 하곤 달라져서. 

- 건드려도 싫어했던 사람이 누군데 

- 싫었지. 정확히 얘기하자면 수면 시간도 턱없이 부족한 초신생아 양육자한테 섹스가 가당키나 할까. 건강한 성욕이 있음에도 육아하다 보면 사라지는 게 자연스러운 거 아냐?

- 인정.. 진짜 인정한다. 

- 그리고 우리는 어떤 엄빠? 

- 쌍둥이...

- 정답. 이양반, 오늘 대화 좀 괜찮네

- 난 살아 있었다. 죽지 않았어. 

- 그러니까. 죽지 않은 당신이고 나인데, 내 말은 우리가 리스인지 갑자기 궁금해진 거지. 어떻게 생각해?

- 글쎄.... 리스라.... 우리가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나도 사실 잘 모르겠어. 

- 이리 와봐. 

- 왜 이래 갑자기 ㅋㅋ

- 나 상위 1% 취향 가진 거 몰라?

- ㅋㅋㅋ 저기 남자 여자 바뀐 거 같은데

- 내가 주체적이야. 그리고 남녀 차별은 안 하는 거야. 여러모로. 

- ㅋㅋㅋ 왜 이래 정말 



미혼 시절, 그는 나의 '주체적 취향'이 좋다고 했었다. 

나르시시즘 많이 곁들여 부끄러우면서도 진지한 고백을 하자면 나름 상위 1프로의 '남자 동물' 이 좋아할 만한 '성적 취향'을 가진 '여자'라고,  혼자서 생각하는 나로서는. 출산 이후 신생아기를 거치면서 그 '여자' 로서의 한쪽 면을 거의 도려내야 살아지는 시간을 거쳤다. 섹스는 나에게 사치였다. 수면시간도 턱없이 부족했고 에너지를 아껴서 아이들을 보살핌이 전부였던 나로서는....



시간이 흐르고 아이들이 사람의 형상을 띄워갈 무렵, 나는 어떤 노력을 하려 애썼다.

'다시' 그와 육체적 교감을 나누려 '머리'로는 의식적인 '노력'을 했다. 여전히 나를 보고 '반응' 하는 그이에게 한편으로 언제까지고 '싫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사랑하는 상대가 좋아하는 것에 장단을 맞춰 주는 것이 나로서는 '사랑의 대응'이고 그것이 '예의'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신념은 반대로 내가 이러하니 상대 또한 나의 바람에 적절한 대응을 해 주는 것... 그러나 아뿔싸. 여기서부터 생각이 갈린다면 어떻게 할까. 그의 요청적 신호에 적극 대응할 여력은 솔직히 나지 않았던 게 사실이라 '대충' 혹은 얼버무려, 종종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허구의 인물 혹은 예전에 '한 번 해보고 싶었던 캐릭터'를 떠올리며) '거짓된 호응'으로.... 그를 앉았고 좋아해 줬다면. 그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에 그치는 것... 



거부한다고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는 걸 당신도 나도 잘 알고 있었을 테다. 



어제는 오랜만에 원피스를 입고 화장도 해 봤다. 

경력 단절 이후 3개월 만의 '단장'이었다. 저녁에 이른 퇴근을 한 그이에게 집밥을 차려주면서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는 호응하고 칭찬마저 곁들여 주는 여전히 자상하고 다정한 '남편' 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반대로 그가 다정한 만큼 성실하고 충실하게 '집'을 지키려 하다 보니 그 또한 '남자' 로서의 어떤 면 하나를 도려내고 있는 것은 아닐지 조차도... 나는 역설적이게도 그 슬픔을 대신 느낄 수 있었다. 제멋대로 해석이지만. 



- 어라. 이게 누구심. 오랜만에 예쁘네. 

- 저녁은 스팸 구이야. 보시다시피 음식 비우기 프로젝트다 

- 그나저나 오늘 진짜 예쁘네. 아주 좋아. 

- 뭐가 좋은데? 

- 응? 

- 좋지만 거기까지잖아. 이제 나 안 건드리잖아. 나야 뭐 don't care 지만. 

- ㅋㅋㅋ 왜 이래 또. 나 일 많잖아. 피곤도 하고. 

- 알지. 그 마음. 내가 잘 알지. 밥 먹어라. 입술보단 스팸이 맛있지. 암. 그게 현실적이지. 현실은 소중해 

- 왜 이래. ㅋㅋㅋ

- 난 이제 맘 정했어. 나중에 안아달라고 RFP 제안해도 피드백 없다. short list 도 없어. 뺵. 빠꾸 

- ㅋㅋㅋ 

- 그냥. 당신 웃는 게 좋아서... 장난 좀 쳐 봤다. 밥 먹어. 

- 아무튼 오늘 예쁘다 우리 아내. 

- 회사 다닐 땐 이랬어. 아니 집에서 애 키우는데 치마 입을 순 없잖아? 집에선 공주 필요 없다고 본다. 뭐 지금이야 며칠 친정에서 아이들 보살펴 주시니 생각지 못한 휴가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 휴.... 

- 맨 얼굴에도 둥이들 잘 키워주는 아내가 그래도 나는 좋다. 공주보다 더 예쁜 사람이 엄마야. 

-.... 여보

- 왜?

- 만약에, 한번 자보고 싶은 여자 생기면 꼭 말해줘. 나는 말만 해주면 돼....

- 일하고 둥이 보고, 우리 작가님 대화에 맞게 응해주는 것도 벅차다 ㅋㅋ 왜 이래 요새 

- 나 정도면 내가 인정해준다.... 아니 당신이 선택한 사람이 정말 궁금할 거 같아. 그러니 말만 해 줘. 그럼 돼. 나는 그거면 돼. 

- 그럴 일 없으니까 제발 그만 하시라 ㅋㅋㅋ 




사랑을 해도 고독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시작한 것. 

역설적이지만 그를 '가짜 마음'으로 앉아주고 쓰다듬어주고 만져주며 보듬아줬던 (마치 아이 다루듯) 그리 자주는 아니었지만 완벽히 없지도 않았던 우리들의 시간은 '리스'로 정의될 수 있을지. 사실 여전히 궁금하다. 만약 리스라는 것이 잠자리의 횟수가 아닌, 양쪽의 '만족성'을 놓고 정의 내리는 것이라면 어쩌면 우리는, 아니 나는... 어느새 아주 오래전, 신랑의 호응과 요청에 자주 거절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리스에 적극 동참하고 있었던, 지금의 그이를 이렇게(?) 만든, 이제는 더 이상 나를 찾지 않기 시작한 '그'를 확인할 때마다. 내가 이토록 무지(?) 하고 현명하지 못했던 걸까 싶은, 묘한 슬픔이 심장에 내리 꽂히지만. 



그럼에도 나는 믿고 싶었다. '부부의 세계'에서는 육체를 넘는 무엇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몸이 떨어지면 마음도 떨어진다는 옛 말을 여전히 반은 믿고 반은 믿고 싶지 않은 나는, 몸은 떨어져 있을지언정 정신적 교감과 '가족'이라는 단체의 건강한 실존적 유지와 생활 철학이 더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믿고 살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쩌면 이미 우리 부부가 택한 '사랑'이고 그 사랑 안에서 감히 섹스'따위'는 사라져도 큰 영향 없을 ('부부의 세계'와 같은 부작용은 있을지 모르나)...



뜨거운 건 결국 식는다. 그래서 부부의 사랑은 반대로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 유지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나는...



이미 기혼 제도 안에서 폴리아모리가 아닌 모노 가미로 살아가기 시작한 이들이 가족이 되었을 때 

시작을 울리는 총알은 쏘아졌고 그렇게 '가족' 으로서의 공통의 KPI를 가지고 서로의 MBO에 충실하며 가끔 이런 유머러스한 섹드립도 '가능' 한 현실 부부 케미를 여전히 가지고 있으니 이것으로 괜찮다고... 아직 리스는 아닐 거라고. 그리고 설령 리스일지언정. 잠든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며 나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그의 볼에 손을 얹고 말을 건넸다. 그러던 중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당신이랑 다시 연애할 수 있을까... 다시 사랑이 하고 싶어 지면 어쩌지. 

사랑한다는 말 대신 고맙다는 말이 먼저 나오는 사이가 되어 버렸는데. 

우리 다시 그럴 수 있을까.... 여보... 



두 사람의 사랑의 온도는 서로의 노력 하에 잘 지켜지고 있다고. 

이제는 서로의 몸이 어색한 사이가 되어 버리는 시간을 통과하고 있지만. 서로에게 사실 아이들을 뛰어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걸, 그도 나도, 말하지 않아도 이젠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아울러 여전히 가끔 폴리아모리인지 아닌지를 종종 의심하는 나 임에도, 한편으로 어쩌면 이 마음은 내가 이번 생에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 바로 내 옆에서 잠든 이 사람과 이 사람을 둘러싼 사랑들을 지키려는 최선의 사랑이라고, 이 또한 제멋대로 생각해 버렸기에. 잠든 그에게 건넨 이 말을, 언젠가 또 날씨가 좋은 어느 날, 원피스를 입고 고운 얼굴을 한 나를 봤을 때 그는 과연 어떤 표정과 대사를 건네 줄지. 사뭇 기대도 해 보며... 




그래도 나는, 결국엔 당신을 보고 찾게 될 거야. 그게 '부부' 니까... 아이라는 햇빛을 향해 같이 나아가는 사람.  지키려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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