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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un 08. 2020

잿빛을 햇빛으로 만드는 마법

우리의 시간은 이미 꽤 지났고, 남아 있는 시간은 아주 활동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우아하고 세심하게 보내야 한다.


- 휘파람 부는 사람, 메리 올리버 -  





13년 만에 다시 써 본 이력서는 보기 좋게 떨어졌다. 

자기소개서에 '뻔한 답'을 적을 걸 그랬다. 그저 이제는 뻔한 답이 아니라 '뻔뻔한' 문장을 써 봤던 짓궂은 나를 자책하면서 괜히 없던 자신감이 더 사라질 것 같아서 한참을 웃으려 애썼다. 기대가 크지 않았으니 실망은 덜 했지만, 그럼에도 다가오는 묘한 감정 앞에서, 나는 '거절' 당하는 것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오만함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리고 '그'가 떠올랐다. 나의 안위를 걱정하는 성인 가족 구성원... 법적 상속 우선순위 대상자이면서 '나'를 비롯한 '우리'를 '책임' 진다는 사명과 책무 하에 온 하루를 밖에서 애쓰는 사람...  



그가 떠오르는 순간은 보통 그랬다. 

정확히 누군가로부터 현재의 상태에 대한 위로와 괜찮음을 현실적으로 확인받고 싶은 순간. 타인의 위로와 같은 '뜬구름 잡는 거리감 넘치는' 뻔한 멘트가 아닌, 생활을 함께 해 나가는 '부부' 이자 서로의 삶을 지지하는 응원하는 파트너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그러나 따뜻함이 묻어나는 위트 있는 목소리... (를 '배우자' 에게 바라는 건 물론 역설임을 안다. 애인이면 모를까... 뭐 아무렴) 




목소리를 낼 수 없을 땐 편지를 쓴다... 오랜만에 편지를 쓰고 싶었다. 




나이를 먹은 성인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어른도 '의지'를 하고 싶은 때가 정말 있나 싶었다. 

'부모'의 터울에서 벗어나 경제적 정서적 독립을 하고자 하는 의지 충만한 성인임에도, 다치고 넘어졌을 땐... 한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 사람이 곁에 있는 처지는 얼마나 축복받은 생인 걸까. 때로 못내 밉고 서글프고 아쉽고 서운한 감정이 서리는 대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야말로 '가족' 이 주는 '위안' 이 아닐까 싶다. 그의 멘트는 예상대로 짧았지만, 짧아도 너무 짧은 덕분에 나에게 낙담 대신 뜻밖의 웃음을 주었기에. 물론 그 웃음 뒤에 따라오는 그의 문장 덕에 나는 괜히 눈물이 핑 돌았지만. 




- 나, 서류 떨어졌어. 

- ㅠㅠ 

- 괜찮아. 기대 많이 안 했으니까...

- 울지 말고. 

-.... 




살면서 내 옆에 누구 한 사람...

그 '단 한 사람'만 있다면, 그렇게 바닥에 붙어 있는 사람을 믿고 일으켜 세워주는 누군가만 있다면, 삶은 또 그럭저럭 살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가족' 이 돼야 한다고도 생각하면서.... 반대로 나는 그런 사람으로서의 '가족' 이 그에게, 아이들에게 되어주고 있는지를 반문하면서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큰 축복이지만

한편으로 그에게 못난 모습을 보이는 게 못내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한 나머지 잠시 나는 속내의 털어놓음을 망설였다. 속상함을 드러낼까 아니면 쿨한 '척' 할 것인지에 대해서. 별 걸 다 망설이게 된다. 때로는 별 것들 속에서 내가 완성되는 것 같기도 하기에... 결국 그에겐 '쿨' 함을 비쳤고 우리의 대화는 짧았지만, 나는 혼자 괜히 울었다. 울기 좋은 시간에, 울기 좋은 공간에서. 그이는 울지 말라고 했으니 눈물을 들키진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렇게 성숙해지는 걸지도 모른다. 반복하면서..




용기나 희망과 같은 마법을 믿으며 살고 싶지만

그러기에 삶은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도 이제는 제법 아는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다. 나를 너무 드러내도 안 되고, 너무 드러냈다가는 손해 보기 십상이라 적절한 감춤과 적당한 거리감을 요하며 계산기를 일정 부분 두드리며 살아야 살아지는 인생... 




세월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사건들은 지나가고, 세상은 변하고, 상처는 희미해지고 

행운은 찾아왔다가 사라졌다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찾아온다는 것이다. 


- 휘파람 부는 사람 -




짧은 글자 대화를 마치고 내가 가진 것들을 문득 생각해봤다. 

고개를 돌리면 무조건적인 순정의 사랑을 마음껏 발산하는 아이들이라든지, 한마디를 해도 이젠 제법 서로의 상처를 적절히 다스리고 위로해줄 배우자가 있다는 것이라든지, 혹은 데이터로 증명할 수 없는 개인적 '신념' 이라든지 '의지'라든지, 그리고 '용기'라든지... 내가 아니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가족' 들과, 아직 스스로에 대한 '사랑' 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금세 꺼질 것 같지만 여전히 불을 밝히려 하는 촛불 같은 믿음들... 그 외 보이는 유형 자산과 쉽게 결과까지 보이지 않아서 제법 답답한 무형자산들에 대해서까지도.. 그때 그이에게서 뒤늦은 답신이 다시 도착했고 나는 또 생각하고 말았다. 



'나랑 둥이들에겐 엄청 필요한 인재다. 어디 가지 마시라' 



잿빛이 햇빛이 되는 마법..... 



눈물은 때좋을 때도 흐르는 것인가 싶었다. 

낙심이라는 잿빛은 거둬지고, 사랑이라는 햇빛이 다가오는 것도 같았다. 

다시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자신에게 말하며 눈물을 닦았다. 

빨랫감을 다시 널고 아이들의 하원 후 간식과 저녁 반찬을 떠올렸다. 

낙심은 온 데 간데 없어져버리려는 삶의 역설적 찰나였다...





역설 끝의 세 사람, 나의 남는 사랑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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