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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un 09. 2020

마지막 독서모임  

나는 나 이면서 그렇지 않아요, 떠나지만 늘 이곳에 남아 있어요. 

이 두 문장은 휙 부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나뭇잎을 떨게 하듯 잠시 내 우울한 마음을 어지럽힌다.


- 내가 있는 곳, 줌파 라히리 - 




역삼역 3번 출구에서 나오자마자 아크 플레이스가 보였다. 

코로나를 무색게 하는, 자본주의 시대에 걸맞은, 모던한 화려함과 힙스러움이 잘 어울리던 공간이 한편으로 비 인문적이고 이질적으로도 느껴졌던 건 왜였을까 싶다. 어쨌든 로비를 잠시 둘러보고 지하 1층에 위치한 독서모임 장소로 향했다. 몇 분 전까지의 로비와는 사뭇 다른, 지하 주차장과 연결되어 있는 낮은 천장이 꽤나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임대비가 비싼 고급 입지에 지하 조차도 이 정도 공간을 운영하고자 했던 것이 자본주의 시대에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건물주의 마음이 사뭇 이해가 되기도 했다. 지하조차도 써야 했을 테니까. 아주 그럴듯한 인테리어와 사용하고자 하는 임대인만 있다면 why not 일 테다. 



한낮의 일요일,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경험 공유 클래스를 캐치프레이즈로 걸어 둔 모 스타트업을 통해 '독서 모임 호스트'로 활동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9개월 차에. 나는 이 독서 모임의 '무보수 호스트 활동'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생각해보면 그저 책이 좋아서, 그  책으로 연결되는 관계를 갈구했기에 시작했던  '무보수' 여도 상관없었지만 반대로 그 어떤 메리트를 느끼지 못했기에.. 어쩌면 유지가 쉽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책 큐레이션을 하고 그에 맞춘 준비를 해 왔던 시간. 

대충 읽는 사람은 되지 말자는 나와의 약속 때문에, 한번 시작한 책의 완독은 필수이고 서평과 같은 기록도 시간이 허락되거나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되도록 남기는 편이다. 독서 모임을 운영할 때도 마찬가지. 사전에 서평을 공유하고 모두의 원활한 토론을 위해 진행을 한다. 그렇게 책을 통한 사유와 개인 경험을 공유하는 시간들에 흠뻑 취해서 살았던 지난 9개월은 그랬다. 시간과 교통비를 자비로 들여서라도 해보고 싶었던 '일' 중 하나였었다. 



책을 고르는 시간은 언제나 기뻤다... 



그렇지만,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처음의 좋았던 취기는 조금씩 없어지고 있었다. 이유야 물론 있었다. 모든 '일' 도 처음엔 좋게 시작하지만 끝이 좋지 않게 끝나는 데에는 그 '이유'라든지 '발단' 이라든지 '트리거'가 있는 법. 모임을 운영하면 할수록 '열정 페이' 당하는 느낌이랄까. 무엇보다 주말 2시간을 위해 왕복 거리 및 준비 시간 감안해서 거의 반나절을 투자해야 하는 시간에 집에 있을 아이들이 아른거렸고, 다녀온 이후에 거의 '폭탄 투하 직전'의 장난감이 즐비하고 간식으로 끼니를 때울 게 분명할 남자 세 명이 그려졌다. 따지고 보면 이 시간에 내가 도대체 뭘 하고 있나는 생각이 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었을 테다. 



생각해보면 9개월 동안 독서모임을 진행하면서 유자녀 기혼녀를 만난 건 두 세명 정도에 불과하다. 

이 세상의 유자녀 기혼녀들은 어떤 취미생활을 갖는가에 대한 엉뚱한 질문을 가끔 하곤 한다... 여하튼 대부분 젊은 미혼의, 책이 좋든 싫든 경제가 궁금하고 투자가 궁금하거나, 혹은 선정한 책이 좋아서 오시는 '미혼' 남녀가 독서모임 참가자들의 대부분이었다. 자신을 위해 투자하는 게 아깝지 않은 미혼들의 자유와 그들의 싱그러움과 생동감이 자못 부럽기도 하였으나 반대로 그랬기 때문에 뭐랄까, 어떤 현실적 괴리감도 더해졌던 게 사실이었다.



남은 남이지 내가 아니니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마지막 독서 모임을 즐겁게 마쳤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음 책에 대한 소개를 뻔뻔스럽게도 말씀드렸다. 물론 다음은 없을 거지만 다음이 또 있을 거라는 자연스러운 '페이크'를 날렸던 것이다. 아마 알아채시는 분도, 관심 있게 들으셨던 분도 물론 없으셨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모두와 함께 하는 독서모임의 '다음'은 없겠지만, 혼자서 읽고 사색해보시라는 취지에서 이미 생각해둔 책을 그분들껜 말씀드렸다. 그분들이 그 책을 꼭 읽고 자신만의 철학이나 삶의 신념 혹은 의미에 대한 생각을 하실 수 있는 분들이 시기를 바라면서... 



역삼역 3번 출구로 들어가 다시 분당선 지하철을 타면서 가방에서 읽다 만 책을 꺼냈다. 

그리곤 이상하게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아쉬움보다는 이런 경험을 해 봤다는 만족이 더 했으니 그걸로 됐지 싶었다. 독서모임을 하든 하지 않든 읽고 쓰는 삶은 계속될 테니까. 아울러 혼자만의 시간에 하는 행동이 바로 그 사람의 삶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믿고 사는 나로서는... 



다시 말하지만 혼자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그 사람을 대변한다... 혼자의 시간과 습관은 그래서 중요하다. 



책이 좋고 여전히 읽고 있다면 그로 인한 좋은 인연들은 또 생기리라 싶었다. 

물론 요즘은 타인보다 가족이라는 관계에 더 충실하면서 사랑과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그들을 지키며 사는 것만으로도 벅찬 시대라는 생각이 앞서니... 당분간도 타인과의 관계 확장에는 소홀할 내가 그려진다. 그것이 자못 고립감이라든지 외로움이라든지 슬픔을 불러올 언젠가가 생기더라도. 감당할 근력은 이미 생긴 것 같다. 유자녀 기혼녀로 거의 주말부부와 같은 일상으로 독박 육아를 하면서 생활하는 형편으로 순식간에 전락되어 버렸지만. 아이들의 순수한 사랑은, 어른들의 때 묻은 생각보다 나를 치유한다는 느낌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독서모임을 끝내고 현관문을 열자 아이들이 달려와 나를 껴 앉는다. 

에어컨 고장으로 인해 선풍기 바람에 의지한 채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눈에 들어왔다. 땀을 닦아주며 나도 그들을 껴앉았다. 여기야말로 내가 있어야 하는, 나를 필요로 하는 진정한 곳이라는 생각과 함께... 





이제 나의 독서모임 멤버는 2인 체제가 되었다. 너희들이라면 내겐 충분하다.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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