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티움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만들어가고 싶어 하는 존재다.
그것이 꼭 위대하고 거창할 필요는 없다.
내 영혼이 작은 기쁨을 느끼는 나만의 세계를 만드는 것 또한 훌륭한 삶이다.
그 시작이 바로 오티움이다.
- 오티움 -
작가님의 이전작을 꾸준히 읽어왔던 독자로서
신간은 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 기다리듯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던 때였다. 그리고 '오티움' 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발간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아아' 했었다. 삶에서 개인을 이해하려는 노력, 세상과의 불협화음 보다 조금 멀직하게 떨어져 나와 타인을 생각하고 보듬으려는 자세. 이런 노력을 하는 이들은 보통 심리나 철학서를 찾곤 할지 모르는데, 내가 그런 인간이 범주에 속했고 이 '오티움' 이라는 라틴어가 기원이 된 '한가, 여유, 여가, 은퇴' 등등의 의미를 얕게나마 알고 있었기에 책에서 어떤 이야기를 해 주실지 짐작하면서도 단숨에 읽어 내렸던 것 같다. 나의 '오티움' 을 되새기면서.
오티움, 문요한, 위즈덤하우스, 2020.07.02.
삶은 고해, 즉 고통의 바다이기에
사실 마냥 행복할 수 없는 게 인생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산다. 따라서 행복보다 의미 있는 상처, '의미'에 조금 더 후한 점수(?)를 메기며 살아가는 요즘의 나로서는 그럼에도 나라는 개인의 '행복'을 지켜주는 비밀스러운 시간을 지키려 노력한다. 별 건 없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 좋은 음악을 듣고 한 잔의 맥주를 마시는 시간, 내게는 하나의 '깊이 있는 놀이' 와 같은 시간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오랜 시간 흘러도 한결같이 변함없는 나만의 기쁜 시간은 바로 이런 것들. 어쩌면 '오티움' 에서 말하는 이 '오티움' 덕분의 나의 일상은 고통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연결' 이 되어 주는 건 아닐까 싶다.
나는 행복의 핵심이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고 보는 유심론적 태도를 경계한다. 행복의 핵심은 '좋은 경험' 에 있다. 그 시간에 온전히 몰두할 수 있고, 기쁨과 같은 좋은 감정을 안겨줄 수 있는 경험 말이다. 우리가 행복하려면 좋은 경험을 찾아내고 이를 늘려가는 게 중요하다. 행복은 기본적으로 기쁘고 기다려지고, 하고 싶은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좋은 경험이란 놀이와 유사하다. 아이들이 어른보다 행복한 건 잘 놀기 때문이다. p.37
진짜 오티움이라면 잠깐 쉰다고 해서 영원히 쉬게 되는 것은 아니다. 내 영혼에 기쁨을 주는 오티움은 그 불꽃이 사그라질 수는 있지만 불씨마저 꺼지지 않는다. 한동안 잊고 지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타오르게 된다. 그것이 오티움이다. p. 233
책에서 정의하는 오티움은 '내 영혼에 기쁨을 주는 능동적 여가 활동'을 말한다.
그리고 이 오티움은 4가지의 일종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1) 자기 목적적, 즉 결과나 보상에 상관없이 그 활동 자체가 목적이 될 때. 그리고 2) 일상적, 매일 매주 혹은 최소 매달이라도 일상에서 즐기는 여가 활동이라 한다. 또한 3) 주도적인 면을 갖는데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스스로 주체가 되어 선택하고 즐기고 배우고 심화시켜나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4) 깊이가 있는 시간이다. 이는 결국 그 '오티움' 을 행하는 시간 속에서 '나'라는 개인의 삶이 어제 보다 나은 내일을 향한, 즉 성장 경험이 깊어지는 것을 말하며, 이는 결국 단편적인 즐거움을 넘어서 창조적 경험으로 나아가게 되는 힘을 불러일으켜 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5) 오티움은 긍정적 연쇄효과를 가지는데 결국 이것은 지루하고 단편적이고 때로 고통스러울 수 있는 인생의 무지막지한 시간 속에서라도 스스로 활기를 불러일으키는 행위를 말한다.
나를 잘 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변화 가능성에 주목하지 않는 이들이다. 이들이 알고 있는 것은 '과거의 나' 이거나 어느 한 면만 바라본 '평면의 나'에 불과하다. 우리는 자기를 공부해야 한다. 자기를 파헤치고 이해하고 실험해서 자기를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새롭게 재구성해야 한다. p.150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고 싶은 나의 요즘 소망은 좋은 마흔과 쉰, 그리고 예순을 보내는 일이다.
어느덧 '중년'의 시기를 준비하게 된 지금의 나는 흔히 중년의 '위기' 가 있다고 하는 그 '중년'이라는 시간을 잘 보내고만 싶어진다. 그리고 이런 소망을 현실에서 잘 이뤄내줄 수 있는 도구가 다름 아닌 '오티움' 이라고 믿는다.
중년의 위기를 잘 넘어서는 이들은 삶의 외부를 꾸미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삶의 내부를 가꾸는 데 치중한다. 즉 '꾸밈'에서 '가꿈'으로 삶의 방식이 바뀌는 것이다. p.81
껍데기에 불과한 육신과 물질을 채우고 꾸미는 데 바빠서
정신없이 살았을지 모르는 이십대와 삼십 대 초반을 지났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내면의 견고함과 영혼의 그릇을 채우는 시간과 좋은 노후와 죽음을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현재의 독서와 글쓰기, 사색과 참선, 절제와 겸손을 일상의 업들을 유지하는 시간 속에서도 꾸준히 갈고닦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고, 막연하지만 이 오티움들이 나이가 든 시간 속 언젠가에 보다 '창조적'이고 '성장' 된 모습의 여가와 하나의 '일' 로서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
지금, 아이들을 기관에 보내고 난 이후, 혼자 남겨진 시간의 생각과 행동이 이끄는,
이 시간에 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