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해주려는데 왜 자꾸 웃음이 나올까
샤덴프로이데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이야기가 보인다.
타인과 우리는 서로의 실수에서 기쁨과 안도감을 찾는다는 것이다.
- 위로해 주려는데 왜 자꾸 웃음이 나올까 -
'샤덴프로이데 심리'라는 것이 있단다. 남의 불행이나 고통에 대해서 느끼는 기쁨....
전문 용어는 처음 알았지만, 이 '감정' 상태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익숙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그토록 은밀히 숨기고 싶어 하는 인간 본성은 아닐까.
위로해주려는데 왜 자꾸 웃음이 나올까, 티파니 와트 스미스, 다산초당, 2020.07.01.
남의 무능력함에 느끼는 환희를 느껴보지 않은 이들이 있을까.
완벽한 누군가의 실수나 실패, 우리 혹은 나에게 '권력'이나 '힘' 있는 이들의 '부족함' 이 벗겨지는 순간. 혹은 경쟁적 라이벌이 비틀거리며 완패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웃지 않을 수 있을까? 완벽히 타인에게서 벗어나서 그들을 보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사회적 동물로 태어난 '인간'이라면 그럴 수 없으리라.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있는 환경이 쉽게 되지도 못하는 현실 아닐까....'샤덴프로이데' 라는 이 감정을 조금 더 건설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 이후의 '성장'을 하려는 노력을 의식적으로 행한다면, 그렇게 나쁜 본성만은 아닐 것이다.. 조금 짓궂긴 하지만.
우리는 샤덴프로이데라는 독일어를 차용했다. '샤덴' 은 피해나 손상을, 프로이데는 기쁨이나 즐거움을 의미한다. 즉 피해를 즐긴다는 뜻이다. 자신의 결점에 대해 생각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 안에는 우리의 인간다운 면모들이 많이 숨어 있다. 타인의 불운을 즐긴다고 하면 그저 잠깐 심술이 나는 정도라고 가볍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유심히 들여다보면, 우리 삶의 가장 은밀하면서도 중요한 부분들이 엿보일 것이다.
프로이트에게 쾌락이란 모든 욕구가 충족된 상태를 뜻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쾌락은 남들, 특히 자기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타인을 제압하고 이기려는 욕구가 충족될 때 찾아온다.
일터에서 가끔 '수치심'이나 개인의 자존감이나 자신감이 떨어지는 시절이 있었다.
모든 걸 '내 탓'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남 탓'을 했었던 어렸던 나였다. 그랬던 나는 일상의 수모를 견디게 만들어 주는 일종의 '심리 트릭' 이 바로 '샤덴프로이데' 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나를 적잖이 괴롭혔(?) 던, 내게 수치심과 모멸감을 은밀하게 안겨 주었던 직장 동료들의 '실수' 나 그들의 슬픔이나 비애, 고통을 발견했을 때, 그들도 나 같은 약할 수 있는 사람이고 일종의 그들의 고통으로부터, 나는 희열과 기쁨을 느꼈다...
저자의 말처럼, 이 '샤덴프로이데' 는 일상에서 약간의 우월감을 통해 앞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대담함을 줄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느낀다고 해서 나쁜 인간이 되는 건 아니라는 점에 큰 공감을 한다. 오히려 도덕적 경직성보다 훨씬 더 흥미롭고 진실된 감정이라는 것도. 이 샤덴프로이데 근저에 깔려진 '나의 진실된 감정' 은 결국 나조차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역설적으로 알려주며, 나의 감정과 마주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라고도...
그러나, 이것에 너무나 극도로 지나치면 스스로도 '해' 가 된다고 생각한다.
남의 승리에 진실된 축하를 해주지는 못할망정 시기나 질투의 감정에 휩싸이는 것만큼 소모적인 에너지 낭비도 없을 것이기에. 결국 타인의 삶에 너무나 큰 관심을 두기 보다 '나'의 삶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는 편이 조금 더 나을 테다... 말미에 남는 생각은 그런 것들. 하나뿐인 이 생을 잘 살아갈 생각만 집중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