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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ul 22. 2020

빗방울

이젠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말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고통이 와도, 언젠가는, 설사 조금 오래 걸려도, 그것이 지나갈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




'정작 울고 싶은 사람은 나니까 울지 마...!'라고.

나는 길에서 부끄러움도 잊어버린 채, 숨기지 않은 채, 솔직한 게 너무 심하게 드러나버리고 마는 순간을 연출해 버리고 말았다. 비는 왔고 외부 기관엔 보내지 못했고 그러므로 인해 하루 종일 온종일 또다시..... 집이라는 감옥 안에서 반복되는 변함없는 일과를 수행하는 물리적 노동 자체에는, 이제는 고됨도 마비가 오는 듯 그리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가장 '나'라는 개인을 격노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는 다름 아닌 너의 '투정'이다. 종잡을 수 없는 울부짖음... 그 울부짖음에 같이 울고 싶은 마음...



자신의 감정과 욕구만이 온 세상의 기준으로 모든 욕망을 해소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야말로 소통이 더럽게도 잘 되지 못하는 5세 아들과의 사투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쌍둥이 둘 중 한 명만 격한 고통을 선사하며 한 명은 너무나도 유순해서 그 순조로움과 어린아이의 엄청난 양보의 미덕을 볼 때마다... 나는 극한 양쪽의 감정을 모두 경험해버리고 만다. 자꾸만 '달라고 원하는' 누군가에게는 분노에 겨운 짐승 같은 악마와, 한편으론 '주려고' 하는 누군가에겐 해 준 것 없이 거저 키우는 것 같아서 비교적 미안한, 죄스러운 인간의 모습이라니.



언제 반복을 멈출까 싶지만 멈추면 파도가 아니지 싶기도 했다...



사라질까 봐 그것이 못내 두려워서 시종일관 누군가의 시선에서 떨어질 수 없음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 사랑이 부담이고 견딜 수 없을 때가 있다. 개인의 한계를 짓밟아 그 '한계'라는 것의 갱신을 허해야 살 수 있는 삶. 얼마나 더 큰 포용력이 있어야 되는 것인지. 매일 나오는 4인의 빨랫감들을 널고, 계절별로 이불을 개키고 옷장과 신발장 청소를 하는 것, 아침을 먹은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자마자 간식을 챙겨야 하고, 그 간식을 챙기자마자 다시 점심 끼니를 생각해야 하는 것, 점심이 지나서 조금 쉴 요량으로 식탁에 앉아서 읽다만 책을 읽으려 할 즈음에도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장난감이 즐비한 거실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엉덩이를 떼고 조금이라도 정리를 하는 것, 찐득한 간식을 바닥에 다 묻힌 그 자국을 지우기 위해 허리를 숙이고 걸레질을 하고 있을 즈음 등을 타고 올라오는 그 묵직한 존재의 무거움 덕분에.



울 사람은 그래서 네가 아니라 나라며

나는 속으로 울부짖다 그렇게 눈물을 곧잘 흘린다. 비가 오던 오후 1시 20분경. 도저히 좀이 쑤셔 집에 있을 수 없었던 둘째의 요청으로 인해, 호기롭게 핑크퐁 투명우산을 씌운 채 한 손엔 우산과 어깨엔 장바구니와 한 손엔 아이의 손을 잡고 그 아이는 다른 아이의 손을 잡고 그렇게 10분 거리의 동네를 여기저기 쑤시고 돌아다닌 그 섬광 같은 짧은 시간 조차도. 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시종일관 어깨와 손과 눈과 온몸에 힘을 주고 돌아다녀야 했다.



비를 좋아하지만... 짓궂다...



의식적인 노력 없이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있는 힘껏 잡고 있는 끈을 탁 하고 일순간 모두 놓아버리고 싶을 만큼의 처절함... 내면에서 일렁거리는 알 수 없는 고통을 잠재우는 대신 나는 아이에게 비가 오면 왜 나가야 하지 않아야 하는지에 대해, 바라는 데로만 세상은 흐르지 않는 것에 대해, 따갑고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지나가는 행인 1,2,3들이 보았을 땐 아이가 불쌍한 듯했을 장면, 모든 잘못은 어미에게 있는 그 장면... 방백 처리당하는 개인의 침울한 사투, 외로움, 그리고 분노...




가끔 우리는 이게 절벽인 줄 알면서도 그 위에 서서 뛰어내리고 싶어 한다고 당신은 제게 말했습니다.

가끔 우리는 이것이 수렁인 줄 알면서도 눈 말갛게 뜬 채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고.

가끔 머리로 안다는 것이, 또렷하게 알고 있다는 것이 이렇게 속수무책일 때가 있다고,

또 이렇게 하면 그와 끝장이 나는 줄 알면서도 우리는 마지막 말을 하고야 만다고


그대는 제게 말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절망적으로 만들까요?


-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




핸드폰을 켜고 그이에게 말을 건네려다 말을 속으로 먹고 만다.

그리곤 애꿎은 '휴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뿐이었다. 극성수기의 휴가 계획에 대해. 연신 비 소식이 있을 예정인 그 '휴가'에 대해서. 누구들에겐 휴가가 누구에겐 여전히 몸을 굴리고 정신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일종의 영업일이라는 걸 묵시적으로 아는 그이에게.



- 휴가 때 어디 가지 말자. 자신 없어...

- 무슨 일 있어?

- 없을 리는 없지. 알잖아. 평일 가정보육. 새벽 6시부터 저녁 10시까지. 무보수 가정부 누구들의 시녀. 성질 더러운 엄마. 여전히 죽지 못해 사는 더럽게 못난 여자.

- 진정하시라.

- 미안해. 일 해...




울었다. 빗방울이 창문에 달리는 것처럼, 눈가엔 이미 물이 고여 있었다.

이 문장을 다시 하지 않고 싶은 나와 여전히 할 수밖에 없는 내가 충돌하는 순간. 흐르는 시간... 온몸에서 에너지와 맥이 빠져 버리기 일쑤인 오후 2시 21분. 핸드폰을 열어 보지 못한 문자와 알림 들을 확인한다. 명랑한 스팸성 광고 메시지들 속의 그 명랑하고 밝음을 냉랭하게 쳐다보다 잠시 아이들이 보고 있는 TV에 눈을 돌린다. 더욱 밝고 명랑한 장면들을 보고도 웃음은 나지 않는다. 나는 괴물이 되어 버리는 중인지 의심했다. 미소를 잃어버린 사람 괴물만은 되지 않기를 바랐다. 비가 영원히 내리지 않는다는 그 진실을 믿으며, 바라고 또 바랐다...



비는 영원히 내리지 않고 줄곧 어둠만 있는 건 아니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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