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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Oct 28. 2017

#7. 당신과 함께, 아주 가까이

잠깐 가까이 와 줄래요. 자세히 보고 싶어요 

 엄마 다음으로 날 생각해 주는 누군가 있다는 건 내겐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흔히 사람의 세계에선 베프라고 부르는 절친에 가까운 그녀. 현지를 그럼에도 절친이라 부를 수 없는 이유는, 아직 나의 정체를 밝히지 않아서 말할 수 없는 죄책감 정도랄까. 언젠가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한다. 항상 그 기회를 그저 기다리고 있을 뿐. 작고 큰 고민들을 교복을 입었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게 된 사이. 듣고 있다가 한 두 마디 뱉는 사이 다성 발언. 솔직하지만 따뜻한 위로를 줄 줄 아는 그녀는 유머러스 한 친구다. 그렇지만 때론 아주 단호하다. 무서울 정도로. 


고헤 라. 
현지야... 나 모르겠어. 
아니 너 알아. 지금 그 마음 
아니 몰라.
모르지 않은 사람이 자꾸 생각하진 않을 수 없다. 
....


등짝을 맞고도 나는 정신 차리지 못했던 걸까. 


고마 헤라! 고헤 라 
뭐야... 풉. 웃겨 현지야..
웃으라고 쫌. 너 나한테 그 인간 말하고 있을 땐 아무 표정이 없어. 알아? 그저 멍하니 다른 곳 바라보잖아
아 내가 그랬나..
빠져들고 있단 거잖아. 그거. 생각에 자꾸 잠긴다는 거야
아..


 현지 말이 맞았다. 


누군가를 떠올릴 때, 잠시 시간이 중지된 듯한,
생각에 잠기고 빠져들게 되면,
그건 그 사람을 정말 깊게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민을 떠올리면 그랬다. 그도 나를 떠올리면 그래 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그때서부터 생겨난 걸지 모르겠다. 

 그 생각에 난 서재에서 잠든 그를 내내 지켜봤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 전부. 내쉬는 숨결마저 그렇게 그냥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서재 방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아내였다. 


일어나. 지금 새벽 5시야. 나가봐야 해 나. 주말 첫 타임이야 나 이번 주. 
아.... 벌써 시간이... 흐음.. 몇 시...
야옹 (악 1시간 남았다. 새벽 6시... 나 어서 데리고 나가줘요 언니..) 
어머. 냥이가 여기서 있었구나 이리와 쭈쭈. 누나 야랑 나갈까 
야... 옹 (언니예요 누나가 아니라.) 


나는 주저 없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향수 냄새가 난다. 뭔가 머리가 어지럽다. 아무튼 그녀가 어서 나를 데리고 나가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거 봐 하여튼. 남자들은 예쁜 건 알아가지고. 요 녀석도 내가 좋대 
여자 고양이일 걸 아마?
어떻게 알아. 작가님이 그래?
아마 그랬던 거 같은데... 뭐 중요하진 않고. 기억 잘 안나 
해에 아쉬운걸.
지금 나가? 아 참 이 녀석, 데리고 나가 달랬어. 이른 아침 데리러 올 거라고 
너무 이른 거 아냐? 아침에 자기가 진우 찾으러 가면서 같이 가 그냥 
야옹.. 야옹! (헉 안.. 안돼요 망했...안되요) 
거봐 애도 나가기 싫어하잖아 
아무튼 약속은 지켜야 하니깐 데리고 나가 나갈 때. 
야옹..(역시.. 하 다행이다) 
아 귀찮아. 아무튼 알겠어. 특별히 좋아하는 동물이니깐 내가 봐주지 뭐 근데 너무 아쉬운걸 같이 좀 있으면 좋은데
퇴근하고 보면 되잖아. 어젠 수현이 네가 너무 늦게 왔어 
알겠어. 나 그럼 나간다. 


 방문을 여는 순간, 정민은 아무렇지 않게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안방으로 들어가 거울을 봤다. 널브러져 있는 거실의 장난감들과 안방에는 정리되지 않은 담요 몇 가지들과 옷가지들이 내팽개쳐 있었다. 갓 구운 식빵 냄새가 부엌에서 진동을 해 냈다. 코를 킁킁 거리며 나는 순간 본능적으로 냉장고와 식탁 쪽을 헤매기 시작했다. 먹다 남은 우유가 나의 발놀림 새 때문에 식탁 위에 흘러내렸다. 나는 우유를 핥아먹기 시작했다. 


배 고팠구나... 그래 이거 먹고 나가 
나 지금 나가야 해. 어서 줘 고양이 
아... 그럼 이 우유 챙겨가 애 배고파 보여
야옹...(다정하네요) 
헤에. 언제부터 고양이를 이렇게 좋아했대. 알겠어. 나 간다. 전화할게 
그래 다녀와 


그녀가 나를 데리고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내내 뭔가 털이 쭈삣 서는 게, 겨울이 거의 다가옴이 느껴지는 찬 아침 공기였다. 이렇게 차진 않았었는데, 뭔가 많이 시린 느낌이다. 


냥이야, 누나가 다녀와서 많이 사랑해 줄게. 호호 귀여운 것 
야옹...(언니예요. 근데 언니 안 추워요 치마가 짧아요) 
오늘은 데이트가 있는 날이라 추워도 어쩔 수 없단다 
.....! 
저녁엔 들어올 거야. 그니깐 그때 보자 귀여운 것 


 그녀가 날 놀이터에 내버려 두고 사라진다. 저 멀리 검은색 승합차가 다가온다. 큰 키에 건장한 남자 사람 동물 한 명이 차에서 내린다. 그녀는 잠시 서성거리다가 차에 탔다. 둘은 사라진다. 


고헤 라 
아.... 유키야 


빨리 가자 기다리고 있었어 뭐야 지금 20분밖에 안 남았어. 차 가지고 왔으니깐 일단 타자 
응... 근데 유키야 나 지금 이상한 거 봤어
나도 봤어. 일단 집으로 얼른가 너 그러다가 알몸으로 놀이터에 있는 수가 있어 
아..
가자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데워 마셨다. 역시 나가면 개고생 아니 고양이 고생이다. 더군다나 정신을 너무 많이 쏟은 탓일까. 난 그만 잠에 들었다. 


흐음... 몇 시쯤이나 됐지.
오후 1시야 바보야 
아 유키야... 왔어
온 게 아니라 아까부터 있었다. 바보야. 어머니는 장 보러 잠깐 나가셨어. 나 맛있는 거 해 주신다고
훗... 그래 밥 먹고 가. 아 머리 아프다 갑자기. 
그건 그렇고.. 어땠냐 
뭐가
그 인간 집에서 첫날밤을 보낸 게 
첫날... 밤이었나
그럼 뭐냐 두 번 간 건 아니었을 거 아냐 
말장난 하기는.. 작가님이 어련하시겠어. 
어땠어. 
음.. 모르겠어. 괜히 갔나 싶어. 
잘 살아? 
..... 아니. 못 사는 거 같아 
거기 나름 부촌이야 고헤 라. 평수도 꽤 넓은 아파트로 알고 있는데. 못 살 리가 있냐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뭐야 그럼 제대로 좀 말해봐.
사랑.... 이 없는 것 같아. 
무슨 소리야 
내가 상상했던, 그런 따뜻한 느낌이 없었어. 음... 언니는 되게 예뻤어.
아내에 대해 들어본 적은 없지만 아끼는 듯했는데 아... 모르겠어. 아무튼. 
인간 세상에서는 말이야. 결혼하면 다 변해. 고헤 라. 알아?
내가 결혼을 안 해봐서 모르겠어. 근데 아무튼. 아내는 예뻤지만 그와 어울리는 느낌의 여자가 아니었어 
네가 그걸 함부로 판단하면 곤란하지. 네가 뭐라고
그러게... 내가 뭐라고... 한 번으로 됐어. 이젠 안 들어갈래 
잘 생각했어. 
아.. 서울랜드에 간다고 했어. 동물원... 진우가 좋아한대 
진우가 누구야. 아.. 꼬맹이? 
응. 할머니네 가 있다고 했었어. 자주 가는 듯 보였어.
일 하는 부부니깐 그랬겠지
응 그랬겠지... 근데 아 맞다. 아까 회사 나간다고 했었던 거...
너 뻔하면 모르냐?
응? 
회사 나가는 거 아니잖아, 데이트 간다고 했다면서, 
.... 그랬어.
사람 동물은 말이야. 애초에 믿을 만한 게 못돼. 잘 새겨둬.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 걸까?
낸들 아냐. 아무튼 그 정민이라는 새끼 지지리도 못났다. 나 같음 진작 눈치챘을 텐데. 그걸 모르냐 
.... 알 수도 있지 않을까? 
뭐?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걸 수도 있잖아. 사랑하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야 고헤라 뭔 엉뚱한 소리냐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냥. 그 사람. 속이 꽤 깊은 사람 같았거든. 
휴... 모르겠다. 아무튼. 너 오늘 뭐 할 건데
유키야.... 나 부탁이 있어 
뭐가 또!! 
가자.... 나랑.  동물원
야. 고헤라. 진짜 고마헤라 
풉... 현지도 그 말했었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냐? 갠 누구야 또 
있어. 진짜 사람. 내 친구.. 유키야 가자. 나 진우를 만나보고 싶어. 그냥 딱 한 번이야. 그냥 궁금해서 그래
아니 도대체 왜 궁금한 건데. 네가 그 꼬맹이 만나서 뭘 어쩌개. 고백이라도 할 거야? 네 아빠 좋아한다고? 
아......
너 지금 좋아하는 거잖아. 그 인간. 
.... 좋아... 한다고?
그게 아님 지금 이 모든 행동을 어떻게 설명할 건데. 정신 차려 헤라야. 너 왜 그래 
유키야. 나 정신 있어. 멀쩡해. 정신은 이미 차리고 있어. 
고헤 라! 
자꾸 밀어붙이지 마. 나도 정신 제대로 있어.!


 갑자기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른다. 뭔가 변명이든 뭐든 입에서 나오려고 하는 말들을 죄다 쏟아내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이미 감정은 입 밖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나도 모르게. 무슨 말을 내뱉는 건지 알지 못한 채 그렇게 마음이 입으로 흘러나온다.  


... 진심이야?
모르겠어. 모르겠어서 그 사람 집에 찾아간 거야. 어떻게 사는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모르는 시간에 어떤 일상을 보내는 사람인지 궁금해서. 그래서 갔을 뿐이라고...! 
진짜구나. 너..
가서 봤어. 그 사람 사는 모습. 집만 보고도 알 수 있어. 그냥 어질러진 집이 그 사람의 어질러진 마음 같아.
그래서 슬퍼. 더군다나 아내는 왜 또 그렇게 예쁜 거야. 질투 나잖아. 일도 한다잖아. 돈도 잘 번다잖아.
더군다나... 그 사람의 아이도 있어. 그리고 남편은 바로 다름 아닌 정민이야. 다름 아닌 그 사람의 아내라고.!!!
헤라야..
그 사람의 아내로 살잖아. 매일 마주하잖아. 같이 자잖아. 그 여자 그렇잖아.
아주 잠깐이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둘이 안았어. 근데 내가 보는 그땐 뿌리쳤었어. 뭐가 힘든진 모르겠지만. 
그 사람 슬퍼 보였어. 지친다고 했어. 왜 그렇게 사는데. 잘 살면 이렇게 슬프지도 마음이 더 가지도 않아. 
좀 잘 지내는 모습이라도 보이지 나쁜 새끼. 자꾸 생각나게 만들잖아. 그리고 잘 살아도.. 사실은 자꾸 생각나
그게 문제야. 그게 문제라고....! 
그만하자.
아......... 
준비하고 나와. 가게. 동물원. 시간 별로 없다. 도착하면 2시야. 가도 만날 수 있단 보장 못해. 동물원 넓어
미안해 유키야... 미안 
가. 난 너 안다 고헤 라.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 가만있다가도 할 말은 하는 여자애. 또 그 하는 말이 남다른 애  
유키야
후회하지 마 대신. 어떤 일이 벌어져도 난 몰라. 니 지금 그 감정. 제대로 된 감정인지 아닌지는 네가 판단해 
응..
명심해. 단 그 책임은 모두 네가 지는 거야. 선택은 네가 하는 거야 남들이 뭐라 해도 알겠어? 
알아. 누가 뭐라 하든 내가 해. 남들이 뭐라 하든... 근데... 유키야. 우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어 아직..
시작하려고 하고 있잖아 
.... 
아무튼 가자. 준비하고 나와 


 유키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단어가 내 마음을 찔렀다

 듣고 싶지 않은 현실을 들어버린 느낌이랄까. 그건 마치 들키고 싶지 않은 나의 고양 이 몸을 사람에게 들켜버린 듯한. 그래서 어디라도 숨어버리고, 아니 이 세상에서 없어지고 싶은 느낌의 말이었다. 좋아한다는 게 이렇게 미안하고 부정 어려야 하는 마음이 될 수 있다는 걸, 여태껏 영화나 드라마, 사람 동물들의 소설 속의 사랑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저 투명하고 예쁘기만 한 사랑의 느낌은 분명 아닌 걸 그때 깨달았다. 다만 애잔하고 그리운 느낌. 안타깝지만 절실한 마음.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보고 싶은 마음뿐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도착하니 오후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없는 토요일 오후 2시의 동물원이었다. 이렇게 사람이 없을 수 있나 싶었는데 차를 타고 오는 내내 비가 와서 그렇다는 것조차, 의식에서 우선순위에 밀린 지 오래였다. 비가 살짝 내리는 탓이라고. 


어떻게 찾을래 
굳이 찾지 않아도, 그냥 같은 공간에 있다는 거 만으로 만족할래.. 비도 오고.. 사람은 없는데 너무 넓다 
벌써 포기하는 거야? 고헤 라 은근 빠르네 포기도? 
포기가 아니라... 그냥 마주하면 무슨 말하여야 할까 모르겠어서. 너무 반가워서 그냥 웃을 거 같아 
아...... 젠장. 뭐냐 이 운명 같은 장난질은. 


뭐? 
저기 저 인간 아냐. 유모차 끌고 그 옆에 꼬맹이 한 명 손 붙잡고 오는데. 
아...
나, 가? 말아? 
아... 
전화해. 근처 있을 테니깐.
...

머릿속이 하얘졌다. 근데 그 당황하고 무안함보다 더 놀라운 건 그의 활짝 웃는 미소였다. 


어...? 혹시 내가 아는 헤라 씨?
아... 네. 안녕... 하세요. 
여기서 보네요 데이트 왔어요? 
아..... 네 뭐 
남자 친구 없다고 하지 않았나?
아빠아~ 빠빠 


 진우는 네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작은 체구의 남자아이였다. 아빠와 비슷한 색깔의 베이지색 면바지와, 후드티를 입고 목에는 스카프빕을 한, 생머리의 일자 앞머리가 귀여운 아이였다. 


진우야 인사해, 아빠 아는 회사 이모. 미안해요 헤라 씨. 오늘만 이모로 할까요 
아 네 괜찮습니다 
집에 도우미 아주머니를 좋아해요 진우가.
보통 이모님이라고 부르는데 진우한테 이모들은 다 좋은 사람이니깐
네. 저도 진우한테 좋은 사람...으로 하시죠 그럼 
하하 역시 센스 있네 헤라 씨. 
근데 혼자 오신 거예요 (알고 있지만 물어봐서 미안해요.) 
네 뭐 주말 근무가 있는 바쁜 아내 둔 덕이죠 
..... 네. (표정이 좋지 않아 보여요 어디 아픈가요) 
하 근데 내가 감기 기운이 있어서 이번 주는 좀 버겁네요 아이 보는 게. 
아이 잘 돌봐주시나 봐요 
그러게. 내가 거의 육아를 하는 편인 거 같아 허허. 퍼펙트맨인가
슈퍼맨이죠 
하하 그러게 슈퍼맨
아빠아~~~
진우야 가고 싶은데 있어? 이모 야랑 같이 가볼까? 사실 이모야 동물원 처음이야...
아 헤라 씨 동물원 처음이에요? 
네 처음이에요 그래서 와 보고 싶었는데. 진짜 와 보고 싶은 곳에 차장님이 계셔서 더... 처음이에요 모든 게 
하하 그 말 뭔가 의미심장한데? 
언제 가세요 집에? 
우린 1시간 전에 와서 거의 반은 돌아다녔어요 나머진 코끼리 보고 리프트 타는 정도? 
저 코끼리... 정말 본 적 없어요 같이 보러 가도 돼요?
그래요 근데 데이트 온 거 정말 아니었나? 내가 껴도 되나? 우리 진우랑?
제가 껴도 돼요? 차장님의 진우랑? 
하하. 헤라 씨 의외네 자꾸. 원래 이렇게 말 재미있게 했었나. 유쾌한데. 
저 재미없어요 오히려 진우가 재미있어야 하지 않나요 
하하하. 재밌어 역시. 아무튼 갑시다. 코끼리. 그래요 오늘 이왕 이렇게 된 거 하루 즐기고 놉시다 


 그의 표정이 밝다. 화사하고 따뜻한 느낌이다. 진우는 가는 내내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었다. 아빠를 닮아서 그런지 약간 마른 몸매의 잘생기고 귀여운 외모의 아이다. 입에 침이 조금 고여있어서, 자꾸 그가 침을 닦아주며 걸었다. 


와 코끼리다....! 
헤라 씨 코끼리 좋아해요? 
네. 저 처음 봐요 정말. 와 너무 예쁘고 근사해요 
하하 재밌네. 예쁘다고요? 
끼끼..! 코끼~! 
응 그래 진우 아가. 저거 코끼리래 코끼리 우와 코끼 
코끼 코끼 아빠아 
하하 내가 지금 애 둘 데리고 온 듯한 느낌이네. 그래 진우야 저거 코끼리. 이모도 코끼리 처음 본댄다 훗 
우와 되게 크다 
코끼 코끼 
헤라씨 뭐 먹을래요 핫도그 사다줄께. 비가 좀 그쳤네. 뭐 좀 먹읍시다 .
아..도시락 같은거 안 가져 오셨어요? 
엥? 하하 헤라씨는 이해 못할걸. 결혼하고 애 낳으면 정신 없어요 더군다나 우린..도시락..그러게 보통은 그러죠
아..죄송해요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아녜요. 보통 도시락 싸 오기도 하지. 근데 오늘은 우린 보통 없어요 도시락 같은거 그냥 사 먹는게 편하니깐
네... 아 제가 사올께요 제가 사드릴께요. 진우 만난 기념으로 
아니아니 내가 미안해서 그래. 같이 놀아주고 있는데. 한결 편하고 즐거워요. 내가 살께요 
아... 
잠깐 기다려요 여기서 
같이 가요 
아..그럴까? 


매점까지 걸어가는 내내 이상하게 그가 나를 힐끗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잠깐 핫도그를 사러 간 사이에 난 진우와 말을 하기 시작했다. 대화가 통하면 정말 좋겠지만 어찌 보면 일방적인 나의 첫 마음을 나눈 사이가 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진우는 뭐 좋아해? 
코끼 빠빠 
와 진우 말 다 알아듣는구나. 아빠 닮아서 똑똑하구나 
아 정말 귀엽다 우리 진우 
우이 우이 
아... 응 진우야 우리. 누나는 우리라는 말 참 좋아해 우리 진우
웅 
미안해 진우야. 누나가 여기 찾아와서. 네 눈에 띄여서. 그리고 아빠 눈에 띄여서 정말 많이 미안해 
네가 보고 싶었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모습으로 자라고 있는지 그냥 궁금해서 
그런 마음 알까 진우는. 신경쓰이는 누군가가 생기면 그 사람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 
그래서 그 일상에 누구랑 어떤 대화를 나누고 어떤 걸 보고 먹고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그런 마음 
빠빠 
헤라씨 핫도그. 뭐 좋아할 지 몰라서 내 취향으로 케첩을 발라 버렸네 
네 저 케첩 좋아해요 설탕만 아니면 되요 
아 설탕 싫어해요? 
지난번에 케이크 좋아한다고 했었던 거 같은데
디저트는 좋아하지만 핫도그에 설탕은 싫어요 
오 나랑 똑같네. 또 뭐 좋아해요? 
음.... 녹차맛 그린티라떼 좋아해요 
아..지난번에 스타벅스갔을때. 기억나요 
아..기억하세요 그날? 
그럼..기억하지. 못할 리가 있나..또 뭐 좋아해요?
민트초코칩 아이스크림 좋아해요 
어??신기하다. 나 민트초코칩 아이스크림만 먹는데? 
아..그거 치약맛 나서 아무나 쉽게 못 좋아하는데
아 진짜 이거 뭐죠? 하하 헤라씨 양파같은 여자네. 깔수록 뭐가 나와 당신. 또 뭐 좋아해요?하하 재밌네 
아..재밌으세요? 


 그가 웃는다. 마음이 참 좋다. 설레고 기분좋고 따뜻해지는 느낌이다. 그래 이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정도 뿐이라고 이 정도도 더이상 욕심 부리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순간이다. 


재밌죠. 동물원에서 만난것도 신기한데. 
그러게요. 그것도 신기한데 저희는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네요. 그것도 서로 모르는 좋아하는 것들을..
아...그런가. 
빠빠 
어 진우야 핫도그 맛있지? 이모야가 민트초코칩을 좋아한대. 아빠랑 진우가 그거 되게 좋아하는데. 신기하지?
우리 진우도 민트 초코칩 좋아하는구나. 이모야도 그거 아주 좋아해요. 헤헤 


그때였다. 진우가 내게 다가와 무릎에 앉으려 했다. 


아 진우야 그러면 안되 이모야가 놀라요 헤라씨 괜찮겠어요? 무거운데...
괜찮아요. 저. 진우랑 이렇게 앉아 있을께요. 
아...고마워요 보기 드물게 싹싹한 편이네 나이답지 않게
나이가 뭐 나이인가요 숫자에 불과하지... 
하...그러게. 숫자였음 좋겠네...
차장님도 젊으세요 아직. 보기 드물게 
하하 . 다 늙은 나에게 무슨 그런
아니예요 보기에도 젊으신 건 맞지만, 그냥 마음 씀씀이나 후배 대하시는 거.일 처리 하실 때. 다 젊으세요. 
고맙네. 고마워요 헤라씨...오늘 내가 힐링하는 기분인걸? 
제가 감사해요 저 코끼리 진짜 처음 봤어요 헤헷
헤라씨.
네?
귀여워요 헤라씨. 
네?
하하. 귀엽다구.예쁘고
아..... 네. 새삼 뭐...
말도 예쁘게 하는데 마음도 예쁘고. 뭐 얼굴 예쁜 사람이 그렇게 싹싹하기까지 하면 어쩌라고 참 
아...
다 먹었음 일어날까요? 리프트 타러 갑시다. 그거 재밌어요 
네. 저 그것도 사실 처음이예요 
뭐 다 처음이래 헤라씨는 처음 하는 걸 나랑 하게 되다니. 억울한거 아냐? 
억울해요... (네. 다 억울해요. 같이 이제서야 하게 되서 너무 억울해요) 
갑시다. 


 리프트에 올라탄 순간, 잠시 어딘지 모르게 시원하게 빵 하고 뚫린 기분이었다. 왼쪽에는 내가 앉았고 그 옆에 진우가, 그리고 그 옆에 자리한 그사람은 오른쪽 팔은 자유로운 바람을 만끽하려는 듯 나란히 펼쳐있었고 왼쪽 손은 진우의 어깨에 닿아있어서, 조금만 더 뻗으면 나의 어깨에도 닿을 법한 가까운 거리를 조심하는 듯 했다. 


어때요 리프트
으아....좀 무섭기도 . 근데 진우는 아무렇지 않네요? 어? 진우야...! 
잠들려고 해요 이녀석. 잠들었네. 지금 ... 하도 많이 타봐서 진우야 너 자는거지?
리프트에서 잠든 아가라니..원래 이 나이에 보통 그런..가요? 
하하 아이를 키워보면 알 겁니다. 이 녀석 엄청 오래 걸어 다녔으니까. 바로 잠들 줄 알았어요 
아..그럼 리프트 타지 마시자고 하지 그러셨어요 아이 힘들게.
내가 타고 싶었어요 헤라씨랑
네?


그가 왼쪽 팔을 쭉 뻗었다. 어깨에 닿고 만 상태에서 나를 토닥여 주었다


헤라씨 고마워요 오늘 많이 애써줘서. 
아니예요 제가 정말 감사하죠 코끼리 처음 봤거든요 
그래요.. 
네..그래요 
헤라씨. 내가 좀 무서워지려고 하네 
네?
빠져들까봐 무섭습니다. 
.....저도
.....?
무섭습니다. 전 이미 빠져든 듯 합니다. 
......! 
건드리지 않을 거예요. 걱정 마세요. 다만 궁금한 마음은 이제 알아서 더이상 욕심 안 부릴 거예요. 
뭐가...궁금했죠? 
어떻게 사시는 지 궁금했고 어떤 일상을 보내시는 지 궁금했어요 
아.... 


리프트가 끝났다.


유모차좀 끌고 주차장까지 가 줄래요? 난 진우 앉고 가야 하니깐. 
아 네. 진우 안 꺠네요 신기하다
이 녀석 한번 자면 내리 자는 녀석이라서... 벌써 시간도 이렇게 됬네 하... 5시네 벌써 
비가 와서 그런지 빨리 어두워졌어요 
헤라씨 데려다줄께요 
네.. 아니. 괜찮은데 
차에 타요 내가 안 괜찮아요 저녁 같이 먹고 싶은데 미안하네.. 애가 잠들어서 
전혀. 전 괜찮아요 

 

 유모차를 트렁크에 넣는 손놀림이 재빨랐다. 그는 이런 일에 꽤 익숙한 사람인 듯 했다. 뒷좌석엔 말로만 듣던 아이용 카시트가 있었다. 벨트를 채우는 시간까지도 진우는 일어날 기색이 없었다. 다리는 이미 축 쳐지고 목은 반쯤 뒤로 제껴진 상태였다. 


아이가 불편할 거 같은데...운동화 좀 벗겨 놔도 괜찮을까요? 
아..헤라씨 의외네 엄마같은 구석이 있네요?
아니..전..그냥 불편할 거 같아서


 뒷 좌석에 나란히 탑승한 나는 아이의 운동화를 벗겼다. 그 작은 발과 약간 꼼지락 대는 발가락이 너무 귀여워서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거의 다 와가네요 이 쯤이었죠 그때도 
아...네...이쯤이었죠 아마. 
그때가 마지막 일 줄 알았는데 헤라씨 보는 거.... 
그랬죠 그날 저희들은..
그때 잘 들어갔죠? 
네..
이번에도 잘 들어가요 헤라씨. 
그럼요. 차장님도 잘 들어가세요


 뒷좌석에서 내려서 문을 닫으려는데, 그가 같이 따라 내렸다. 심장이 쿵쾅질 해 대기 시작했다. 설마 아닐거라고. 또 안을 생각이라면 난 이제 그만 그에게서 도망쳐야 한다고 내 멋대로 유치한 생각을 해대기 시작할 즘 마음이 입에서 새어 나와 버렸다. 아차 싶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잠깐, 가까이 와 줄래요 
네...?
자세히 보고 싶어요. 
아...


 그가 내게 다가왔다. 그의 눈이 어느새 나의 아랫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사람과 함께 아주 가까이. 이미 우리 둘은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가까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그렇게 가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둘은 서로의 메말라가는 그 입술을 넌지시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마음이 들킨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며 애써 타오르는 감정을 추스리는 우리 두 사람은 어른이었다. 


 어른이란 간절히 원하는 어떤것을 때론 그렇지 않은 것 처럼
마냥 숨길줄 아는, 아주 바보 같은 존재다.


꽃말때문일거라는 애석한 변명을 해 봤다. Kiss me 라는 목소리가 들려서였다고. 


 사랑은 빠져버리는 것이다. 그것도 한 순간에 나도 모르게. 

 고양이 여자인 내게 사람동물과의 사랑은 서툰 것이고, 바보가 되어 유치해지는 것이고, 그 사람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는 것이고, 할 수 있을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는 것이고, 마침내는 이기적으로 욕심을 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시간이란 이제 두 개로 나뉘었다.
그가 곁에 있는 시간과 곁에 없는 시간, 단 둘 뿐이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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