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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Nov 02. 2017

#10. 종이의 고향

나와 같다면, 따라와 줄래요. 

 고양이들의 세계에서도 공간이 주는 위로는 꽤 큰 영향을 차지하곤 한다. 

 가령 스산한 가을바람이 부는 새벽녘에 공원을 거닐 때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더운 바람이 부는 여름에 걷는 공원보다 훨씬 더 사랑스럽다. 계속 정처 없이 목적 없이 담을 타거나 벤치에 앉아서 달빛의 청명함을 바라보고만 싶어 진다. 공간은 그런 큰 힘이 있다. 

 

 지혜의 숲에 도착했을 때도 비슷한, 아니 더 커다란 무언의 떨림이 느껴진다. 

 정말 좋아하는 가을바람의 차가움과 따뜻함 사이의 온도, 바깥공기가 너무 좋아서 그대로 바람을 쐬고만 싶어 지는 저녁 바람. 공기의 향기. 이 모든 것들이 사람 동물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정 꿈인지 생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느낌이다. 더군다나 온몸을 둘러싼 털들이 12시가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금방 드러날 것만 같은 알 수 없는 기시감만이 내 몸을 감싼다. 


와... 바깥에서 봤을 땐 몰랐는데 우리나라에도 이런 곳이 있었네요. 
마음에 드세요? 
예상 밖인데. 정말 좋아요. 아....
다행이에요..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 
글을 쓰는 친구 따라와봤는데, 저도 처음 들어와 보곤 반한 곳이에요. 
반할 만하네.. 탁 트여서 좋네 
여기, 재밌는 곳들이 꽤 많아요. 

 

 벽 전체가 원목 나무로 잘 짜인 책장으로 가득 차여 있다. 꽤 높은 천장이었음에도, 바닥부터 시작해서 사 면이 온통 책의 공간으로 둘러 싸인 곳. 이름 그대로 책 속의 지혜들이 가득 담긴 숲에 와 있는 듯한 느낌. 이 느낌을 그도 함께 비슷하게 전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와 비슷한 마음이라면. 더더욱. 


책이 머무는 곳에 사람이 온 듯하군요 
아...


 유키와 처음 와봤을 때 한 말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똑같을 수 있을까. 나의 말을 누군가의 입으로 고스란히 듣는 기분이 이렇게 그리울 수 있다니.


유키야 여기 정말 근사해 
헤라 네가 좋아할 거 같았어. 신기하지. 달빛 아래 벤치보다 훨씬 더 멋지지 않아? 
응.. 책이 머무는 곳에 내가 온 듯 해. 


자꾸만 모든 게 커져만 가려한다.
 같은 공간, 다른 시간, 그리고 이 사람과 함께 왔을 뿐인데. 
딱 그뿐인데..


헤라 씨? 무슨 생각 해요
아.. 아니에요. 저도 그 생각했어요. 
어떤?
책이 머무는 곳에 제가 있어요.. 저도 그렇게 느꼈었거든요 
아... 


 그가 웃었다. 미간의 주름조차 편안해 보인다. 말없이 그렇게 편안한 미소다. 평범하게 지나쳐 버렸을 사람 동물의 손짓 발짓은, 특정 누군가로 하여금 이젠 신경 쓰이고 거슬리는 것이 되어가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 이미 각오했었던 걸까. 저 미소를 바라볼 수 있으면 그걸로 됐다고. 그 이상의 무언가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마음은 금세 이상하게 저려온다. 담장을 넘어가다가 장미 가시에 발뒤꿈치가 긁혀서 따가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저 쪽으로도 한번 가 볼까요 근데 오늘 참..
사람이 별로 없네요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가 봐요. 다들 놀러 갔나 보다..
그러게. 이렇게 좋은 곳으로 놀러 오면 될 것을 
오늘 날도 참 좋은데 그렇죠. 여기 참 좋은 곳인데 
그러게..
그러게요..
좋군요. 음 좋아하는 책 있으면
각자 구경하다가 다시 여기서 볼까요. 이왕 오신 건데 구경.. 하셔야죠 
그럴까? 그럽시다. 그럼 30분 후에 여기서 봐요 
네..
헤라 씨
네?
아. 아닙니다. 충분히 돌아다니고. 음 좋아하는 곳이라니깐 충분히 즐겨요 
아... 
알겠죠? 
네. 충분히. 
그래요. 있다 봅시다. 
네. 있다 뵐게요. 


 온통 책으로 가득한 근사한 원목 책장을 뒤로한 채, 우리 둘은 자연스럽게 각자 책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가지런히 정리 정돈 잘 된 책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그냥 편안해진다. 유키가 낮에 그렇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유를 알 것만도 갔다. 사람 동물들은 참 좋은 세상의 선물을 가졌으니 새삼 질투가 나려 한다. 더군다나 이렇게 근사한 공간에서의 시간이라니. 안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고양이인 나도 반한 공간인데, 사람 동물인 그 또한 분명 좋아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이내 마음이 따뜻해진다. 


시간이 멈춰버리면 좋을텐데. 이 사람과 이 공간에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눈에 보이지 않음에도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내 마음은 놓인다. 그는 어느새 내게 그런 사람이 되어 간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정처 없이 여러 책들을 꺼내어 보다가 이내 하나의 책을 집었다. 어린 왕자였다. 왠지 모를 그리움에 사로잡혔다. 책을 들고 읽을 곳을 서성였다. 그러다 책을 이미 집고 원목 나무 의자에 앉아있는 그가 눈에 띄었다.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가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를 정착한 뒤 책 한 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가 보이지 않아야 책을 읽을 수 있을 테니깐. 


어..? 어린 왕 자네? 
아.. 언제 오셨어요 
어... 헤라 씨 이거 어디서 찾았어요? 
아 저쪽 A 코너 한편에 비스듬히 꽂혀 있어서 그냥...
아.... 이거 정말 
네 왜요?
이거 봐요 나도 읽고 있었는데? 
아... 우와 신기하다. 표지가 다르네요 
그러게... 나는 우리 진우한테 가끔 읽어 주고 있는 터라, 동화책 코너에서 찾아봤죠 
아 저는 그냥 일반 서가에서...
하하... 이것도 우연인가 참 신기하네 
그러게요 신기하네요.
음.. 책 다 봤어요?
아. 네 뭐. 어디 많이 돌아다니셨어요?
여기 정말 근사하네. 저 쪽에 커다란 계단이 있는데 거길 지나가면 또 다른 탁 트인 공간이 나와요. 
아 정말요? 음 거기가 어디였지..
한번 가 볼래요?
아.. 네. 그럼 여기 잠깐... 저도 좀 둘러보고 올게요 
그래요 그럼 


 어느새 아무렇지 않은 대화를 자연스럽게 주고받고 있다니. 그저 마음이 편안해진다. 

지혜의 숲에 오길 참 잘했다고 생각하며 나는 그가 말한 공간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문 하나와 커다랗고 긴 책장으로 둘러싸인 고즈넉하고 조용한 복도를 지나니 어느새 작은 문 하나가 보였다. 문을 열자마자 위로 비스듬한 경사가 진 커다란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저 코너를 돌아서 뭔가 신비한 공간이 금세 또 눈앞에 펼쳐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나도 모르게 이미 발걸음은 그 계단을 한걸음 한걸음 올라가고 있었다. 저 보이지 않는 코너를 돌면 과연 무엇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에. 호기심은 금세 움직임으로 변한다. 그리고 결국 움직이면 뭔가가 보일 거다. 그 생각에 사로 잡힌 나는 그저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가 보였다. 벽에 기대서 귀에 이어폰을 낀 채 멍하니 눈을 감고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른손은 청바지 주머니 안에 자연스럽게 넣은 채 뭔가를 만지작 거리는 듯했고 왼손은 이어폰을 만지작 거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뭉클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내 손으로 입을 막았다. 사람 동물이 감회도 고양이 여자를 이렇게 울릴 수도 있는 걸까. 그때였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에서 꾹 참고 있던 눈물이 봇물 터지듯이 흘러 내려오고 말았다. 아차 싶은 그때 그가 내게 다가왔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시선은 또렷하게 나를 향해서. 그렇게 한 걸음 한걸음. 내가 올라간 그 계단의 느린 속도만큼, 그가 내게 다가온다. 


아.... 
헤라 씨.. 왜 울어요 
아.... 그게...
울면 안 되지. 좋은 데 왔는데 왜 우나 
하아....
.... 아
우리 진우 보면 내가 말하곤 해요. 뚝. 하면 그치던데. 고헤라는 아닌가?
전.... 진우가 아니에요 
아... 미안.. 미안합니다. 
전... 전 진우가 될 수 없잖아요 
...
진우도, 언니도, 모두 다. 그건 제가 아니잖아요. 같이 있는 건 제가 아니잖아요..
..... 지금 같이 있잖아요. 
네 같이... 네. 
여기 좋은 곳이니깐 그만 울어요. 오고 싶었다며
네 오고 싶었어요... 근데 눈물이 나오는 걸 어쩌라고...
... 우는데도 그렇게 예쁘면 어쩌라고..
이 와중에 그런 농담.. 뭡니까 정말 
난 좋은데...
... 놀리지 마세요.. 눈물이 안 멈춰지잖아 하아....


 그가 내 머리 위를 토닥였다. 따뜻한 손의 감촉이 이상하게 정수리 끝에서도 느껴지는 그만의 감각이다. 시선은 어느새 내 얼굴 정면, 바로 닿을 듯한 가까운 거리에 있음을 그제야 짐작하고 말았다. 


아.. 죄송합니다. 


 잠깐 떨어지려고 발을 뒤로 젖히다가 그만 넘어질뻔할 것을 그가 잽싸게 내 허리를 감쌌다. 너무 세게 잡아당겨서 미처 피하지도 못한 채 어느새 그가 잡은 힘의 세기에 밀려 품 안에 밀착되어 버린 나의 온 감각은 이내 내 의지에서 멀어진 지 오래인 듯했다. 그가 나를 당겨 있는 힘껏 끌어안으며 말했다.


같이 있고 싶네..
같이 있다면서요.. 지금 같이 있잖아요
그렇지... 같이 있지. 
지혜의 숲에 같이 올 줄이야..
그러게 이렇게 좋은 곳에 같이 오자고 해 줄 줄이야
 말했는데 정말 같이 올 줄이야. 
난, 헤라 씨 보면 상당히 우울해져요 
아.... 왜....
내가... 내가 아무것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아....
해 주고 싶은 게 문득 생기는데, 또 해 줄 수가 없단 말입니다. 
.....


 이내 멈추고 있던 눈물은 다시 흐르고 만다. 시간은 정지된 듯했다. 

정말 12시가 지나도 털은 나오지 않고 꼬리도 삐죽 튀어나오지 않을 것 같은. 마음이 심하게 울렁거리고 어딘지 모를 조바심이 나고, 그래서 시간이 모두 정지되어 버린 것만 같은 느낌. 그래서 어느새 저녁 8시가 다 되어서 어두워지기 시작한, 아니 이미 약간의 공간은 어둠이 삼켜 버린 듯한 지혜의 숲을 등진 채 우리 둘은 말없이 그렇게 유리창 너머의 책장들로 가득한 실내의 불빛에 의지한 채 말을 이어갔다. 


해 주고 계시잖아요 
그게 무슨...


 무슨 고백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그 순간엔 모든 걸 그냥 다 아주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가을, 끝내 지나가는 그 계절의 마지막이라는 걸 이미 짐작했던 걸까. 


지금 마음 말해주고 계시잖아요 
아...
그 마음, 지금 저한테 와 있다는 그 마음 주시고 있잖아요. 
....
충분해요. 그걸로 전 충분...
아니 내가 충분하지 않네. 
아..
자꾸 욕심이 생겨요. 그래서 헤라 씨 볼 때마다 우울합니다. 아주.  
저도....


유키가 그랬다. 사람 동물은 사랑을 하면 동시에 괴로워진다고. 


기쁨과 슬픔, 행복과 괴로움, 설렘과 아픔은 그렇게 동시에 찾아오는 것이라고.
그게 바로 사람 동물의 사랑이라고 말이다. 



평범했던 일상이... 되게 평범.. 아니 사실 우울한 피곤한 일상이...
특별해요. 제겐 이제. 같이 있는 일상 모든 게 아주 사소한 먼지도 하나같이 어쩜 그래요..
.. 아..
어쩜 그렇게 다 하나 같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건지..... 이럴 수 있는 걸까요. 아니 이럴 수는 없잖아요
.......
누가 이해할 수 있겠어요. 아니 아무도 어떤 사람 동물이 이래요. 그럴 수는 없어요. 
헤라 씨...
....?
헤라 씨, 지금 나와 같다면 따라와 줄래요
... 가고 싶어요. 
어딘진 안 물어봐요? 
어딘지.. 물어봐야 하나요? 
아...
어디가 중요한 거보다 그냥 같이 있고 싶어요 조금만 더... 12시가 되기 전에 말이죠 

 


 어딜 가는지 정말 묻지도 않았다. 

 그냥 같이 있고 싶었다. 그게 어디든 지옥이든 천국이든. 공간이 주는 힘보다 그의 말 한마디가 이미 지혜의 숲의 좋아함을, 그 공간의 다정 다감함을 넘어가고 있었다. 아니 넘어간지는 이미 오래였다. 그가 내 머리 위를 그 따뜻한 손으로 토닥여줬던 그 순간부터. 


여기..... 알고 계셨어요?
응... 사실 지혜의 숲 말했을 때 검색해봤어. 그리고 알게도 됐죠. 와보진 않았을 뿐이지. 오늘이 처음이네..
아... 지지향..
들어갈래요. 지금이라도 말해요 싫으면
여기... 이름 아세요?
지지향..?
종이의 고향이에요 
아...
고향... 같은 느낌이라면
헤라 씨..
안 무서울 거 같아요 종이들의 고향이라니깐. 고향은 안 무서워야 하니깐....


 탁 트인 창문과 지혜의 숲의 작은 축소판인 듯 하나 벽을 온통 가득 메운 책장들 사이로 중간에 깔끔하게 정리 정돈된 폭신할 법한 이불 가지가 두 개의 침대 위에 각각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외국에 온 것 같아요 
그러게.... 여기도 지혜의 숲처럼 책이 있네
책... 읽을까요? 
그럽시다. 
읽다가 잠들면..
기대요. 그냥 자연스럽게. 
네.. 아... 음악 같이 들을래요?
그래요 이번에도 헤라 씨 좋아하는 걸로. 
네... 아. 이 노래 제목이 '선물'이에요 
아... 진짜 선물 같네 
...?
준비된 선물 같다. 고헤라 너...
아....


노래 가사가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깊은 사랑에 빠진 순간이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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