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븐 Nov 01. 2017

37. 일만 킬로미터의 비행(非行), 사랑

11,704km만큼의 이별, 그리고 나는 다시 사랑에 빠졌다

비 상식적이고 비 양심적인, B형 여자여서 가능했던 걸까

 내가 집을 떠나기로 결심한 거리는 11,704km. 당시 내게 노출된 모든 환경에서 그저 도망치고 싶었던 3년 전의 나는 막연히 미국으로 떠날  가출 결심을 하자마자 무려 이틀 만에 모든 준비를 마쳤다. 상상력과 추진력의 클래스만큼은 다분히 비상식적이었다는 걸 지금은 인정한다.


그때가 생각나서 그런걸까. 여전히 하늘 위 비행기와 공항을 생각하면 마음이 떨린다. 아련하고 설레서. 그립고 아파서..


 서로에게 특별한 ‘나’와 ‘너’로 만나 ‘우리’가 된 사람들 사이엔 그들만 알 수 있을 사연과 감정이 존재할 거다. 만약 두 사람 외에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사랑과 이별을 묻는다면 말이다. 그게 과연 설명이 될 수 있을까 싶다. ‘나’와 ‘너’이외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깐.


“너희 둘, 도대체 뭐가 그렇게 힘든 거야?”


‘우리’로 묶인 그들만이 아는 사연과 감정이니 타인이 그걸 묻는 것도, 이해하려 하는 것도 때론 억지스럽다.

 그러니 우리는 살다가 어떤 사랑과 이별을 경험하고 있을 ‘나’와 ’ 너’의 이야기를 접한다면 말이다. 그들의 마음을, 사랑을, 이별을, 감정을 함부로 판단해서도 저울질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는 소중하며 누군가는 또 그럴 수밖에 없는 마음일 테니깐. 그들을 평가할 자격은 우리에게 없을 테니깐. 다만 그저 조용히 바라보며 응원해 주면 좋겠다.


누군가들의 사랑을 응원해 줄 지원군이 있는 연인은 참 단단할 텐데.



 그와 내겐 이렇다 할 단단한 응원군도 지원군도 없었다.

 그럴 수 없는 관계라는 걸 인정했기에 바라지도 않았다. 누구도 감히 예상하지 못했던 10살 이상의 나이차를 가진 같은 회사 마케터 사원과 엔지니어 차장의, 끝을 알 수 없는 시작만 예견된 만남이었으니깐.


 딸 가진 부모님의 반대는 당연했다. 부모님 마음에 대못 밖 고도 모자란, 정신 나간 모진 딸년이 되었고, 나와 그를 제외한 회사 사람들에겐 갑작스러운 결혼 발표 이후로, 회식 자리의 안줏거리로 누군가들의 가십거리와 입방아에 오르락내리락하기 딱 좋은 소재의 연인이 바로 그와 나였다.


 '나'와 '너'의 특별한 우연과 사연, 감정이 겹쳐 겨우 ‘우리’가 되었는데...

 세어보면 그 흔한 데이트조차 결혼 전에 몇 번 해 보지 못했다. 횟수로 따지면 반년도 채 안 되는 시간들이었다. 뭐에 쫓기듯이 결혼을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서둘렀던 게 영 아쉽다.


 여러모로 충분한 어른이었던 그와는 달리, 내가 좀 더 그에 걸맞은 어른이었다면. 우리 둘은 그렇게 아픈 시간들을 겪지 않았을지도 모를 텐데...

여전히 궁금하다. 조금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우린 달라졌을까.


 신혼여행의 행복한 시간도 잠시였다.

 해를 걸러 유산을 했고, 경미한 수술을 해내야 했다. 여자로서의 내 몸은 망가져만 갔다. 자존감도 자신감도 바닥으로 고꾸라치고 있었다. 일은 고되고 힘들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상처로 다가왔다. 아이를 잃고, 결혼 생활에 지치고, 몸도 아프고 정신은 어느새 만신창이. 이곳저곳 고장 나 있는 나였었다.


 그럴수록 나는 삐뚤어졌다. 겉으론 씩씩하고 밝은 척 하기 일쑤였지만, 사실 회사에선 혼자 남몰래 화장실 한편을 차지한 채 쪼그리고 앉아서 숨죽여 울었고 집에서는 주방 한쪽에 쪼그라 앉아서 또 울었다. 길을 걷다가, 버스를 타다가 좋지 않은 과거의 기억들이 나를 찾아올 때면 어김없이 또 눈물을 흘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눈물 흘리고 세수하고 새빨개진 눈을 가지는 것 밖엔 없는 것 같았었던 아슬아슬한 나날들이 있었다.


겉으론 단단한 나무 같은데, 세찬 바람이 딱 한번 부는 순간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땐 그랬다.


  그도 나도 결국 지쳐만 갔다. 다정했던 그는 결국, 여전히 주방 구석에 쪼그라 앉아서 바들바들 떨며 울고 있는 나를 힘들어했다. 그런 나를 홀로 내버려둔 채 밖에 나가 있거나 다른 방에서 핸드폰을 보기도 했었으니깐. 그도 견디기 힘들었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그가 미웠다. 참 나쁜 사람 같았다.


공항버스정류장에서, 우리는 짧은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잘 다녀와”
“잘 있어.”


 다녀오라는 그의 말에 나는 그저 잘 있으라는 대답만 했다.  


‘갔다 올게’라는, 다시 ‘온다’는 동사를 다분히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것이 헤어지기 위한 연습이었다는 걸.


 내 처음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 가출이었다는 걸. 그렇게 많은 옷가지를 가지고 나갔음에도, 그는 내가 돌아올 거라 믿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이 믿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 조용하고 침묵하며 인내하는 사람. 선하고 순한 하얀 피부의 얼굴과는 또 달리 완벽하고 논리적이며 때론 냉정 어린 어른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다분히 상식적인 사람이 바로 내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 반해 나는 내가 믿는 게 전부가 아니라 생각하는, 그 이면에 뭔가가 또 있을 거라며, 상상하고 말을 하는 편인 사람. 여리고 나약하며 복잡하고 미묘한 감수성을 가져서 참다가 이윽고 쏟아내는 눈물을 때론 멈출 방법을 머리에서 잃어버리고 마는 여자.


 한때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때론 참 이해할 수 없는 비상식적 여자가 바로 나였다.  

1만 킬로미터의 하늘을 거쳐, JFK 공항에 도착하자, 그제야 실감했다.

 이만큼의 거리로 지금, 내가, 그와 헤어져 있다는 것을. 사실 정말 움직인 나 자신이, 이제 어디서 뭘 해야 할지 어둡고 막연하기만 해서 무서웠다.


 “어떡하지 정말 (떠나)와 버렸다….”


 그러나 반대로 견딜 수 있는 각오도 되어 있었다.


모든 선택은 ‘나’라는 사람이 해야 한다는 삶의 무게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나' 였으니깐.


막막했지만, 기쁘기도 했다. 마음은 그렇게 두 면을 가진 채 흘러간다. 그게 우리들의 살아있는 마음이다.


 9일간, 그곳에서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발걸음이 머문 곳은 펜실베이니아 대학이었다. 가고 싶었던 곳. 유펜의 스타벅스에서 글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을 난 21살 때부터 상상했었다는 걸 그는 알지 못한다. 말하지 않았으니깐. 학부 시절 넘사벽 클래스의 초 인기 강사였던 나의 지독히도 아름다웠던 지도교수님의 모교는, 감히 쳐다봐서도 안될 내 현실 탓에, 동경의 대상이 되기엔 충분했다.

10년 전의 상상은, 10년 후에 정말 현실이 되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유펜의 스타벅스에 앉아 있는 나를 봤다.



한국에서 우는 것관 또 다른 느낌의 눈물이었다. 그래서 나쁘지 않았다고... 그걸로 충분했다고..



  나는 그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아는 당시의 나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경험한 그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주위에 대해서. 의식의 흐름대로 써 내려갔다. 앞뒤 맥락도, 논리도, 상식도 여전히 나 답게 찾아볼 수 없는 편지였다.


 편지를 쓰다 보니 어느새 깨달았다. 사랑이라는 게 그때 다시 내겐 재 정의되는 순간이었던 것 같다. 더 사랑했기 때문에 더 아팠을 뿐이라고. 내 고통의 기간도 곧 그를 향한 사랑의 깊이였다고.


 내가 그보다 좀 더 나약하고 의존적이었다는 걸 그는 몰랐을 뿐이라고. 알면 그렇게 우는 채로 내버려두지 않았을 사실은 다정한 사람이라는 걸 말이다. 나를 조금만 사랑해서 그가 나보다 덜 아팠던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른'이었으니까.
나처럼 떠나고 싶다고 무려 만 킬로미터를 떨어진 미국으로
홀연히 떠날 줄 아는 나 같은 '어린애'는 아니었으니까.


 그저 우리 부부에게 처한 고통을 담담히 받아내 다룰 줄 아는 어른이어서. 나보다 좀 덜 아팠을 뿐이라는 걸, 그도 아팠다는 걸 말이다.


 자신을 믿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어서, 내가 좋아했다는 걸 왜 잊고 살았었는지.

 그도 비틀댔지만 내색하지 않았다는 걸 미처 기억해 내지 못했다. 내가 그만큼 닫혀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아주 추운 바람과 눈만으로 가득했던 미국 동부. 일만 킬로미터를 날아와 헤어짐을 결심했던 나는,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반대로 얻어냈다.


펜실베이니아 문과대학 앞의 스타벅스에서 마시는 그린티 라테
눈 덮인 어느 마을의 아주 조용한 스타벅스
벤자민 프랭클린의 동상이 찬바람에 맞선 채 우두커니 서 있는 어느 공원의 벤치
시청 앞 러브 스퀘어 광장과 미술관 그리고 박물관
바닷바람을 맞댄 사람들의 표정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비슷하다는 걸 알게 해 준 그리운 아틀란틱 시티
 ARIA에서 먹은 단호박 수프와 연어샐러드


 타국의 사소한 모든 풍경들 속에서 그를 그리워한 내가,
나 혼자만의 마음이 그곳에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됐을 때,
여전히 나는 주저앉아 울어버렸다.

일만 킬로미터의 헤어짐이 사실 사랑이었다는 걸 알아버려서..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헤어지지 않기로 마음은 '새로고침'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조금 더 어른이 되었다. 사랑의 크기에 조바심 내지 않기로 결심한 채.

 내가 나를 사랑하고 믿어줄 줄 아는 어른 말이다. 1만 킬로미터를 떨어져 있었던 9일간의 내 남자에겐...


 사실은 세상에서 가장 그와 잘 어울릴 여자가, 그가 선택한 사람이 애석하게도 참 대단한 ‘나’라는 걸, 나 자신을 좀 더 믿게 된 어른 말이다.  


 그 추운 겨울 미국에서의 시간을 나는 여전히 마음 한 편에 기억하며 지낸다.

 내가 무척이나 후져 보이고 초라해질 때면 더더욱. 그 시간의 참 빛났던 나를 꺼내어, 용기를 얻고 힘을 내 보기도 한다.


 비상식적인 용기와 절실한 마음으로 움직일 줄 아는 순수함. 그리고 무엇보다 있는 힘껏 사랑하기로 결심했던 그 순간의 사랑스러운 나였음을 나는 오늘도 되도록 오래오래, 그때의 나를 추억한다.



사랑했었어. 그렇지. 그러니 여전히 사랑해..


비행기 안에서 내내 들었던 그 노래를 여전히 사랑한다. Always be mind.  Thank you Heaven. Still loving you...


작가의 이전글 #9. 지혜의 숲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