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억을 벗 삼아 나아가요.

by 헤븐

같은 장면도 다르게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결국 '나'라는 존재는 이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물론 우리가 현존하는 이 세계 반대편 어딘가에 나를 완벽히 닮은 도플갱어가 있다 한들, 나라는 인간이 느끼는 마음까지는 완전히 카피하지 못할 테니 말이죠.



편지를 두 번 읽었어요. 그리고 생각했죠. 민님의 진짜 마음은 어디에 걸쳐 계신 걸까 싶었죠.

신촌 파출소에서 밤을 지새웠던 그 시절, 그리고 졸업 전 현 배우자 분과 만나 운명처럼 엮이기까지. 드라마 같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드라마란 그저 삶의 세속적 단편과 인간이 품는 은밀한 환상을 보여주기 마련이니, 현실이라는 삶이란 언제나 드라마 그 이상, 문학 그 이상이라 생각해요. 그렇다면 민님은 이미 '민'이라는 책의 큰 서사 중 단면을 제게 보여주셨네요.



크리스마스 선물로 나심 탈레브 책이라니요. 아...

그의 3종 세트 (안티프래질-행운에 속지마라 -블랙스완) 를 겨우겨우 읽어내고 큰 충격(!)을 받았던 서른 중반의 제가 떠오릅니다... 번역본을 읽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는데 그 시절에 영어 원서를 선물해주는 분은 어떤 캐릭터상인가 싶었습니다. 음... 실례를 무릅쓰고 조금 더 언급해드려 보자면, 뭐랄까... 약간 짓궂고 자기 주도적(?)인 면이 강하신가 싶었네요. 본디 선물이라는 것은 상대를 생각하고 상대가 좋아할 만한 것을 고르는 게 일반적일 텐데,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선물해주는 사람들은 일단 자기애가 강한 나르시스트에 가까운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는....(정말 부끄럽게 속삭이자면, 사실 제가 그런 유형의 못난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 선물을, 독서를 잘하지 않는 배우자에게 덜컥 건네주고 말아 버리는;)



photo-1607827448299-a099b845f076.jfif 사람마다 기억과 형태는 다른 것 같아요. 역시 사람이란 알 수 없는 동물 같아요...



진심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과거가 있다는 건 반대로 이런 말일 수도 있겠어요.

현재보다 더 좋았던 과거가 있었든가, 아니면 현재로 이어지기 전의 선택을 하고 싶을 만큼의, 어떤 현재의 결핍을 느끼고 있다든가. 민님의 진심은, 과거와 현재, 혹은 미래, 어느 곳을 향해 더 그리워하고 계신 걸까요. 제게 돌아가고 싶은 과거를 물으셨던 민님을 생각하다가 결국 저는 멋대로 상상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조금 더 '자유'로웠을, 기혼이 되기 이전, 그 시절의 민님으로 되돌아가고 싶으신 건 아닐까 싶기도 했고요. 기혼 전과 후는 세상이 한번 또 달라지는 것 아니겠나 싶어서 말이죠. 출산도 그러하고요. 제게는 그랬거든요. 기혼과 출산, 세상이 두 번 바뀌는 순간...



과거는 기억하는 사람의 주관적 감정에 의해 시시때때로 편집되고 재편성될 수 있는 것이겠죠.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사는 편이라, 기억이라는 것이 그래서 누군가들에게는 한편 안타까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기억하는 사람의 일방적 해석으로 인해 같은 장면도 다양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텐데요. 극적인 예를 들자면, 같은 장면을 마주해도 피해와 가해가 나뉘는 것과 같은... 서로 주장하거나 느끼는 것이 자석의 N극과 S 극처럼 상이하다면 그건 한쪽으로서는 곤욕스러운 기억일 테죠. 마치 이런 걸지도 모르겠어요. 민트 초코칩에 대한 기억이 누군가에게는 당혹스러운 치약 맛이어서 두 번 다시 먹고 싶지 않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내내 그 향과 맛, 풍미가 그리워서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지고 마는 맛일 수도 있다는. (허허.. 제가 5분 전에 민트 초코칩 아이스크림을 먹고 이 글을 쓴다는 걸 이렇게 들켜 버리고 맙니다)



제게 돌아가고 싶은 과거를 물으셨기에, 그에 대한 답을 드리고 싶어서 기억을 꺼내봤어요..

그런데 민님, 어쩌죠. 단 하나의 과거를 떠올리기가 참 쉽지 않았습니다. 돌아가고 싶은 과거가 많아서도, 반대로 피하고 싶은 과거가 많아서도 아니라, 뭐랄까요. 질량의 문제가 아니라 품질의 문제 같은 느낌인데요.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국어에 이렇게 실패하고 맙니다) 몇 가지의 과거의 장면들이 떠올랐고 그중 가장 그리운 장면 한 부분과, 가장 선택을 후회하던 때가 떠올라서 그중 어느 쪽을 골라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49:51의 느낌으로 이긴 쪽은, 그리운 부분이었네요...



photo-1507150444342-1de5051c6a3a.jfif 시간이 오래 흘러도 여전히 소중하게 간직하는 기억들은, 선물 같습니다...




현 배우자를 만나기 이전에 저는 사실 나이 많은 남성 혐오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아... 이렇게 뜬금포로 의외의 고백을 하고 말다니. 큰일입니다. 감정을 pause 하지 않고 마음껏 play 하라는 말씀에 또 이렇게 착한 아이처럼 바로 실천을 거듭해 버리고 말다니. (이렇게 순진한 면이 의외로 강한 허당 어른입니다... 허허) 아무튼 그랬던 저여서 저는 사실 지금 배우자가 무려 나이 차이가 열 살 하고도 한 살이 많은 상남자 어른(!)이나 다름없지만, 반대로 그 이전까지 몇 안 되는 연애는 모두 연하들과 지냈었네요. 어쩌면 저의, 나이 많은 남성들을 혐오하게 된 계기.... 가 한몫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겪었던 나이 많은 남성들의 특징의 대부분은 언제나 관심이라는 포장으로 '지배' 하려 드는 멍청한 정복자와 다정하지만 철저한 이기적 폭군에 가까웠답니다...지금 배우자가 그 편견(?) 을 깨 주는 유일한 사람이어서, 그만큼 신선하고 매력적이어서 선뜻 결혼이라는 실수(!) 를 해 버린 건가 싶기도 합니다. 아무튼...



돌아가고 싶은 과거엔 한 친구가 있어요. 제게 마음을 많이 주었던, 고마운 사람이었어요...

그 시절 만약 다시 그에게 고백을 받는다면, 저는 주저 없이 그를 선택하겠다고. 그랬다면 어떤 미래가 펼쳐져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문득 그 시절 했던 제 선택의 어떤 후회로 인해 다시 돌아가고 싶기도 합니다. 10년 이상이 지나고서도 왜 그렇게 그 시절 기억이 강렬하게 떠오르는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제가 세세한 걸 기억을 잘하는 좀 예민한(?) 편인데, 언제나 살면서 스스로 나약하고 초라하고 볼품없어질 때면, 나이가 들어서도 그 친구가 말해준 어떤 장면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럼 눈물이 나면서도 무언의 용기 같은 게 생기기도 하거든요. 그랬던 적이 있었는데 라면서, 내가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었으니까 라고 스스로 일으키면서 말이죠...



대접받아도 좋은 훌륭한 여자라고... 말해준 사람이었습니다.

참 열심히 사는데 그것이 제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해 사는 것처럼 보였나 봐요... 그 친구 눈에는. 편의점 단팥빵과 흰 우유에 캔맥주만 마시는 너여도, 그 이상으로 훌륭한 디저트와 고급진 위스키를 마셔도 충분히 어울리는 훌륭하고 예쁜 사람이라고... 대접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말이죠. 아무튼 그 말이 유독 인상 깊어서, 강렬한 기쁨과 무언의 위로로 다가와서. 그래서... 그 친구의 좋아함에 저도 좋아함으로 다가가지 못했던 그 과거가 참 이상하게도 후회가 많이 됩니다... 어쩌면 제게 돌아가고 싶은 과거는, 후회를 덜 하기 위한 텔레포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photo-1507150615129-3ba0720f488d.jfif 나중에 알았어요...그 친구의 존재가 제게 큰 선물이었다는 걸....그 당시엔 몰랐던 제가...원망스러웠네요. 어느 한 시절에는....



여전히 삶이 힘겨울 땐, 좋은 기억을 벗 삼아 나아갑니다.

요 며칠 아이가 아팠고 그래서 아이와 함께 다시금 집이라는 공간에 고립되어 버렸다는 자괴감에 빠져서 또 한참 명랑함이나 밝음의 수치는 낮아지기 마련이지만. 살면서 기복이라는 게 있듯, 저 또한 결혼과 육아의 시간을 쌓아가면서 그 기복을 평준화(?) 시켜가는 기분이에요. 그리고 평온하게 살아가려는 노력 중에는 되도록 나쁜 기억보다는 좋은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는 제가 보여요...



나쁜 기억도 꽤 많았습니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기억들은 지워지지가 않네요.

반대로 그 지워지지 않는 흉터 같은 상처 가득한 기억은, 떠올리면 눈물이 절로 흐를 정도의 그립고 좋았던 기억으로 덮어 버리면 흐릿해집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좋은 기억을 벗 삼아 지내보고 있어요.



어제에서 오늘로. 보다 더 사랑하며 살기 위해...

사랑해서 그리운, 마음이 아플 정도로 좋았던 기억들을 기억하는 현재에 감사하면서요....

그리고 아주 나중에 기억하자면, 제게는 민님과 편지를 나눴던 이 시절을 뭉클하게 기억할 것 같아요.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겠네요. 서로 함께 마음을 열고 진솔하게 글을 써 내려갔던, 식탁 위에서의 시간들을 말이죠...



민님의 기억을 조금 더 들려주시면 기쁠 것 같은 4월이네요.

바깥 날씨가 너무 근사합니다. 마음껏 즐기시기를.



photo-1495701021138-bd79984c8ed3.jfif 올 봄엔 이렇게 좋은 기억이 글로 꽃 피어나서 기쁘고 감사합니다. 민님...



덧) 편지를 주실 때마다, 답신을 바로 드리고 싶은 마음에 속도가 좀 부담스러우실지도 모르겠어요

너그러이 양해를.... 제가 뭐든 넘쳐흐르는 팔자소관인 것 같아요. 사랑도, 감정도, 마음도, 눈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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