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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May 28. 2021

당신의 뮤즈

나는 항상 얼마나 슬펐던가. 이 슬픔이 내 연인이라고. 


- 연인, 마르그리트 뒤라스 - 




어제. 어머니와 점심을 먹다가 갑자기 울컥했었다. 언제나 귀신같이 보이지 않고 싶었던 나의 모습을 알아채곤 했던 그녀였다. 그랬기에 그런 문장을 건네셨을게다. 그러지 말라고. 아쉬운 게 없다고. 넌 그래야 한다고. 미용실도 가고 돈도 좀 쓰라고. 모으지만 말고 제발 너를 위해 쓰라고. 모자란 년 헛똑똑이. 열심히 살려 애쓰지 말라고. 사는 게 별거 없다고. 하고 싶은 거 하며 살라고. 넌 그래도 된다고. 



그 말 때문에 더 울먹였다는 걸 엄마는 알았을까.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산다는 것이 아이에게 온갖 에너지와 사랑을 다 쏟아붓고 마는 기혼자들에게는 사치의 영역에 속한다는 걸 그녀도 아는 유경험자임에도 불구하고. 엄마도 스스로 현재 우울하다고 고백했다. 나는 놀랐다. 그럴 성향이 아닐 것 같았기에. 엄마는 말을 이었다. 집을 장만하고 살림을 챙기고 너희 둘을 보란 듯이 키우고 그럴 생각에 우울할 틈이 없었다고. 그 모든 것들을 어느 정도 이룬 지금은 그래서 허무하고 우울하다고. 당신이야말로 우울해야 하는 시기라고. 그러니 너는 아직 그럴 자격이 없다고. 아이들이 아직 자라지 않았다고. 한참 멀었다고.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그리고 너는 아직 젊고 예쁘다고. 꾸미면 예쁜 우리 딸이라고.... 



그래야 했다. 그래야 한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엄마의 말을 듣고 보니 나는 일 년 전부터 나사가 하나 빠져 있는 인간처럼 살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정말 그러든 아니든. 중요한 건 슬픔이 가시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슬픔, 조용한 분노, 허무함, 공허함... 그럼에도 '자기만의 방' 덕분에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틈틈이 읽어야 살 수 있는 책과 글, 아이들과의 짧고 강렬한 행복한 순간. 아침이면 엄마를 바로 찾곤 뺨에 뽀뽀를 해대기 시작하는 첫째의 촉촉한 입술. 둘째의 사나운 생떼에도 불구하고 가끔 보이고 마는 그의 초강력 필살기 애교... 가냘프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엄마 좋아 엄마 사랑해 엄마 가지 마'라는 말을 하면서 품에 앉기려는 아이에게 무방비상태가 된 채 그대로 함께 그들을 껴앉고 눈물짓고 마는 나...잠시라도 거울 앞에 섰을 때 예쁘게 웃고 싶은 자신... 잃어 버리고 싶지 않은 '나'...




오늘의 이 슬픔도 내가 항상 지니고 있던 것과 같은 것임을 느꼈기 때문에 너무나도 나와 닮아 있기 때문에 나는 슬픔이 바로 내 이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나는 그에게 말한다. 이 슬픔이 내 연인이라고. 


- 연인, 마르그리트 뒤라스, p. 57 - 


 


그럴 때면 언제나 바다를 떠올린다. 바다... 



집에 물이 새어 공사를 하는 바람에 어제와 오늘 잠시 아이들과 떨어져 있어야 했다. 집에 남겨진 건 그이와 나, 단 둘 뿐이었다. 새벽에 나가 밤늦게 들어와야 볼 수 있는 그에게 도시락을 건네면서 새삼 물었다. 오늘은 몇 시에 올 것이냐고. 늦을 것이라고. 알겠다고. 조심해서 다니라고. 나도 오늘은 늦을 것이라고. 평소의 안부를 묻는 건 여전했지만 조금의 파동이 느껴졌던 건 요즘의 나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뮤즈'를 원하는 나 때문에. 그 시절 '뮤즈' 였던, 그 시절의 나를 그리워하는 나 때문에. 



희소한 시간, 제약과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찰나의 순간이면 으레껏 밤공기와 맥주, 바닐라 아이스크림이나 음악, 바다, 강 위에 떠오르는 윤슬, 그런 것들을 꿈꾸곤 한다. 정말 소박한 것들, 그러나 바라거나 가지기에는 아직까지도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지는 것들... 그리하여 나는 공원에 갔다. 맥주를 마셨다. 쓴 에일 맛이 감도는 캔맥주 몇 캔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적당한 취기, 적당한 바람,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좋아하는 밤공기, 상쾌하게 불어오는 비가 그친 이후의 청량감... 상쾌하고 청량함이 피부에 닿자마자 발갛게 취기가 오르려 했다. 맥주가 맛있어서 눈물이 날 뻔했다고. 그런 것이라고. 혼자 마시는 맥주 탓이 아니라 단지 그 모든 것들이 완벽한 것 같아서. 몇 가지가 빠져 있음에도 완벽하게 기쁘려 했던 나 때문에 다시 눈가에 물이 맺히려 하는 걸 꾹 참아냈다. 문득 고소하고 달콤한 호두과자가 엄청 먹고 싶어 졌던 마음을 꾹 누른 채로. 오독오독 씹히는 호두가 들어간 촉촉한 바닐라맛 빵맛이 근사한 그 호두과자가 생각났던 건 왜였을까. 



하늘과 구름


그 시간대의 밤공기와 윤슬... 예뻐서. 마냥 그래서. 



집에 돌아오니 그이가 먼저 와 있었다. 공원에 다녀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묻지 않았기에 할 수도 없었다. 다만 캔맥주를 찾는 그이에게 남은 2캔을 건넸다. 함께 하겠느냐고. 선뜻 그러겠다는 그이와 나란히 식탁에 앉았다. 보던 영화를 일시 중지하는 그의 손길을 바라보자 새삼 묘한 기분이 들었다. 왜 중지했는지, 당신도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건지. 그런 마음들을 숨긴 채 일상의 이야기를 평소처럼 건네려는 내가 보였다. 남겨진 잔여 방수 공사와 우리의 현재. 그러다가 이어지는 일상의 이야기들을 이어 나갔다. 연금이나 노후 준비 상태, 축적된 자산현황의 근황이라든지 그의 건강상태 체크, 아이들의 치과나 소아과 병원 일정, 어린이집에서의 일상들, 어떤 친구와 어떤 놀이를 하고 어떤 하루들을 보내고 있는지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고맙다고 했다. 잘 키우고 있다면서. 그 말에 문득 눈물이 나려 했다. 우리가 어느새 그런 사이가 되었다는 것에 알 것 같았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의 그 시절로 당신과 되돌아가려 해도 쉽게 돌아갈 수 없다는 것 또한 알 것 같았다. 그 이야기들 속에 정작 '나'의 이야기는 일부러 하지 않았다는 걸, 그는 알았을까. 다만.... 그는 아직 나를 아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 사이의 대화, 우리 사이의 유머 코드, 우리 사이의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하려는 마음, 건강을 생각하고 일상의 격려를 하며 쓰다듬는 소극적인 스킨십... 다정한 안부, 여전한 목소리, 그러나 선뜻 생기기 힘든 설렘. 미지근한 마음... 



그이에게 가까이 그리고 깊숙이 밀착하려던 나를, 그는 마다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수줍어하는 그이를 바라볼수록 가끔 미안한 생각이 앞서곤 한다.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라는 말을 들을수록 도리어 죄책감에 쌓이곤 하지만 - 마냥 좋지 않다는 걸 기어코 내색하고 마는 나라서 - 한편 매 순간 희열을 느끼지 않은 상태에서도 최선(?)을 다하려는 나를, 그는 놓치지 않으려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둘이 하나가 되려 할 때 언제나 웃고 있던 나였기에. 그것이 수줍은 어색함이든, 일정 부분의 의무감으로 인한 퍽퍽한 기쁨이든. 까르르 웃고 마는 내 웃음소리가 당신도 웃겨서 정작 큰 흥분은 되지 않았지만 한편 무언가 절대 뛰어넘을 수 없는 둘 만의 편안함이 우리를 감싸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연인, 그 둘은 바다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의 뮤즈는... 



내가 아직 당신의 유일무이한 뮤즈라는 것을. 오랜 시간 당신의 몸은 오직 나만이 관통했다는 그 사실 하나에 의지한 채. 나는 또 다른 형태의 어떤 '뮤즈'를 꿈꾸며 생각했다. 오늘은 좀 더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을 것이라고. 요 근래 두 시간을 연속으로 잘 수 없어 내내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다 새벽을 맞이해야 했기에. 오늘은 비로소 깊숙이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맥주 4캔과 음악, 떠오르는 목소리와 이야기. 피부와 살갗. 그리고 단 하루의 해방감... 언젠가부터 시간은 내 의지대로 절대 흐르지 않는다는 걸, 아이를 키우면서 더 절절히 느끼곤 한다. 그리고 희소하게 맞이하는 자유로운 시간, 최대한 마음이 가는 그 방향 그대로의 해방을 느끼려 했다. 새로운 뮤즈를 꿈꾸면서. 좀 더 홀가분한 나로 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그러면서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품에 꼭 앉은 채로.



'그래도 예뻐' 라던 그 목소리를 기억한 채로. 강 위의 윤슬을 떠올린 채로. 

입술을 꽉 깨문 채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듣고 싶은 노래가 마침 들려왔다. 하고 싶던 그 마음과 함께.


 

다시 그리울, 강, 윤슬, 맥주, 그리고... 




# BGM, To be Alone with you (Sufjan Stev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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