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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un 28. 2021

진심은 몇 퍼센트

내가 비록 불완전하고 결함이 많다 할지라도 당신은 여전히 내게서 배울 게 많을 거야

어쩌면 난 당신에게 그보다 훨씬 더 멋진 것을, 

고통의 의미와 그 아름다움을 가르쳐주기 위해 선택된 사람인지도 몰라.


- 심연으로부터, 오스카 와일드 - 





가볍게 관리하는 SNS 가 있다. 물론 어느 순간부터 온라인이라는 가상 세계에서 난무하는, 이미지로 포장된 허례허식과 그야말로 '소셜 포비아'에 질린 나머지 그 마저도 잘 관리하지 않고 들여다보지도 않게 되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그 SNS에 여행 사진 몇 컷을 올리고 말았던 건 어쩌면 '난 꽤 잘 살고 있어요'라는 우월감을 과시하고 싶었던 욕망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그 욕망을 억제해야 했었다. 한 개의 댓글을 읽자마자 눈물이 고여 버렸기에. 고작 그 몇 문장이 뭐라고 왜 그렇게도 마음이 쓰여버렸던 걸까. 왜 그랬을까. 



해시태그는 '엄빠 특근'이었다. 아이들과의 여행이 마냥 해맑게 좋았던 여행이 아닌 일종의 노동의 형태일 수 있다는 것을 너무 도드라지게 표현해버렸던 탓일까. '특근이 아니라 아이들이 엄마 아빠의 추억을 위해 놀아준 거예요'라는 그 문장이 왜 그렇게도 마음에 걸려버리고 말았던 걸까. '그런 마음 상태는 제대로 된 부모가 아니다'라고 따끔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들려버리고 말았기에... 심신의 피로감이 한껏 밀려 있는 상태에서는 별 것 아닌 것들마저 아프게 다가오는 법일지도 모르지만. 정말이지 대수롭지 않을 수 있는 문장에서 묘하게 난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설거지를 마치고 그이와 아이들이 거실에서 뒹구는 모습을 보고 과일을 준비하려 잠깐 식탁에 앉아서 핸드폰을 켠 순간, 그 댓글 알림을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일요일 오전, 그 덕분에 주말 하루 종일 아니 그다음 날까지 나는 무언의 무력함과 공허함과 우울감에 시달리고 말았으니까. 



그분의 말씀에 전혀 오류는 없었다. 맞는 말이다. 유자녀 기혼자들의 무리 생활 속에서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추억 중 '양육'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생겨나는 그 희열과 보람과 의미는 분명 커다란 부분이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틀리지 않은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엄밀히 나에게는 그리 좋은 충고로도 느껴지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언젠가는 알게 되실 거다'라는 그 말 또한 묘하게 분하게 느껴지고 말았다. 모든 걸 다 아는 듯한 그 젠체한 말투가. 기분이 몹시 나빠졌었던 건 분투하려 애쓰다가 자주 휘청거리는 나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아이들을 떠올리면 언제나 죄책감을 씻을 수 없었던 나에게, 그럼에도 내면적인 개선을 하려 안간힘을 쓰듯 부모교육을 받으려 격주 토요일 오전 빠듯한 시간을 쪼개서 움직이려는 내 모습이 모두 처참히 부정당하듯 무용지물이 된 듯한 기분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바보 같이. 



발가벗겨진 듯한 기분이었던 것이다. 부정하고 있던 진심의 이면에 대해서... 아이가 마냥 사랑스러울 순 없는 내 진심이....



잦은 울음소리와 10분에 한 번씩 박진감 넘치게 진행되고 마는 형제의 난 속에서 늘 긴장을 달고 그들의 비위와 온갖 기타 등등을 챙겨야 하는 인간을 얼마나 이해하고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걸까. '부모의 추억을 위해 아이들이 놀아준 것이다'라는 그 문장이... 그래서 이상하게 아프게 들리기만 했고 눈물은 자꾸 흘렀고 아이들과 그이가 그제야 식탁에서 훌쩍거리는 나를 발견하곤 물어오는 것이었다. 



- 무슨 일이야

- 난.... 도저히 이런 마음일 수가 없는데... 내가 자격 미달같이 느껴져... 



그이의 생각이 궁금해서 댓글을 보여주었다. 물론 전폭적인 이해를 받고자 하진 않았다. 도리어 열렬한 정서적 공감을 바라면 바랄수록 오히려 실망하고 상처 받게 된다는 것쯤은 결혼 생활을 오래 유지하면서 알게 된 일종의 생활적 깨달음이었기에. 눈물을 닦고 가볍게 보여줬을 때 - 가볍게 보이지 않은 우스운 장면이었겠지만 - 그이는 웃으면서 말했다. 별 것 아니라고. 신경 쓰지 말라고. 댓글에 진심이 퍼센트나 있겠느냐고. 우리는 분명 특근을 했다고. 잘하고 있다고도... 나는 그 말에 이런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퍼센트일 수 없다고. 사실은 조차도 아이들을 향해 백 퍼센트 사랑'만 한다고 말을 할 수가 없다고. 여전히 그렇다고. 때때로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인간의 이중성을 어떻게 이해받을 수 있겠느냐는 심연의 구렁텅이는 숨겨버린 채로. 



밝음은 어둠이 있어야 역설적이게도 더욱 도드라지는 법이다. 인생이나 사랑, 사람도 조금은 비슷하다는 생각... 




오스카 와일드는 자신이 사랑했던 더글라스로 인해, 그의 사랑으로 가진 걸 모두 잃고 감옥살이까지 하게 된다. 더글라스는 그를 위해 모든 걸 잃고 감옥까지 간 오스카 와일드에게 면회 한 번 오지 않았었다 한다. 그래서 그에게 쓴 편지를 묶은 게 바로 '심연으로부터'이고 옥살이를 하면서도 오스카 와일드는 자신의 마음이 무너지지 않으려, 자신의 사랑을 부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야말로 진심으로. 진심 백퍼센트로... 또한 '지지 않으려 쓴다'는 마음으로 편지를 썼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내가 무언가로부터 지지 않기 위해, 게다가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기어코 노트북을 열고 밤새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깜빡이는 커서를 쳐다보다가 그 시간을 내내 반복해나가는 것처럼. 기어코 펜을 들고 편지지를 꺼내어 그 순간의 마음을 들켜버리고 싶어서 한 문장으로 시작한 편지가 세 장이 되고 마는 것처럼... 



고통은 계절처럼 나눌 수 있는 게 아니야. 우린 다만 그 다양한 순간들을 기록하고 그 순간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라고. 우리에게 시간은 전진하는 게 아니야 순환할 뿐이지 이곳에서의 시간은 고통을 중심축으로 끊임없이 회전하는 것처럼 느껴져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한 번이라도 마주쳤던 모든 사람들 중에서 당신은 정말이지 유일한 사람이었어. 어떤 면에서건 내가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었던 단 한 사람이었지  


- 심연으로부터, p. 117, 212, 오스카 와일드 - 




가족은 언제부턴가 나의 '심연'을 건드리고 마는 최고의 글감이 되고 말았다. 오스카 와일드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그가 한 대상을 떠올리며 써 내려간 글의 시간에 대해서, 쓸 수밖에 없게 만드는 대상을 향한 절절한 마음에 대해 감히 이해한다고 생각하고 말아 버렸다. 나로서는 아직까지 백 퍼센트의 순도로 사랑'만'을 할 수는 없는 대상들이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들곤 한다. 사랑에는 특유의 이중성과 양가감정이 담길 수밖에 없다는 것도... 글을 쓰면서 그 거리와 온도차를 조금씩 좁히려 분투하곤 하지만 말끔하게 어떤 감정들이 씻겨 내려가지는 못한다. 다만 그걸 인정한 채로 나아가 보는 것뿐이겠다. 사랑의 대상들을 생각하고 아끼고 지키고 온전히 위하려는 어떤 '진심'의 분포를 잊지 않으려고, 서툴고 모자라고 심지어는 가끔 스스로 가증스럽고 증오스럽고 그리하여 자신을 경멸하고 마는 어떤 우중충한 감정들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편지 쓰는 습관을 고맙게 생각한다... 진심을 전달하기 그만한 물성을 지닌 것을 찾을 수 없었으니까.



서로의 삶에 분명 적지 않은 진동과 파장을 주고받는 관계에서, 진심이라는 것은 과연 몇 퍼센트의 물결로 밀물과 썰물로 오고 가는 것일까... 이 시대의 우리들은 과연 마주하는 상대들에게, 서로들에게 몇 퍼센트의 진심들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는 걸까. 그것이 비록 사랑의 관계가 아닌 최소한의 대인관계 속 타인이라고 할지언정. 진심을 생각하고 마는 누군가들은 그래서 한 문장 한 마디를 쉽게 내뱉지 않게 되고 만다... 그래서 조용한 것이 더 어려운 법일 지도 모른다. 



다행히 감정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안정을 되찾고 다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하루는 시작하고 또 저물어간다. 게다가 어떤 문장들을 떠올리고 이내 눈물을 그치게 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현실을 보다 견디며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 할 테다. 예컨대 '안쓰럽다' 라거나 '걱정했다' 거나 '사랑스럽다' 라거나 '중요한 사람' 이라거나... 사소해보이지만 한편 누군가의 마음에 닿아버리고마는 내내 듣고 싶게 만드는 강력한 진심의 말 한마디들은 오늘날의 우리들을 현실로부터 보호하고 다시 움직이게 만든다는 걸 안다. 그리하여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흐르는 강물처럼. 그냥 흘러가 보면 될 뿐이라고... 고마운 진심들을 더 많이 기억하면서. 

아무 일 없이 무사하게. 그렇게 진심의 최선을 주고받으며 오늘들을 잘 살면 될 것이라고도.






어떤 형태로든 진심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너희 둘은 나를 뚫고 나왔기 때문이었어.... 나를 뚫고 나를 뛰어넘고 마는 대상......



#그래도 사랑하고마는 것이다. 

열렬하게 나를 뛰어 넘어 사랑하는 만큼, 아픈 것이다. 그리하여 내게 사랑은 여전히 아픈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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