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을 내리다
“어? 이거 주문한 적이 없는데요”
“서비습니다. 이명박 구속되면 제가 양주 돌린다고 했거든요.”
“아? 그럼?”
“네.흐흐흐”
술자리에서 갑자기 서비스가 날라왔다. 저 옆자리 기품있는 외모의 신사분이 보낸 것은 당연 아니고 술집 사장님이 직접 쏜 술을 얻어 마셨다. 이미 술은 많이 마셨다. 중국 속담에 “술에 취하는 게 아니라 사람에 취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사람이 아니라 ‘소식’에 취했다. 대기권 돌입시 기체 고장으로 위기에 빠진 우주비행사처럼 홍대에서 난관에 난관을 거듭한 끝에 택시를 붙잡고 귀환에 성공했다.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구속영장이 집행되는 순간을 스마트폰으로 다시 봤다. 출근환 덕분인지 속은 쓰리지 않았다. 검정색 세단 상석에 앉았다가 자기 자리는 다른 입갑되는 이들처럼 뒷좌석 정가운데임을 알고 애써 몸을 움직여 안으로 구부러지듯 노구를 움직이는 모습에 마음이 허했다.
마블 시네마나 007 영화에 나오는 빌런처럼 악마적 카리스마와 어둠의 매력을 가진 이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한 때 이 나라 최고 권력자가 아니었던가. 전두환처럼 호기롭게 골목 성명이라도 하고 자기 고향으로 갔다면 압송의 서스펜스라도 있었을 것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떠나던 날, 거의 열흘 넘게 술을 마시고 울다가 잤고 깨면 다시 술을 마시다가 기절을 했다. 텔레비전을 끊었고 신문을 멀리했다. 세상 소식은 레지스탕스처럼 팟캐스트와 소셜을 통해서만 접했다. 머리카락은 별 일 없으면 항상 노란색으로 염색했다. 나에겐 노무현을 잊지 않기 위한 상복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그런 사람에게 힘을 실어주겠다는 진취적인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가 너무나 미워서 이를 악물고 살아온 사람이었던 것이다. 촛불 집회를 거쳐 민주당 경선부터 본격적으로, 그 사람을 따라다녔다. 프리랜서 강사가 생업의 큰 축인 입장에서 특강 강사 조업기를 모두 날려버렸다. 통장 잔고를 확인해보니 3원이 남아있길래 헐헐 웃으며 사진까지 찍어두었다. 하지만 5월 10일 홀가분한 마음으로 모터사이클을 타고 전국 투어를 떠났고 내 생애 가장 치열했던 3개월 정도로, 얼마 안 지났지만 추억이란 포토샵 필터로 잘 정리된 채 뇌세포에 저장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미래보단 과거로, 사랑보단 증오에서 동인을 찾아 움직였던 것이다. 이명박의 구속장면을 보면서 나 자신을 절감했던 것이다.
그날은 라디오 출연이 있는 날이다. 강원래의 노래선물. 벌써 7년 째 출연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원래 형의 프로그램에 출연할 땐 모터사이클을 타고 가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타고 간다고 하더라도 라이딩 자켓,헬멧,글러브 등등을 트렁크에 넣어두고 최대한 모터사이클’취’를 없앤후 스튜디오로 향한다. 하지만 이내 소용없는 일임을 알았다. 라이딩 부츠는 그렇다치더라도 봄날의 삼십여분을 라이딩으로 달려온 이의 느낌을 라이더가 모를리 없다. 하지만 난 계속 그렇게 냄새를 없애려고 했다. 라이더의 냄새를.
이날은 바이크를 꼭 타야만 했다. 그것도 스쿠터가 아니라 좀 큰 녀석을 타야만 했다. 5천알피엠을 넘기자 프로펠러 소리가 엔진에서 나면서 곧바로 파워밴드로 진입했다. 후륜은 나를 밀어냈고 전륜은 나보고 결정하라고 했다. 그것도 빨리.
방송 출연을 끝내고 서쪽으로 달렸다. 김포를 거쳐 강화도를 갈까 하다가 여행수다 탁재형 피디 집에 들려 커피 한 잔을 얻어 마셨다. 고작 하루 이동반경 40킬로 미터를, 그것도 같은 동선으로만 움직이는 현대 서울시민에게 퇴화된 유목민의 유전자를 오히려 홀로 진화시키고 있는 사람이다. ‘총,균,쇠’에 같은 책에 자주 나오는 고대인들의 이동경로는 이런 사람의 조상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 조상들이 없었다면 인류는 그냥 모두 다 한 군데 몰려 살았을 것이다.
“그만둘까”
“뭘?”
“다. 그냥 전부 다”
“뭐 그것도 나쁘지 않고”
채근하지 않는 중년 동년배의 대화는 이처럼 편안하고 유익하다. 커피에 대한 답례로 송탄 김네집 부대찌개를 사오겠다고 약속하고 다시 헬멧을 썼다.
그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던 곳, 문재인 캠프가 있던 여의도 대산빌딩이 보고 싶었다. 아까 방송 끝나고 갔더라면 바로 길 건너편이라 5분도 안 걸릴 거리였지만 김포에서 갈려니 제법 멀었다. 그래도 가보고 싶었다.
대산빌딩 옆 자유한국당 당사 앞에 있는 현수막을 보고 한참을 서있었다. 화가 나지도 않았고 이 난잡한 시각정보,활자정보를 인지하고 해석하고 분류해서 어떤 감각 속에 저장을 해야할지 분주하게 좌뇌와 우뇌를 사용했다.
일단 집으로 가자. 엔진 점화 버튼을 눌렀다. 철커덩 기계적 마찰음과 함께 기어를 1속으로 넣었고 오른손으로 스로틀을 감았다. 회전 함에 따로 햇빛이 사면으로 헬멧 쉴드를 미끌어내려갔다.
지금 외기 온도는 10도 정도이고 아마 집에 도착할 때쯤이면 더 떨어질 것이다. 주행풍 탓에 훨씬 더 춥게 느껴졌다. 춥게 느껴질수록 머릿속은 더 상쾌해졌다. 독일 쇼핑사이트에서 주문한 슈베르트 헬멧은 풍절음이 정말 없었고 잠깐이나마 가벼운 명상에 빠질 수 있었다.
“그래도 내가 할일이 더 있겠구나” 내가 내뱉은 말에 입김이 쉴드 안쪽에 하얗게 찼다. 내가 이런 말을 했다는 증거를 내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이렇게 150km의 주행과 함께 하나의 결론으로 하루의 막을 내렸다. 아직 할 일이 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