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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뜰 Jan 25. 2020

설에 땅 고르는 여자

은퇴한 남편과 함께

여기서 좀 골라보세요. 맘에 드는 거 가져가세요.



그 말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난 하지 않았다. 끝내 하지 않았다. 해야 하지 않을까 해야 해. 해. 어서 해.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소리. 괜찮아. 괜찮아. 그도 많이 가졌잖아. 괜찮아. 그래도 이렇게 굵고 좋은 건 없을 텐데. 말해야 해. 아니 괜찮아. 난 결국 그 말을 안 했고 그리고 영 마음이 불편하다. 






포클레인 기사님과 날을 맞추다 보니 하필 설 연휴다. 아, 그래도 설에 어떻게 이런 일을 하지요? 저는 괘않슴다. 기사님은 상관없단다. 우리도 딱히 설에 무얼 하는 게 없다. 애들 모두 외국에 있고 우리만 지방에 뚝 떨어져 있으니 부모님 뵈러 천안으로 서울로 움직일 만도 하지만 이젠 기차표 예매가 만만치 않다. 애들은 설 기차표 예매일 신공을 발휘해 다다다다 순식간에 표를 확보했지만 우리 실력으론 어림도 없다. 포기다. 그냥 먼 채로 각자 지내기로 한다. 칡넝쿨이 판을 치던 곳이라 지금 한 겨울에 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 하여 긴 여행을 떠나기 전 실행한다.  


우리 땅 위로 전원주택이 멋지게 들어서 있다. 꼭대기쯤에 K가 살고 있다. 같은 교회를 다녀 매주 얼굴을 보니 친한 것도 같지만 딱히 두 집이 따로 모이고 그러는 건 아니니까 친하지 않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또 주일마다 오가는 미소가 다정하니 막 친한 것 같은 그런 분이다. 우리가 땅을 고른다니 너무 기뻐하며 이것저것 조언해주고 삽도 곡괭이도 빌려준다.   


여기 칡이 어마어마할 겁니다. 그거 나 좀 주소. 


한여름에 기승을 부리던 드센 칡넝쿨이 허옇게 줄기만 드러내고 포클레인의 손길이 갈 때마다 그 밑동을 드러내며 영 맥을 못 춘다. 봐라! 세월 좋다고 마냥 기세 등등이 아니란다. 포클레인이 빵빵 다 갈아엎는다. 칡이 그렇게 좋은 거라고?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깜짝 놀란다. 국내산 칡은 구하기도 힘들고 겨울에 캐야 효과가 크고 대부분은 중국산이고... 치술령 자락 아래 계곡을 따라 냇물이 사시사철 흘러가는 곳, 맑은 숲 속 우리 땅에서 자란 저 칡은 아주 귀하겠구나.   


포클레인이 빵빵 신나게 전진하면 남편이 뒤따르며 드러난 칡뿌리를 수거해 내게 던져준다. 대충 쓸만할 것들만 절단 가위로 잘라 정리하는 게 나의 역할이다. 흙이 많아도 너무 많다. 주렁주렁 줄기만큼이나 덕지덕지 흙이 묻어있다. 오호 제법 큰 것들이 나온다. 다리통? 아니 그 보다는 조금 가늘고 팔뚝? 보다는 꽤 굵은 정도. 어쨌든 그 굵은 것들을 따로 챙겨놓는다. 그렇게 좋다는 데 나도 좀 가져가야지 하는 게 나의 속마음이다. 그래 여긴 우리 땅이니까. 


마치 소풍 온 것 같네요. 


돗자리를 펴고 준비해 간 커피며 과일이며 펼쳐놓고 졸졸 흘러가는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파란 하늘 두둥실 흘러가는 흰구름을 올려다보며 맛있게 먹으니 포클레인 기사님이 환하게 웃으며 말씀하신다. 하하 그렇다. 마치 소풍 온 것 같다. 일은 힘들지만 생각하기 나름이다. 마치 봄날 같은 따스한 햇볕 아래 달콤한 휴식이라니. 일을 힘들게 했기에 더욱 맛난 휴식 아닐까. 잔뜩 정리 해 놓은 칡을 보며 기사님은 저거 탕제원에 맡기세요. 그래서 냉장고에 두고 계속 드세요. 참 좋아요. 하는 게 아닌가. 귀가 솔깃. 흙은 좀 닦아 가세요. 해서 바로 아래 계곡으로 끌고 내려가 닦기 시작한다. 



냇가 돌 위에 꾸부리고 앉아 흘러가는 냇물에 칡을 씻는다. 아득히 멋 옛날 냇물에서 어떻게 빨래를 했는지 알겠다. 칡을 던져 넣는 순간 풍덩 흙탕물이 되더니 그건 아주 잠깐. 순식간에 맑은 물이 되어버린다. 계속 물이 아래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재밌다. 힘들다. 매우 힘들다. 진작에 캔 것은 팔뚝 아니 다리통만 하다. 크다. 그래. 이건  잘 챙기자. 그렇게 큰 거 작은 거 골라놓으며 흘러가는 냇물에 빡빡 씻는다. 봄나물 캐러 온 봄처녀 같다. 무슨 설이 따스한 햇살 하며 바람 한 점 없는 것 하며 마냥 봄날 같기만 할까. 매서운 추위 속 한겨울이어야 설 기분이 날 텐데 난 느닷없이 봄처녀가 된다. 하하 


그러나 고무장갑 없이 손바닥 부분이 시뻘건 면장갑만 낀 채로 벅벅 씻으니 나의 손은 얼얼하다 못해 차가운 냇물에 그냥 동태가 되어버린다. 아니 동태까지는 아니다. 물이 그렇게 한 여름처럼 쨍하고 차갑지는 않다. 여름엔 차갑고 겨울엔 따뜻한 것일까. 자연의 오묘함이라니. 냇가 바위 위에  쪼그리고 앉아 살살 부는 바람 따스한 햇살, 아 참 좋다. 이렇게 해님과 함께 물에서 밭에서 일하는 거. 방 안에서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것과 많이 다르다. 어쨌든 그렇게 일차 씻는 걸 마치고 계곡 위로 올라가자 남편은 또 한 가득 칡을 거두어 길가에 쌓아 두고 있다. 그리고 K가 왔다. 



아. 이거밖에 없어요? 


남편이 쌓아 놓은 칡을 보며 그가 말한다. 냇물에 닦아 놓은 굵직한 그걸 말할까? 여기 것도 그래도 괜찮은데. 아. 제가 냇물에서 열심히 닦았어요. 저기 좀 보세요. 정말 잘 씻어 놓았지요? 얼렁뚱땅 저 아래 냇가를 가리키며 너스레를 떤다. 제가 이것도 닦아 드릴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우리 집에 가면 닦는 시설이 잘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길가의 칡을 정리만 하지 냇가로 내려가지는 않는다. 휴. 다행이다. 그런데 남편은 계속 포클레인이 밀어내는 땅 속에서 칡을 건져왔고 그는 절단 가위로 거기서 잘 추려낸다. 해가 지면 금방 어두워진다며 빨리 냇가의 칡을 정리하란다. 아, 그래요?  냇가로 달려 내려간다. 절단 가위를 들고 가 덩굴째 씻어놓은 칡을 가져갈 것만 자르기 시작한다. 아, 그가 할 때는 참 쉬워 보였는데 난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낑낑대고 있는데 K가 내려온다. 절단 가위 여기 있지요? 하면서. 


아, 그때 난 그의 눈을 보고야 말았으니. 굵은 건 여기 다 있네. 하는 표정이랄까. 칡에 관심도 없더니 잘도 챙겨놓았네. 아, 그런 느낌. 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그 굵고 큰 것을 한쪽에 챙겨놓은 게 아, 그렇게 마음에 걸릴 수가 없다. 그때 난 말했어야 했다. 바로 그 말을. 


여기서 좀 골라보세요. 맘에 드는 거 가져가세요.


내가 쓰고 있던 절단 가위로 자기가 가져온 많은 칡을 툭툭 자르는데 나는 그것들이 나를 주기 위해 가져온 건 줄 알았다. 사실 거기는 우리 땅이니까. 그리고 남편이 수거해 도로에 놓은 것들이니까. 그래서 그가 잘라놓는 것들을 닦으려고 하니 아, 닦지 마세요 집에 가서 닦아도 됩니다. 그는 그의 것만 열심히 챙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그가 챙기는 것도 많아 그 정도면 돼. 한쪽에서 솟아나는 그런 맘에 결국 그 말을 못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 굵은 것들을 보고 놀라던 그의 눈길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난 꼭 말했어야 했다. 필요하면 가져가시라고. 난 애초 칡을 몰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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