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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뜰 Apr 13. 2020

은퇴한 남편이 문득 멋있을 때

나의 남편 그가 저렇게 멋있었던가? 은퇴 후 집에서 24시간 함께 하고 있는 그가 매력적이라거나 멋있어 보일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그냥 매일매일 일상에 항상 곁에 있는 남자. 그 정도 아닐까. 그러려니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소한 싸움들을 어떻게 진정할 것인가. 어떻게 적응해나갈 것인가 그렇게 싸우고 화해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그런 와중에 무어 그리 멋있게 보일 일이 있을까. 그랬다. 그냥 그렇게 은퇴 후 삶을 함께 하고 있는 남편. 그런데 오늘 그가 무척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나의 이야기는 나무 시장에서부터 시작된다. 해마다 봄이면 열리는 산림조합에서 하는 상설 나무 시장에 간다. 마스크를 단단히 쓰고. 말 많이 하지 않고 그냥 눈으로 보고 딱 고르기야. 이거 이거 주세요. 이렇게. 다짐하며 나무시장 안으로 들어간다. 미스코리아들처럼 자태를 뽐내며 많은 나무들이 자기 이름표 뒤로 쫘악 줄 서있다. 그중에 딱딱 사려고 했던 걸 지적한다. 일단 돈 계산을 하고 오란다. 카운터에 가서 이름과 함께 개수를 적고 돈을 지불하면 그 영수증 대로 나무 아저씨들이 골라내어 묘목 위를 자르고 검은 비닐봉지에 잘 싸서 준다. 뿌리가 마르지 않도록. 


나무 전문가에게 많은 조언을 들었으므로 그 열기가 식기 전에 우리는 나무를 심기로 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 밭에서 먹을 도시락을 싸고 그리고 나무 시장에 먼저 간 것이다. 그 나무 전문가의 판단은 관리가 쉽도록 단감나무를 심으라고 했다. 조경수를 팔려면 몇천 평은 되어야 수익이 날 텐데 그런 게 아니니까 그냥 과일나무를 심고 그리고 과일을 따먹으라는 의견이다. 참 감 둥시는 곶감용이고 단감 부유는 딱딱한 단감이다. 그의 조언 따라 맛 좋다는 단감 부유를 신청한다. 



나무를 사들고 우리 밭으로 가던 중 차 한 대가 겨우 드나들 정도의 시골길이 전봇대 공사로 한창이다. 우리 차를 보고 무언가 서두르는 기사님들. 괜찮아요 괜찮아요. 어차피 늘어진 시간. 괜찮다. 밭에서 할머니가 지켜보고 있고 이분들 커다란 전봇대를 밭에 내려놓는 중이다. 마침 한 개가 다 내려진다. 남편이 뒤로 백 해 조그마한 골목길로 차를 뺀다. 그냥 기다리면 저 차가 비킬 텐데? 그게 여자랑 남자랑 다른 점일 거야. 저 육중한 트럭이 움직이려면 아주 힘들지. 우리가 비켜주어야지. 그럴까? 나 같으면 어땠을까? 힘들게 뒤로 백 하지 않고 그냥 트럭이 비켜주기까지 무작정 고개 들이밀고 기다리지 않았을까. 하하 나의 운전하는 모습이 영 못마땅한 그는 여차하면 여자와 남자와 다른 점이야 하는 이상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내 탓이다. 좌회전하려는 차량 뒤꽁무니에 하염없이 코 박고 있다든가 고속도로에서 속력 내기 싫어 커다란 트럭 뒤만 졸졸 따라간다든가. 하하 난 운전이 싫다.


우리가 도착한 곳 앞에는 계곡이 있고 맑은 물이 찰찰 흘러가고 있고 그 위로 벚꽃잎이 동동 떠다니고 있다. 하늘은 파랗고 흰구름 두둥실 바람은 살랑살랑 그야말로 완연한 봄이고 그리고 아무도 없다. 나랑 남편은 계곡 옆에 차를 세우고 그리고 모든 장비를 갖춘다. 특히 요거 하하. 너무 재밌는 거. 



가끔 골프장에서 일하는 분들 보면 궁둥이에 둥근 의자가 달려있어서 걷다가 풀썩 앉다가 하는 걸 본 적 있다. 정말 신기하다. 저거 참 편하겠다. 했던 그 의자. 하하 그걸 농협에서 살 수 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아, 저 의자구나. 난 그 신기한 장면이 생각나 그걸 사려했더니 남편은 밭일도 많이 안 하면서 무슨 일을 열심히 한다고 그런 걸 사느냐고 난리인데 난 고집해서 샀다. 자동차 트렁크 한 자리 떡하니 차지하고 있어 그의 미움을 받던 그 의자가 오늘 톡톡히 그 실력 발휘를 했으니 하하 얼마나 멋진 의자인지 그도 감탄하며 인정했다. "잘 샀군."


이 의자 사놓고 처음엔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조차 몰랐다. 위로 쓰는 건가 아래에서 위로 끼는 건가. 이리저리 하다 찾아낸 방법. 일단 둥근 통이 궁둥이로 가게 해서 밑에서 위로 양쪽 달린 끈 사이로 발을 넣고 올리면 내 궁둥이에 의자가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앉을 때는 그냥 펄썩 앉으면 궁둥이에 매달린 둥근 통이 그대로 의자가 되는 것이다. 캬 얼마나 편한지.



남편이 삽을 들고 팍 팍팍 구덩이를 파면 나는 호미로 살살 살살 나무뿌리가 땅 속에 잘 안착하도록 부드럽게 다듬어준다. 나무 전문가 말대로 우린 처음에 노끈으로 길게 길게 줄을 쫙 지어 4미터씩 간격을 두고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한 구덩이 파면 나는 홀딱 일어난다. 그러면 의자는 다시 내 궁둥이에 대롱대롱 매달린다. 그리고 4미터 지나 다음 구멍에서 그가 삽으로 파팍 흙을 퍼낼 때 난 다시 철퍼덕 땅 위에 앉으면 하하 땅바닥이 아니라 다시 궁둥이에 달린 그 둥근 통이 의자 되어 나를 잘 모시는 것이다. 거기서 나는 호미로 읏차읏차 파팍 흙을 파내며 구덩이를 예쁘게 다듬어 간다. 


아, 그런데 이 호미질. 쉬운 거 아니다. 물론 삽으로 퍼내는 작업은 더 힘들겠지만. 점점 나의 오른팔은 저리다 못해 아파오고. 흙을 호미로 팡팡 팡팡 파내는 일이라니. 반복된 그 동작이 오른팔에 많은 무리를 준다. 그래서 왼손으로도 해보고 궁둥이를 들썩들썩 앉았다 일어섰다. 아, 힘들어. 



거기서 끝이 아니다. 잘 만들어진 구덩이에 이제는 나무를 심을 차례. 나무 시장에서 사 온 감나무 묘목을 구멍 한가운데 잘 넣고 꽉 붙들고 서있으면 남편이 삽으로 다시 흙을 그 안으로 퍼 넣는 것이다. 그러면 난 살살 살살 흙이 뿌리에 잘 섞이도록 흔들어주면서 또 접목 부분이 땅 위로 살짝 나오도록 잘 조정해주면서 다시 앉아 호미로 살살 흙을 다듬어주어야 한다. 


나무를 심으면 이제 물을 주어야 한다. 그것도 아주 듬뿍. 물을 주기 전에 해야 할 일. 일단 심어놓은 나무 주위로 도톰하게 흙을 쌓아 흠뻑 주는 물이 하나도 새 나가지 않도록 둔턱을 만들어주는 것. 이것 역시 호미질이 심하게 필요하였으니 남편이 주변 흙을 삽으로 떠서 나무 주위로 가져다주면 난 열심히 호미질을 하여 물이 새 나가지 않도록 둔턱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헉헉 헉헉. 아 너무 힘들어."

"이리 줘봐. 내가 할게."


나의 어리숙한 호미질과 달리 남편은 쓱쓱쓱쓱 아주 쉽게 한다. 그의 손길이 가면 금방 둔턱이 예쁘게 만들어진다. 삽으로 주변 흙을 떠올리고 호미로 쓱쓱쓱쓱. 와우 지치지도 않는가. 힘차게 삽으로 흙을 떠내는 그가, 젊은이로 돌아간 듯 아니 우리의 청춘일 때처럼 그렇게 문득 멋지게 다가온다. 집에서 빌빌? 하하 책 읽고 TV 보고 밥 먹고 음악 듣고 그야말로 조용하던 그가 씩씩하게 아니 힘차게 팍팍 파팍 흙을 떠내는 모습이라니. 게다가 지치지도 않는다. 어디서 저런 열기가? 생기가 돋는 듯하다. 아, 멋있다. 하하 호미질에 지쳐 뻗어있던 나는 한참 그를 바라본다. 하하. 정말 힘이 넘치고 있다. 멋지다.  


"여보 멋있다. 청춘 같아."


하하. 그가 씩 웃는다. 오홋. 더 멋지다. 푸하하하



밭에서 일을 하니 배꼽시계가 어김없다. 시계 볼 일도 없이 팍팍 일만 하다가 꼬르륵 소리에 시계를 보니 아뿔싸 어느새 2시가 넘어가고 있다. 여보~ 점심시간~ 서둘러 계곡으로 내려간다. 아이스 가방에 정성껏 싸온 샌드위치며 과일이며 요플레를 꺼낸다. 바위 위에 돗자리를 깔고 앉으니 시원한 물소리가 콸콸콸콸 바람에 벚꽃잎이 휘잉 휘잉 물 위에 동동 떠내려 간다. 막 솟아나는 연둣빛 나무 색이 참 예쁘다. 컵라면에 팔팔 끓여 보온병에 담아온 뜨거운 물을 붓고 여보 3분~. 그리고 마지막 커피까지. 오홋. 푸짐하게 먹고 나니 기진맥진 지쳤던 몸에 다시 힘이 팡팡 솟는다. 따뜻한 햇볕을 피해 계곡으로 왔더니 조금 지나자 너무 추워진다. 계곡이란 그런 것인가. 


이제 가장 고난도의 일이 남아있었으니 바로 이 계곡에서 커다란 물통에 물을 담아 낑낑 밭으로 가져가 나무에 듬뿍 아주 듬뿍 물을 주어야 한다. 계곡에서 물을 떠 나르는 것 그리고 그걸 나무마다 주는 것 이건 정말 힘들다. 너무 무겁기 때문에. 그래도 밥 먹은 힘으로 이 계곡 물을 낑낑 여러 번 퍼 날라 오늘 심은 나무에 듬뿍듬뿍 넉넉히 준다. 그가 아주 멋지게 다가온 날이다. 파이팅.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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