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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뜰 May 17. 2020

은퇴한 남편과 새벽 5시까지 김치를!

알타리 총각김치, 열무김치, 오이소박이 무려 세 통씩이나 음하하하하하

잠자리에 누우며 창문을 열어보니 벌써 하늘이 환하다. 새벽 5시. 세상에. 시험공부도 아닌데 우린 밤을 꼴딱 새운 것이다. 게으르다고 노상 구박받던 남편은 더 게으른 여자를 만나 지극히 편안하다. 하핫.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을 뒹굴뒹굴 책 읽고 음악 듣고 느려 터지게 보내다 도저히 못 견디겠으면 발딱 일어나 반짝반짝 대청소를 한다든가 장을 본다든가 밭을 간다든가 반찬을 와장창 만든다든가 우리의 생활패턴이 그렇다. 나 역시 게으르다고 야단맞다 나보다 더!(그는 내가 더!라고 하지만 어쨌든) 게으른, 몇 날 며칠을 빈둥댈 수 있는 남편을 만나 아무 스트레스 없이 게으름을 즐긴다. 문제는 무언가 할 때는 무지막지 몰아서 한다는 것이다.


비가 촉촉이 내린 다음 날 아무리 게으른 우리도 해야 할 일이 발목을 잡으니 얼어 죽은 호박 모종을 다시 사다 심으라 하고 잡초도 쫌 뽑으라 하고 씨를 뿌린 상추와 쑥갓도 제대로 싹이 나왔는가 들여다보라 한다. 그렇지 아무리 게을러도 할 건 해야지. 빈둥대던 둘이 모처럼 외출 준비를 한다. 느릿느릿 하하 밥 차리고 먹고 치우고 나니 오후 두 시. 하이고 우린 왜 이리 느릴까?


너무 늦었으니 담에 갈까 하다 그래도 이미 칼을 뺀 것 집을 나선다. 시장에 들러 호박 모종을 사고 밭으로 간다. 남편은 무럭무럭 자라는 나무에 가지치기를 해주고 나는 살살 그때 그 자리에 호박 모종을 심는다. 이번엔 잘 자라거라 토닥토닥. 물을 듬뿍 주고 풀 뽑고 두루두루 모든 일을 마친 시간은 7시. 밭에서 지친 몸이지만 그래도 나온 김에! 달랑달랑 떨어져 가는 김치를 담그기로 한다. 그래. 장을 보러 가잣. 커다란 농협 마트로 가서 알타리두 단, 열무 두 단, 오이 열 개를 사 온다. 총각김치랑 열무김치랑 오이소박이를 담글 거다. 이것저것 골라서 장을 다 보고 나오니 밤 10시. 그대로 놓아두고 내일 담글까? 그래도 지금 사자마자 담가야 가장 싱싱할 걸? 왜 밖에서 묵혀? 일단 집에 가서 보자. 오케이.


다듬기 힘든 쪽파 커다란 것 한 단도 겁 없이 다. 와이? 쪽파 다듬는 건 남편 차지이기 때문이다. 난 참 힘든데 남편은 얼마나 잘 다듬는지 모른다. 아주 깨끗하게. 장을 봐서 낑낑 많은 짐을 함께 나르고 집에 오면 각자 역할이 나누어져 있으니 총각 무 벗기는 거며 다듬고 깎는 거는 모두 남편 차지. 나는  열무를 썰어 소금에 절이고 오이도 씻어서 세 토막씩 잘라 가운데로 십자선을 넣고 소금에 절이고 김치 속을 만든다. 이제 알타리만 다듬어지면 그걸 절이면 된다. TV에서 마침 부부의 세계를 하니 커다란 거실에 신문지 쫘악 깔고 남편과 나는 김치 담글 때의 각자 역할을 열심히 한다. 눈으로는 TV를 고 손으로는 김치를 담근다. 푸하하하 일거양득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흘러 노곤노곤 피로가 몰려온다. 무거운 스테인리스 커다란 대야를 꺼내는 건 서방님 일이요 닦아서 지금 쓸 수 있게 만드는 건 나의 일. 은 데서 김치 통 꺼내는 건 남편 몫. 닦아서 엎어 놓는 건 나의 일. 그렇게 철저히 분업되어있으나 마지막 합작품이 있으니 바로바로 버무릴 때.


여보~ 파, 부추 썰어 놓은 것 삼분지 일만.


양손에 장갑을 끼고 시뻘겋게 고춧가루 양념을 묻혀가며 커다란 대야 앞에 앉은 나는 서방님을 요것조것 시켜먹는다. 새우젓 줘. 멸치젓 줘. 고춧가루 여기 휙휙. 이거. 저거. 착착 대령하는 남편. 어때 짠 것 같아? 아니 싱겁다. 그럼 새우젓 좀 더 넣어볼까? 두 숟갈? 아니 너무 많아. 한 숟갈만. 넣고 다시 먹어본다. 앗 짜다 어떡하지? 냉장고 뒤적뒤적 무를 찾아 썰어 넣는다. 과연 이게 무엇이 될까? 짜? 글쎄 다시 한번. 젓갈 한 번 넣고 한 입 먹고 버무리고 또 한 입 먹고 오호호홋 요건 싱겁네. 국물을 짜게 해서 넣자. 그래 좋아 여기 생수 대령이요~


무려 세 통을 담갔다. 이만저만한 실력이 아니다. 하. 난 김치를 꽤 늦게 배웠다. 결혼 초반 직장생활을 해서일까. 시어머니고 친정엄마고 나의 김치통에 항상 가득가득 김치를 주셨다. 특히 우리 시어머니 김치는 너무 맛있어서 그냥 얻어먹기만 했다. 김치 담그기의 포기가 자연스레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제 두 분이 모두 연세가 많이 드셨다. 더 이상 얻어먹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나의 실력이 담가서 보내드릴 처지는 또 아니다. 여하튼 친구들은 내내 담가먹다가 이제는 편하고 싶어 또 식구도 없어 그냥 사서 먹는단다. 뒤늦게 김치 만들기에 빠진 남편과 나는 수시로 김치를 담가 먹고 김장도 척척 한다. 단 둘이서. 엣 헴.  


그런데 김치 담글 때마다 뭐가 잘못된 건지 한밤중 두세 시까지 거실 한가득 신문지를 깔아놓고 TV를 켜놓고 난리 법석이다. 그래도 이렇게 밤을 꼴딱 새워보긴 처음이다. 그러면서 실력이 늘지 않을까? 비록 밤을 꼴딱 새웠지만 이제 서서히 익어가면서 어떤 맛을 내줄까 가슴이 설렌다. 기분도 좋아 서로 "수고했어." 속삭여주며 손을 꼭 잡고 벌건 대낮.. 은 아니고 환한 새벽에 잠을 청한다. "늦으면 어때. 밤 꼴딱 새면 어때. 출근할 일도 없는데. 내일 늦게 일어나면 되지 뭐." 하하 은퇴한 남편의 통쾌함이다. 벌써부터 익는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아, 맛있겠다. 빨리 익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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