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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뜰 May 27. 2020

특별한 날 전혀 안 특별하게

1982년 5월 27일에 했으니까 2020년 5월 27일 38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와 결혼한 지. 오늘이 그러니까 우리의 제38회 결혼기념일이다. 나도 몰랐고 그도 몰랐다. 우연히 달력을 보던 그가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응? 혹시? 결혼기념일! 하하 그렇게 해가 중천에 뜨고서야 알았다. 보통날과 똑같이 난 일찍 일어나서 그가 깨기 전 나만의 특별 자유시간을 즐기고 느지막이 일어난 그와 함께 고구마, 쑥떡, 토스트, 토마토 주스, 사과 등을 먹고났을 때였다. 그렇다. 어느 순간부터 생일도 결혼기념일도 그 무수한 특별한 날도 그냥 보통의 하루 되어 흘러간다. TV 드라마에서 짜장면을 너무 맛있게 먹는다. 짜장면이나 먹으러 갈까? 에이 무슨. 그냥 집에서 맛있게 밥해먹지. 집밥귀신 그가 좋아할 답을 나는 알고있다.   


그가 커피를 맛있게 타 온다. 그만의 특유의 믹스커피. 한약 같다며 원두커피는 싫어하고 나름 믹스커피 제조에 열을 올리는 그. 라떼 커피믹스와 라이트 커피믹스를 절묘하게 섞어 아주 맛있는 커피를 만들어낸다. 우와 어떻게 이렇게 맛있지? 하는 나의 칭찬에 식후 커피는 언제나 그의 담당이다. 여보~ 커피~ 하면 대령하는 것이다. 그의 커피가 최고로 맛있다니까 그는 정말 커피를 열심히 탄다. 음하하하 영악한 나. 신랑 부려먹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우와 여보는 어쩌면 이렇게 빨래를 잘 개켜? 난 아무리 힘을 줘도 그렇게 짝짝 안 펴지던데~ 칭찬은 그로 하여금 모든 빨래를 개키게 만든다. 음하하하 칭찬으로 모든 집안일을 철저히 분업화시키는 나. 세탁기 돌리는 건 나의 몫, 다된 빨래 꺼내오는 건 그의 몫. 와이? 무거우니까. 거실에 쫘악 펼쳐놓고 쫙쫙 펴는 건 그의 몫. 와이? 그는 힘이 좋아 정말 쫙쫙 잘 펴니까. 베란다로 나가 햇빛에 뽀송뽀송 잘 마른 지난 빨래들을 걷어 오는 건 나의 몫. 그가 펴 놓은 것들을 베란다로 가져가 너는 건 나의 몫. 걷어놓은 빨래를 개키는 건 남편 몫. 그걸 옷장 속 제자리 찾아 넣는 건 나의 몫. 푸하하하 그렇게 칭찬으로 살살 구슬려 24시간 집에 함께 있는 은퇴한 남편에게 집안일을 슬슬 넘겨주고 있다. 으흐흐흐 영악한 나. 


그래도 우리 이 정도면 잘 살고 있는 거지? 


그럼 그럼. 그래 이렇게만 살면 된다. 함께 운동하고 편하게 뒹굴뒹굴 집에서 보내며 각자 좋은 거 하고 그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하겠어. 오늘 저녁때 동문회가 있다는 그는 가지 말까? 한다. 왜? 오늘 특별한 날인데 무어라도 나가서 먹어야지. 집밥 싫어하잖아. 그리고 오늘만 날인가 뭐. 매일 같이 있는데 오늘 못 먹으면 내일 먹으면 되지. 하며 나는 그가 오늘 저녁 동문회에 가게 한다. 지금 나가서 짜장면 먹고 영화도 보고 그럴까? 내가 한발 물러서니 어라? 집밥귀신님께서 되레 인심이다. 하하 그러나 집에 좋은 TV 있는데 볼 거 천지 빼 깔인데 무얼. 그래 편하게 집에 있자. 이따 점심이나 잘 차려먹자고. 그렇게 각자 하던 일로 돌아간다. 나는 노트북 자판을 두들기고 그는 바둑을 보고. 하하 이 또한 우리의 특권이다. 특별한 날을 하나도 안 특별하게 보낼 수 있는 거. 우리 나이에나 가능한 거 아닐까. 하하 그렇게 오늘 제38회 결혼기념일에 우린 집에서 뒹굴뒹굴 마냥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음하하하 


<사진: 시애틀의 사진 잘찍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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