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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뜰 Jul 12. 2020

하늘이 무너졌다

너무 어린 나이에 실패했다

합격했는데... 너는?


K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가 받아 K가 집에 없단다. 나를 밝히며 합격여부를 여쭈니 합격했다며 나는 어떻게 되었느냐 물으신다. 떨어졌어요. 겨우 말을 마치고 나니 엉엉 쏟아지는 눈물을 감당할 수가 없다. 엉엉 엉엉. 한일관에서 아빠가 불고기를 사주셨다. 엄마도 오빠도 남동생도 함께다. 그런데 난 엄마 아빠에게 죄송하다. 내 동생은 특히 누나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컸는가 보다. 아, 미치겠다. 난 식구들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난 떨어졌다.


K는 나의 단짝 친구다. 빨강머리 앤을 읽었냐는 질문으로 시작된 우리의 만남은 중학교 2학년 때였고 너무도 책 이야기가 잘 통해 급속히 친구가 되었다. 그것도 아주 단짝 친구가. 세계명작 해설해 놓은 책을 줄 쳐가며 꼼꼼히 읽고 무슨 책을 읽을지 골라냈다. 그 목록을 들고 서점에 가서 책을 샀고 읽었고 토론했다. 그리고 글을 썼다. 오만과 편견을 읽으며 다아씨의 매력에 폭 빠졌으며 데미안을 읽고 알을 깨고 나오는 것에 대해 깊이 토론했다. 시험 때면 함께 밤을 새워 공부했다. 2층에 그 애 단독 방이 있어 주로 그곳에서 밤을 새웠다. 한참 공부하고 있으면 그 애 엄마는 새우깡과 주스를 가져다주시며 공부 잘하라고 하셨다. 그걸 먹고는 잠시 휴식한다며 2층 거실에 있는 피아노로 가 트원폴리오의 하얀 손수건을 화음 넣어 불렀다. 내가 멜로디를 하고 그 애가 화음을 넣었다. 그 어떤 노래고 그 애는 화음을 넣을 줄 알았다. 헤어지자 보내온 그녀의 편지 속에~  긴 머리 소녀야~  무섭지도 않은가 봐 밤배 저어가네~  끝없이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는 쿨쿨 잠을 잤다. 하하


그 애랑 나랑은 언제나 꼭 붙어 다녔다. 과외도 같이 했다. 서울대 약대 생이었던 예쁜 선생님 방에서 우리는 과외를 했다. 광화문 바로 옆 경복궁 가는 길 건너편에 있던 마당 깊은 한옥 그곳 별채가 선생님 방이었고 나와 K 그리고 두 명이 더 함께 공부했다. 공부하다 보면 나이 많은 아주머니가 떡볶이를 해주시며 우리들 공부하는 걸 웃으며 엿보곤 했다. 고교입시 때문에 일찍부터 우린 과외공부를 했다. 언니 같은 그 선생님과 우린 잘 통했다. 선생님 생일을 기념해 우리는 명동 코스모스 백화점에 가서 선생님께 꼭 어울릴 것 같은 연두색 핸드백을 사서 깜짝 선물했다. 선생님은 보답으로 우리에게 양식을 샀다. 광화문 육교 앞 덕수제과 옆 높은 빌딩의 맨 꼭대기층에 있던 경양식집. 거기서 우리는 양식을 먹었다. 혹시나 실수할까 봐 양식 먹는 법을 책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갔다. 나이프는 오른손에 도구는 맨 끝에 있는 것부터 빵은 손으로 뜯어서 등등 푸하하하


새우깡이 막 나오던 시절 과외 공부하다가도 툭하면 새우깡 그 커다란 봉지를 뜯어 수북이 쌓아놓고 수업 내내 아삭아삭 집어먹곤 했다. 한겨울엔 선생님 집 앞 구멍가게 둥근 기계에서 따끈하게 쪄 나오는 호빵을 사 먹었다. 호호 불면서 먹던 그 맛있는 호빵. 그 애는 야채를 나는 단팥을. 중2 때 같은 반에서 우정을 키워가던 우리는 3학년 때는 다른 반이 되었다. 그래도 친하게 지내던 우리는 여고 생활은 꼭 함께 하기로 했다. 경기? 이화? 일단 학교를 가보자. 이화여고를 먼저 갔다. 아 너무 예쁘다. 여고 생활은 이런 데서 해야지. 이화여고를 가자. 그래도 경기여고도 온 김에 가보자. 아 너무 삭막해. 그래도 수영장이 있네! 우리를 유혹하지만 너무 운치 없다. 우리 꼭 이화여고 가자. 손가락 걸고 약속했다.


그러나  나의 입시원서는 엄마와 선생님께서 모두 써놓았다. 경기여고로. 최고 여학교를 보내고 싶은 엄마 마음과 반에서 한 명은 경기여고를 보내야 하는 담임선생님의 의견 일치로 입시원서는 나와는 상관없이 그쪽으로 결정되었다. 난 그 애와 이화여고 가기로 철석같이 약속했는데. 난 이화여고 갈래요. 그러나 그것은 통하지 않았다. 심통 난 채로 입시에 응했고 그 결과는 낙방이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접하는 실패. 큰 충격이었다. 정말이지 미치고 죽을 지경이었다. 너무도 괴롭기만 했다. 불합격의 설움을 점점 톡톡히 느껴갔다. 도서관에 가기도 싫었다. 우울했다. 내 옆자리에 경기여고 1년생이 앉아있었다. 막 쏴대 주고 싶었다. 욕해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모두 싫기만 했다. 정말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하늘이 무너졌다. 그 애는 붙었고 나는 떨어졌다.


사람들이 정신을 더 쳐줘 이화를 더 쳐줘?


그 애는 내게 그렇게 가슴 아픈 말을 했다. 그건 그랬다. 그때 YMCA에서는 씽어롱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노래를 하나씩 배웠었다. 노래하기를 좋아하던 그녀와 나는 학교는 달라도 함께 그곳에 다녔다. 그런데 그녀의 이화여고 교복은 모든 사람들이 알아봤지만 나의 정신여고 교복은 아무도 못 알아봤다. 그녀는 이화여고라고 특별 대접을 받는 것만 같았다. 속상했다. 나는 우리 반 일등 K는 옆반 일등. 그러나 그 애는 체력장에서 만점을 못 받아 경기를 지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게 그렇게 속상할 수 없었다. 그런 나의 마음이 그녀에게 전달된 걸까. 어느 날 그녀가 내게 말했다. 사람들이 이화를 정신보다 훨씬 더 쳐준다고. 유치하지만 어디를 사람들이 더 알아주느냐가 그때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했다.


실패!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다. 그러나 내가 이때 턱 하니 합격했다면? 시험 보는 족족 모두 합격했다면? 꽤나 교만해지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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