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3년전이라니. 아, 참 세월 빠르다.
빨리 죽어야 데는데, 십게 죽지도 아나고 참 죽겠네
시애틀 사는 친구가 할머니들이 막 한글 배우며 쓴 시인데 매우 감동적이라며 보내왔다. 문득 할머니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던 때가 생각나 책장을 뒤적여 본다. 오호 있다. 그런데 2006년이다. 어느 새 13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잠시 그 때 그 교실로 돌아가 본다.
자~ 1번팀 앞으로 나오세요.
오늘은 초등학교 교과서 2학년 2학기 제4과 배우는 날, 본문 내용을 리듬 맞춰 제대로 읽으실 때까지 내가 먼저 읽고 따라 읽으시게 하고 한 명씩 읽게도 하고 세 명씩 읽게도 하고 자꾸자꾸 읽게 한다. 그렇게 여러 번을 하여 어느 정도 본문 내용을 익혔다 생각될 때 나는 칠판 앞으로 세 분을 불러 세운다.
에그머니나, 칠판에 글을 쓰라고? 못써. 나가서 어떻게 쓰라고 못해. 안 나가!
오늘 출석은 모두 12명. 3명씩 팀을 짜 1번팀, 2번팀... 각 팀의 이름을 정해준다. 부끄럽다고 안나오시겠다며 자리에서 꿈쩍을 않으신다. 그렇다고 포기할 나일까? 아니다. 할머니 자리로 간다.
일어나세요. 나와보세요. 하실 수 있어요.
상냥하게 미소지으며 어머님께 하듯 살며시 안는 듯 자리에서 일으켜 세운다. 손을 꼭 잡은 채로 칠판 앞까지 모시고 나온다. 성공. 1번팀, 모두 칠판 앞에 섰다.
자, 한 번 써보세요. 지금 막 여러 번 읽으신 겁니다.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아주 조그맣게 쓰시는 분, 너무 커다랗게 쓰시는 분. 글씨만 다양한 게 아니다. 옆 사람 것을 힐끗힐끗 훔쳐보는 분. 이거 맞나? 나를 바라보며 물어보시는 분. 쓰는 태도도 다양하시다.
포도송... 송자에서 막혀 그 다음을 못 잇는 분.
송... 송...? 자 이리 와 보세요
난 그 분의 손을 잡고 칠판 옆 모음과 자음을 모아 놓은 한글도표 앞으로 간다.
따라하세요. 기역 니은 디귿 리을....
기여어억....
하이고~ 모기소리마냥 쬐끄맣게 겨우 말씀하시는 할머니께 나는 호통치듯 말한다. 크게! 크게! 크게! 자신있게 자음을 모두 따라 부르시게 한 후 아 야 어 여 오 요 우 유.... 모음도 모두 따라 부르시게 한다. 그리고는 묻는다.
자, 대답하세요. 기역에 아가 붙으면?
머뭇거리신다. 나는 도표 속의 가를 가리키며 가! 크게 소리친다. 가... 조그맣게 답하신다. 부끄러워하신다. 나는 또 다그친다. 크게 하세요. 가!!! 가~ 겨우 들릴락말락한 목소리가 나온다. 크게!!!! 조금 커진다. 더 크게!!!!
조금 더 커진다.
니은에 아가 붙으면...?
그런 식으로 히읗까지 이어간다. 처음엔 부끄러워 머뭇머뭇 말도 못하고 글씨를 코딱지만하게 아주 작게 칠판에 쓰던 60에서 78세까지의 나의 제자분들이 1번팀 나오세요~ 외치는 나의 구령에 에고~ 없는 집 제사 닥치듯 내 차례가 닥쳐요. 에구에구 궁시렁 거리시면서도 얼굴은 밝고 환하게 기꺼이 칠판 앞으로 나오신다. 초등학교 교실 안에서 잠시 세월도 나이도 모두 내려놓고 여덟살 아홉살 초등학생이 되어 깔깔깔 웃으며 가나다라를 외친다. 난 우리 어머니 만큼이나 나이가 드신 분들 앞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다.
엄마~ 크게 불러보세요.
하얀 종이를 나누어 주고 그 위에 무조건 엄마를 쓰게 한다. 이응에 어를 붙이세요. 그 아래 미음을 써 넣으세요.
엄 되었지요? 엄마가 다 써졌다. 나눠드린 흰 종이에 모두 큼지막하게 엄마를 적으셨다. 자 이제 엄마! 다시 크게 불러보세요. 어릴 때 초등학생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엄마! 를 크게 불러보세요. 그리고 엄마에게 하고픈 말을 그 무엇이고 적어보라한다.
어마... 공부도 안 시키꺼면서 왜 날 나아가지구...
엄마...보구시퍼여.
엄마...
받침도 엉망이고 글자 자체가 다른 것으로 씌어있기도 한데 그런데 난 그분들이 하고자 하는 말을 그 엉망의 글 들 속에서 읽어낼 수가 있다. 신기하다. 전혀 글이 아닌데 그런데 무엇을 말하고자 하시는 지 술술 읽힌다. 이건 이렇게 쓰고 저건 저렇게 쓰고...정확히 쓰는 법을 함께 칠판에 적어가며 공부한다.
자, 오늘은 아들에게 하고픈 이야기를 해보세요.
아들아~ 로 시작합니다.
아들아... 여기까진 칠판 보고 그대로 잘 적어놓으신다. 그 다음 보고싶그나에서 밥을 못해주어서 미안하구나. 사랑한다 등등 아들에게 하고픈 말들을 한 가득 쏟아놓으신다. 아직 전혀 글 같지도 않지만
일번팀 나오세요~
난 또 소리친다. 아무도 머뭇거리지 않는다. 벌떡 일어나 칠판 앞으로 나오신다. 없는 집 제사맹키로 자주 돌아와요. 에구에구 여전히 궁시렁 대시면서도 동작은 빠르게 명랑하게 어느 새 칠판 앞에 서 계시는 육칠십대 나의 제자님들. 절대 쓸 수 없다던 한글 작문을 아들아, 며늘아, 손주야... 마구 주어지는 제목따라 엉망진창 글모양으로라도 하고픈 말을 적어내는 나의 제자님들. 기다리세요, 곧 옵니다. 아들에게 며느리에게 손주에게 직접 편지를 쓸 수 있는 날이. 열심히 하자구요. 그래서 재밌는 소설책도 읽어야지요.
제일 성실하게 열심히 공부하시던 78세의 할머니가 생각난다. 지금은 90세가 넘었을테니 어쩌면 돌아가셨을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세월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