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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뜰 Feb 01. 2021

시카고에 함박눈이 펑펑

시카고에서 온 글


나에게는 초등학교 동창 중 해외에 사는 애들과 함께 하는 카톡방이 있다. 시애틀의 사진 잘 찍는 아이, 아르헨티나의 사업 잘하는 아이, 시카고의 글 잘 쓰는 아이, 서울의 산 잘 타는 아이가 그 방에 있다. 눈이 많이 온다며 시카고의 글 잘 쓰는 아이가 오늘 아침 카톡 문을 연다. 그냥 나가서 뽀드득 눈을 밟아 보라니 뽀드득이 아니라 푹푹이란다. 한때는 낭만의 대명사였던 눈이 이젠 거추장스러운 존재라며 우리의 열정도 식어지는 것 같다고 한숨을 푹푹 쉰다. 나중에 더럽고 힘들어 눈 오는 것 싫다며 아르헨티나의 사업 잘하는 아이가 거든다. 눈 덮인 산에 가는 걸 좋아한다고 서울의 산 잘 타는 아이가 말한다. 대학교 때 겨울에 같은 과 애들하고 원주 치악산에 간 적 있는데 죽다 살아났다며 시카고애가 추억한다. 눈도 펑펑 쏟아져 밖에도 못 나가는데 그때 이야기나 들려달라고 내가 조른다. 서울의 산 잘 타는 애가 글은 자꾸 채근한다고 바로 생산되는 게 아니라며 작심과 시심들이 자연히 우러나와야 하니 진득하게 기다리라 한다. 잡지사 편집자 인양 마감 시간에 쫓기듯 하냐며 그냥 여유 있게 술 한잔 하다가 어느 날 문득 펜을 들게 내버려두라고도 한다. 그런데 잠잠하던 시카고의 글 잘 쓰는 아이가 불쑥 글을 올린다. 푸하하하 바로바로 대학 때 죽을 뻔했던 그 이야기다. 그럼 그치~ 글은 졸라야 나온다고요~ 하하



우리 과에 홍일점 여학생이 있었는데 얼굴도 예쁘고 나보단 3살 아래였는데 (난 복학생) 형 형 하면서 잘 따라 다른 남학생 3명과 함께 지방 소도시에 사는 그 친구에게 연락 없이 무조건 찾아갔는데 걔 엄마가 반은 반겨주면서도 반은 께름칙하는 눈초리로 강가에 스케이트 타러 갔다고 해서 강가로 가보니 저 멀리 친구들과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어..


우리 넷이 큰소리로 이름을 불러대니 알아보고 반갑게 여기까지 웬일이냐고... 암튼 반갑게 만나 당구장으로 가 가볍게 당구 한 게임 쳤는데 이상한 건 옆에서 치던 우리 또래 친구들의 분위기가 좀 이상하더라 했는데 흘끔흘끔 쳐다보더니 한둘이 나가더라고..


그러더니 좀 있으니 그중 한 친구가 우리 여학생에게 뭐라 조용히 얘기하더라고... 그러더니 얘가 잠깐 나갔다 온다고.. 다시 돌아온 그 애 표정이 왠지 불편해 보여 왜 그러냐고 물으니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서 그냥 마치고 나와 우린 숙소로 가고 얘는 집으로 가서 내일 아침에 만나 치악산을 등정하기로 했는데 얘가 지 사촌이 대학 산악부장이라고 아무래도 겨울산이니 동행하는 게 나을 거 같다고 해서 그럼 땡큐라고 했어(나중에 얘기지만 이 친구 아니었으면 우리 다 몰살당했을 뻔)..


숙소로 돌아온 우린 술 한잔 하러 나가려고 했는데 여관 전화로 프런트에서 누가 우리를 찾는다고.. 우릴 아는 사람이 없는데 누군가 하고 나가보니 아까 당구장에서 봤던 친구들이 네 명 정도 와서 기다리고 있어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아까 표정과는 달리 친근한 표정으로 여기 원주까지 오셨는데 지들이 술 한잔 사겠다고.. 뭔가 어리둥절한 상황이었지만 마침 술 한잔 하러 나가려던 참이었고 우리도 궁금해 그러라고 하며 가까운 포장 마차로가 니 못 보던 친구 하나가 우릴 맞이했는데 알고 보니 그 친구가 우리 여학생 남자 친구이었나 봐... 그제야 좀 감이 오더라..


그 당시 그곳 소도시만 해도 바닥이 좁아 느닷없이 남자네명과 얘 하고 당구장에 오니 이 남자 친구이라는 남자의 친구들이 바로 연락한 듯... 수상한 넘들과 니 여자 친구가 어울려 다닌다고..ㅎㅎ 일단은 좋게 대해서 좋게 끝내려고 우린 같은 과학 생들이 고 치악산 등정이 목적이고 온 김에 만나려고 했던 거라고 하니 안심한 듯 술. 안주값도 내줘서 잘 얻어먹었어..ㅎㅎ


암튼 아침에 일어나 약속 장소에 가니 등산 대장과 그녀가 기다리고 있어 같이 구룡사로 갔는데 등반대장이 영 우리를 못마땅한 눈초리로 보는데 그냥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이 맘에 걸린 듯.. 멋도 모르는 우린 노닥거리며 배낭도 없이 비닐봉지에 음료 수하고 김밥만 가지고 있었는데 등정 초반부터 눈에 푹푹 빠지며 한참을 올랐는데도 반도 못 왔다고.. 중간부터 느낌이 불안해지기 시작...


사다리병창이라는 험한 지역을 통과해 돌탑이 있는 정상에 오르니 벌써 황혼이... 오후 네시쯤.. 꽝꽝 얼은 김밥과 음료를 허둥지둥 먹고 상원사 쪽으로 하산하는데 땅거미가 몰려와 어두워지면서 앞이 안 보이는데 등반대장이 가져온 랜턴 불빛 하나에 의지한 채 조난 일보직전... 등반대장의 뒤꼬리만 붙잡고 어기적어기적 네발. 두발로 내려오는데 중간에 무당 기도처 발견 무당이 기도하던 중에 따뜻한 물과 사탕을 주어 간신히 언몸을 녹이고 다시 내려오는데 거의 다 내려오니 그녀가 탈진.. 걷질 못해.. 우리 친구 중 하나가 업혀라 하더니 엎드리고.. 근데 업고선 안 가고 잠깐 있더니 안 되겠다. 내려라 하더라고 너무 무겁다면서..ㅎㅎ


할 수 없이 내가 업었는데 축 늘어지니 무겁긴 무겁더라.. 그래도 제대한 지 그리 오래지 않아 체력이 좋을 때라 삼사백 미터 떨어진 버스정류장 까진 간 듯... 그녀는 미안하고 무안하기도 했는지 거의 다 와선 형 고맙다고 이젠 괜찮다고.. 등반대장은 중간에 자기네 집으로 간다고 빠지고.. 암튼 버스 타고 그녀 집 근처에 내려 들어가니 엄마가 노심초사하고 있었던 듯... 무남독녀 외동딸이라 걱정 한참 하고 있었나 봐.. 들어와 커피 한잔하고 가라는 말씀에도 우린 미안하고 죄스러워 허발 대며 괜찮다고 도망치듯이 헤어진 기억이 나네... 정말 겨울산을 우습게 봤다가 혼찌검이 났네...ㅎㅎㅎ


(사진:시카고의글잘쓰는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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