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꽃뜰 Feb 24. 2021

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나머지는?"  백작이 쓰던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귀한 물품들. 그들은 간단하게 대답한다. "인민들 재산 됩니다." 하는 수작들이라니. 마치 닥터 지바고를 보는 듯하다. 혁명이 일어나 호텔 스위트룸 가장 넓고 화려한 곳에 살던 백작에게 골방으로 옮겨 살되 평생 호텔 밖으로는 나갈 수 없다는 연금형이 떨어진다. 그러나 전혀 그 늠름한 기개가 사라지지 않는 백작. 기꺼이 종탑 아래 아주 작은 골방으로 옮겨간다. 사는 곳이 변했다고 절대 주눅 들지 않고 유모어와 인간에 대한 다정함이 살아있는 백작. 아 멋지다. 


12시가 되자 정오의 시작을 알리는 첫 종소리가 특유의 감미로운 음향으로 울렸다. 백작의 의자 앞다리가 쿵 하고 바닥을 찧었고 몽테뉴의 책은 공중에서 두 번 돌아 침대보로 떨어졌다. 시계종이 네 번  울릴 때 백작은 종탑의 계단을 돌았으며, 여덟 번 울렸을 때는 이미 로비를 지나 아래층으로 걸음을 향하고 있었다. 그가 매주 한번씩 찾는 메트로폴 호텔의 독보적인 이발사 야로슬라블과의 약속이 잡혀 있기 때문이다. 너무도 경쾌한 묘사 아닌가. 


아 큰일 났다. 메트로폴 호텔 이발소에서 구겨진 재킷을 입고 있던 남자. "내 순서요 내가 먼저 왔소." 오래전부터 호텔 스위트룸에서 살던 백작은 매주 한 번 이발소에 예약되어있다. 자연스레 이발사는 12시가 넘었으므로 미리 와 앉아있던 구겨진 재킷을 입고 있던 남자보다 백작을 먼저 앉혔던 것이다. 예술가적 이발사는 백작 머리 다듬기에 여념 없는데 그 남자 다짜고짜 백작 멱살을 쥐고 자기가 먼저 왔는데 왜 먼저 자르냐며 백작의 자랑인 멋들어진 콧수염 한쪽을 잘라버린다. 노동조합 들어가 파업을 주도한 인민계 거물이다. 에구.


"아이코 깜짝이야." 백작이 생선요리를 음미하며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뜬 순간 코앞에 서있는 금발 소녀. "아저씨 콧수염 어디 갔어요?"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그게 말이야 여름을 보내려고 제비처럼 다른 데로 날아갔단다." 하하 유모어 넘치는 백작의 대답이라니. 9살 소녀 니나와 백작이 친구가 되는 순간이다. "아저씨 정말 백작이어요? 성에 가봤어요? 무도회 가봤어요? 공주님 만나봤어요?" 하하 아이코 귀여워라. 공주에 관심 많은 니나에게 백작은 공주 되는 법을 가르친다.   


성스러운 금주 행위는 영혼의 활력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할 일은 너무 없고 할 일 없이 때우기엔 시간이 너무너무 많아서 인간 감정의 공포스러운 수령이라 할 수 있는 권태감이 계속해서 백작의 마음의 평화를 위협했다. 와우 권태감을 얼마나 잘 묘사했는가. 하하 


"백작님~ 커피 한잔 하시겠습니까?" 커피 만드는데 자부심을 갖고 있는 건물 잡역부 아브람이 직접 커피를 손으로 갈아 내려 백작에게 대접한다. 그리고는 함께 종탑 꼭대기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며 옛날 어릴 때를 회상한다. "아버지가 영지 관리인이었죠." 커피를 대접받으며 조용히 그의 이야기를 듣는 백작. 그의 땅이었던 드넓은 사과밭에 대한 향수를 함께 나눈다. 그 누구와도 평화롭게 대화를 나누는 백작. 아, 멋진 남자. 


화려했던 백작과 골방의 미시카. 책만 읽던 미시카가 노동계의 거물이 되어 바빠진 반면 할 일 없는 백작. 즐거운 미팅 이야기들은 주로 백작이 전했는데 세상이 바뀌어 이젠 미시카가 호텔 골방의 백작에게 많은 바깥세상 이야기를 전한다.


백작의 우아한 와인 고르기도 끝이 난다. 그런 건 사치라며 인민들은 모든 와인을 레드냐 화이트냐 둘로만 구분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고유의 라벨이 없어지고 레드냐 화이트냐 둘로만 구분해놓은 와인 저장 창고의 그 많은 와인들 중에서 손으로 더듬어 숫자가 새겨진 병을 골라내 따로 챙겨놓는 백작. 몸에 밴 와인 전문가 다운 모습이 쓸쓸하게 다가온다. 


9살 소녀로 백작과 호텔 방방을 뒤지고 다니던 니나는 아버지를 따라 당 간부에게 제공되는 커다란 아파트로 이사 간다. 이별 선물로 백작은 귀한 오페라 쌍안경을, 니나는 호텔방 마스터키를 서로 나눈다. 몇 년 후 호텔 로비에서 우연히 마주친 니나는 그러나 더 이상 공주에는 관심이 없는, 새 개혁 제도에 폭 빠져있는 13살 소녀가 되어있다.   


"각하!" 잡역부 아브람은 너무 흥분해있어서 백작이 지붕과 허공이 만나는 지점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도 전혀 놀라는 표정이 아니었다. 하하 백작이 자살하려는 순간을 이렇게 경쾌하게 묘사하다니. 푸하하하 "꼭 금방 돌아올게." 도시에 인사하며 아브람 따라 떠나는 백작. 정말 다행이다. 


받는 사람이 동무로 되어있을 수도 있지만 백작의 성과 이름이 고스란히 -무심한 듯 단정하고 비교적 쓸쓸하며 가끔은 시비를 거는 듯한 필체로- 쓰여 있었다. 동무라는 매우 간단한 단어. 잘생긴 젊은이가 동료들을 보내고 니나를 기다리는 걸 보았다. 그건 어떤 이념 아래서도 통하는 좋은 수였다. 하하 백작은 그 잘생긴 젊은이가 니나의 남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니나는 그 우두머리 아닌 남자와 결혼했고 어려운 신세가 된다.


"당신은 내가 모욕당하는 장면에 언제나 곁에 계시네요." 화려한 배우였다 지금은 몰락한 안나가 젊은 감독에게 식사 대접을 하고 무언가 작품을 얻어낼까 자기 방으로 유인하나 약속 있다며 거절당한다. 마침 그것을 목격한 백작에게 "약속 있다고 나가네요" 쑥스러워 얼버무리니 "나는 평생 나갈 일이 한 번도 없었어요." 백작이 웃으며 응대한다. 그렇다면! 하하 기꺼이 함께 감독을 꼬시려던 그 방으로 올라간다. '초라한 자의 연맹'이라 명명하며 감독을 위해 없는 돈에 안나가 준비한 캐비어니 화려한 안주와 술을 마시며 각자의 화려했던 시절을 추억한다. 힘을 얻은 안나는 그대로 추락하지 않고 진지하게 노력하여 본격 예술가로 거듭나 재기에 성공한다. 이래저래 몰락한 처참한 상황의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백작. 아 멋진 남자.


한밤중에 벌어지는 주방장 에밀, 관리자 안드레이, 웨이터 주임 백작 세 명의 밀회. 각자 공수해온 것들로 주방장 에밀이 기막힌 요리를 만들고 그것을 먹으며 옛날을 추억한다. 지금 이 순간 이 시간 이 우주가 더할 나위 없이 좋다며 그들은 행복하다.  


"이젠  뭘  할까요, 알렉산드로  아저씨?" 니나의 딸 5살인 소피아. 아 화려할 듯했던 니나에게 어찌 그런 일이. 시베리아로 쫓겨난 남편을 찾아가야만 한다고 딸을 맡길 곳이라곤 백작님밖에는 아무도 없다고 느닷없이 찾아와 15분 만에 딸을 맡기고 떠나는 니나.  


"정말이지 이젠 뭘 해야 하나?" 침대도 정리하고 비스킷도 다 먹어치운 두 사람 앞에는 하루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16시간 960분 57600초! 백작과 소피아의 함께 하는 삶이 시작된다. 소피아가 다쳤을 때 백작이 기억하는 모스크바 최고 병원으로 달려가나 그건 30년 전 옛이야기. 이젠 노숙자들의 낡은 병원이 되어있어 실망한다. 그러나 그가 매너 담당 과외공부를 해준 당 간부 오시프가 보내온 모스크바 최고의 전문의 덕에 소피아는 시립병원으로 옮겨져 최고의 치료를 받는다. 누구를 만나건 신뢰와 사랑을 받는 백작. 아, 멋진 남자. 


파리로 연주여행 떠나는 소피아에게 이미 64세가 된 백작은 두 가지 조언을 한다. 첫째. 인간이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지 못하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 둘째. 가장 현명한 지혜는 늘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다. 카사블랑카 영화와 절묘하게 겹쳐지는 백작과 소피아의 탈출. 한 작품의 완성에 4년의 집필과 1년의 독서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에이모 토울스. 어쩜 이렇게 재밌으면서도 품위 있게 글을 쓸까. 비참한 상황에 내몰렸지만 전혀 품위를 잃지 않고 성실하게 하루하루 살아간다. 금화가 은근히 숨겨져 있는 것 또한 매력이다. 마지막에 떠나면서 친구들에게 편지와 함께 금화를 선물하는 장면도 참 흐뭇하다. 망명하여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된 주인공. 좋다. 아 참 좋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