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꽃뜰 Mar 01. 2021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프레드릭 베크만

정말 코믹하게 표정을 짓고 작가 소개 프로필에 등장한 스웨덴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 30대 중반의 유명 블로거이자 칼럼니스트인데 '오베라는 남자'를 블로그에서 쓰기 시작하다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단다. 블로그를 하다 이렇게 되기도 하는구나. 와우.


하하 시작부터 등장하는 만화처럼 그려진 아파트 입주민 표. 할머니네 집이 맨 꼭대기 층이 구나 만 알고 시작한다. 세상에 겨우 일흔일곱인데 노인이라고. 일흔일곱이면 요즘 청춘인데 너무 파파 할망구 취급이다. 그래서인지 77세 할머니와 7세 엘사와의 대화가 영 거슬린다. 그런데 헉. 엘사의 목도리가 학교에서 상급생에게 괴로움 당하다 찢어진 것. 할머니는 엄마가 걱정할 테니 담 넘다 찢어졌다 하자며 엘사와 비밀 동맹을 맺는다. 음, 생각이 깊은 할머니구나. 다시 보인다. 나쁜 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으면 좋은 걸로 덮어버려야지. 음, 할머니의 말 하나하나가 읽어갈수록 아주 매력적이다.


엘사의 슈퍼 히어로가 바로 할머니였다. 아하. 깰락 말락 나라. 미아 마스 왕국. 그랬구나. 엄마 아빠의 이혼으로 불안했던 7살 엘사에게 든든한 영웅은 바로 할머니였구나. 할머니는 '거짓말'을 '또 다른 버전의 진실'이라고 한다. 하하. 그거 말 되네. 또 다른 버전의 진실. '지어냈다'는 말보다는 '현실을 살짝 수정했다고 말하라' 하하 정말 통쾌한 할머니다. 하고 싶은 일은 뭐든 한다. 오케이. 기본적으로 엄마는 질서 정연하고 할머니는 뒤죽박죽이다.


할머니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야기를 하지 않는 법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엘사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이야기를 듣지 않는 법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푸하하하. 문장 문장 웃음 터지게 하는 미묘한 것들이 숨어있다. 하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질 않는다.



맨 앞 장에 나와있는 엘사네 아파트 입주민 표. 알프? 어디 살더라? 책을 읽다 낯선 이름이 나오면 맨 앞장으로 휘리릭 넘겨 이 입주민 표를 참고하게 된다. 오호 2층이었구나. -이렇게.


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나도 슬퍼. 우라지게 슬프다고! 너 혼자 속상한 거 아니니까 그렇게 싸가지 없는 애새끼처럼 굴지 마!" 헉. 엄마가 이성을 잃고 소리 지른다. 우아. 다른 약속에는 절대 늦지 않는 아빠가 엘사를 데리러 올 때만 늦고, 다른 약속에는 항상 늦는 할머니가 엘사를 데리러 올 때만 절대 늦지 않는 게 아이러니라고 말하는 엘사. 엄마랑 아빠는 이혼했고 엄마는 새 남자의 아이를 배고 있고 아빠는 2주에 한 번씩 엘사를 당신 집으로 데리고 가 당신의 새 가족과 놀게 한다. 아. 외로운 7살 엘사.


엘사는 난생처음으로 괴물과 맞닥뜨린다. 어둠이 하도 짙어서 온 동네가 암흑의 양동이 속으로 처박힌 듯한 그런 겨울밤이다. "우리 할머니가 미안하다면서 안부 전해달라고 했어요!" 엘사는 1층 괴물의 집 우체통 구멍을 통해 있는 힘껏 외친다. 아, 모지? 이 괴물은 모야? 키는 무려 2미터가 넘는 듯하고 머리도 길고 수염도 길고 그렇지만 집은 아주 깔끔하다. 씻고 또 씻고 사람만 다녀가도 알코올로 닦아낸다. 괴물은 청결 강박증이다. 워스 검은 개가 반가움에 얼굴을 핥으면 자기 얼굴이 침으로 오염되는 게 두려워 기겁을 하며 도망친다. 그런 괴물에게 할머니 편지를 전하지만 그뿐! 인간과의 접촉 자체를 심하게 거부하는 괴물과 대화도 제대로 못 나누고 그대로 끝이다. 그러나


"절대 이 아이 건드리지 마라!" 주위가 쩌렁쩌렁 울린다. 학교 아이들에게 쫓기던 엘사가 더 이상 도망갈 가 없어 몰매 맞기 일보직전이다. 우아. 엘사를 구해내는 그 멋진 장면이라니. "난 널 지켜야 해. 할머니 부탁이야." 하면서 괴물은 언제나 귀신같이 나타나 외로운 엘사를 지켜준다.


"할머니의 미안하다는 편지를 한 통씩 배달하는 거. 그게 우리가 만들어나갈 이야기야." 괴물과 검은 개 워스와 엘사는 '할머니 편지 전달하기 여행'을 떠난다. 그러면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엘사는 핼러윈을 좋아한다. 특이한 게 정상으로 간주되니까.


한 개 하고 절반의 영원이 흐르는 동안의 정적은 좋다가 힘들었다가 견디기 어려워진다. 해리포터도 고아였다고, 해리 포터와 비슷한 면이 하나라도 있는 게 세상에서 제일 멋진 일이라고 말하려다 괴물은 고품격 문학작품을 많이 안 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하하 엘사의 말하는 방식은 너무 재밌다. 고아라는 괴물을 위로해주려다 그런 고품격 문학작품 안 읽었을 테니 괴물에겐 소용없을 것 같아 그런 말은 안 한다는 이런 표현. 하하 곳곳이 이런 식이다. 너무 재밌다.  


공인 사이코 테로 피스트. 정식 자격증이 있는 심리 치료사. 그녀 사무실에 있는 백만 권의 책. 뭐, 재미있는 책 있어요? 해리 포터 시리즈 있어요? 아니. 한 권도 없어요? 응. 책들이 이렇게 많은데 해리 포터는 단 한 권도 없다고요? 그런데도 머리가 망가진 사람들을 고쳐준단 말이에요? 하하 엘사의 예리한 지적. 아무리 책이 많으면 모해. 해리 포터 같은 책도 하나 없으면서 어떻게 머리 망가진 사람들을 고쳐준단 말인가. 푸하하하 엘사 최고.


죽음의 가장 강력한 힘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게 아니라 남겨진 사람들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게 만드는 거야. 깰락 말락 나라 할머니가 믿는 유일한 종교가 있다면 '나중에 하자교' 푸하하하 나중에 하자교. 귀찮은 건 나중에 하자! 오케이. 이혼한 집안의 아이들은 가끔 우라지게 엉뚱한 짓을 저지를 권리가 있다는 게 할머니 주장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아무도 심란해질 일이 없다.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 '싫다'를 법으로 금지시키더니 '아니다' '아마' '어쩌면'도 추방시키고 '혹시' '만에 하나' '두고 보자'까지 금지어로 만들더니 여왕은 끝내 말하는 것 자체를 금지시키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왕국은 정적에 뒤덮인다. 딱 한 사람 '싫어요'를 할 수 있었던 소녀. 그걸 외친 소녀 따라 모두가 한 마디씩 "싫어요" "싫어요" 우레와 같은 싫어요는 결국 성을 무너뜨린다. 갈등에 대한 두려움이 여왕의 권력유지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싫어요' 그 한마디를 아무도 못해 그렇게 암흑의 세계에 살았던 것이다.


"한 번만 더 경적을 울리면 우리 엄마가 당신 차 보닛 위에 아기를 낳을 거야!" 하하 7살 소녀가 소리치고 경찰이 달려오고 분만도 아닌데 병원으로 가게 된 엘사와 엄마. "할머니라면 이 상황을 정말 재밌어하셨을 거예요." "그건 그렇지." 할머니라면 지금 어떻게 했을까?" "잽싸게 도망쳤을 거예요." 푸하하하 엄마랑 엘사는 경찰과 들것을 든 간호사들이 몇 미터 앞으로 들이닥쳤을 때 기어를 넣고 눈 위에서 헛도는 타이어로 도로를 달려 쌩하니 달아난다. 엘사가 지금까지 본 중에서 가장 무책임한 행동이다. 오늘의 이 일 하나만으로도 엘사는 엄마를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 푸하하하 엄마랑 엘사랑 합쳐지는 순간이다. 아 좋다.


집은 항상 엉망진창이었지. 공과금은 안 냈고, 음식은 냉장고에서 썩어갔고, 가끔 먹을 게 아예 없을 때도 있었고... 아, 할머니라니. 그래서 엄마는 정리정돈 초능력자가 된 거예요? 할머니처럼 되고 싶지 않아서? 푸하하하 엄마는 완벽주의자. 항상 집안이 단정하게 정리되어있다. 할머니는 언제나 뒤죽박죽 엉망진창.


왜 그랬어요? 그이가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면 좋으니까. 이 말을 끝으로 브릿 마리는 문을 닫는다. 아. 모두가 외롭다. 처절하게 외롭다. 크리스마스이브 밤이 깊어갈 무렵, 한 사람이 심장마비로 쓰러진다. 하지만 이로 인해 두 사람의 가슴이 찢어진다. 그리고 이 아파트는 두 번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아.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누가 쓰러지나. 아이고.


죽으면 안 돼! 내 말 들리지?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전부 다 해피엔드니까 죽으면 안 돼! 워스 까만 개의 죽음에 엘사는 부르짖는다. 죽음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할머니는 어느 누구도 백 퍼센트 개떡은 아니고 어느 누구도 백 퍼센트 안 개떡은 아닌 게 인생의 묘미라고 했다. 안 개떡인 쪽을 최대한 치우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인생의 과업이라고 말했다.


할머니의 매력은 멋대로 하면서도 항상 가슴 안엔 따뜻한 사랑이 철철 넘쳤다는 것이다. '나중에하자교'가 난 퍽 맘에 든다. 지금 하기 싫은 건 나중에 하자. 지금은 나 좋은 것만! 헤헤. 그뿐인가. 어느 누구도 백 퍼센트 개떡 아니고 안 개떡도 아니고. 그게 바로 인생의 묘미라는데 맞다. 누구나 개떡과 안 개떡을 같이 가지고 있다. 다만 안 개떡인 쪽으로 노력할 뿐. 아 할머니의 씩씩함 통쾌함 신나게 살아가는 장면이 나로 하여금 벌떡 일어나 씩씩하게 오늘 하루를 시작하게 한다. 푸하하하 파이팅!  


매거진의 이전글 모스크바의 신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