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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뜰 Feb 14. 2021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독후감

설 명절에 가지도 오지도 못하니 갑자기 널널해진 여유의 시간들. 갑자기? 푸하하하 그건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남편이 이미 은퇴해 매일매일이 널널한 백수 부부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명절은 명절이고 휴일은 휴일이다. 긴 명절 무얼 할까? 그래! 책을 읽자! 도서관에 가서 넉넉히 책을 빌려오기로 한다. 자리에 앉는 것 자체가 안되었었는데 조금 풀렸는가 커다란 테이블에 한 두 명 정도 씩 앉아있다. 일단 검색기가 있는 컴퓨터 앞에 앉아 뒤적뒤적 브런치 작가님이 추천한 책들을 검색창에 넣는다. 대부분 이미 대출 중이라 대기해야 하는 중 걸려든 것. 오예! 책 위치를 인쇄해 번호를 따라가 직접 찾아낸다. 음 글씨도 작고 매우 두꺼운데? 살짝 망설여지지만 그래 이번 설 연휴도 길고 아무도 안 오고 갈 수도 없는데 이 책을 읽자꾸나 선택한다. 그리고 시작한다.


여름 별장에서는 선생님이 가장 일찍 일어난다. 날이 새고 얼마 있다 잠이 깬 나는, 좁은 침대에 누운 채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선생님 기척에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머리맡에 둔 손목시계를 들고 어둠 속에서 시간을 본다. 5시 5분이다.


잔잔하게 시작하는 글. 도쿄에 있는 무라이 설계 사무소는 7월부터 9월까지 오래된 여름 별장으로 사무소 기능을 옮긴다. 13명의 직원. 일본 건축사에 이름을 남긴 설계사무소치고는 13명이면 적은 숫자지만 선생님은 절대 크게 키우려 하지 않는다. 대학 4학년이 된 나는 이 곳에 취직한다. 무라이 슌스케. 일본보다 미국에서 더 유명한 일본 최고의 건축 설계사.  


참 이상하다. 책을 읽는 동안 내내 화자인 주인공을 막 대학을 졸업할 사 학년 여자아이로 알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선생님(이곳에선 무라이 슌스케를 선생님이라 칭한다.)의 조카 마리코와 묘한 사랑 비슷한 감정을 나눈다. 앗 모야 남자였어? 이상하다 분명 여자였는데. 뒤적뒤적 이상도 해라.


가끔 이런 경우가 있다 흐름 따라 주인공을 여자로 알았는데 남자인 경우. 또는 남자로 알았는데 여자인 경우. 왜 그럴까? 하이고 내참. 우치다가 무라이 조카 마리코랑 사랑을 나누는 남자는 큰일 날 거라는 말을 했었는데 그때 살짝 이상하긴 했는데. 어디였더라? 뒤적뒤적


마리코와 우치다와 남자 주인공 간의 묘한 갈등. 그러나 절대 드러나지 않는 과격함이랄까. 모든 게 그냥 잔잔하게 흘러간다. 그 묘한 갈등을 살짝 느껴지게 할 뿐. 아무 사건도 충돌도 싸움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 좋게 좋게 비켜간다. 무언가 터질 듯 터질 듯 안 터지고 그냥 흘러간다. 


건축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마치 내가 유명한 건축설계사가 되어 사용자 맘에 꼭 들게 설계하고 집이 된 후에도 끝까지 책임지고 AS를 해주고 있는 것처럼 묘사가 생생하다. 우치다가 쏟아내는 실용성을 강조하다 모든 게 발전했다는 이야기에 격하게 공감한다. 벌집이야말로 최대의 실용성이 발휘된 공간이라는 것 하며 성경이 그 당시 천하게 여겨졌던 독일어로 번역되면서 실용적이 되어 온 세계에 퍼지게 되었다는 이야기 등. 


키스해줘


헉! 이렇게 다짜고짜? 격한 장면 하나 없이 부드럽게만 흘러가다 이게 몬 일? 선생님의 조카 마리코와 화자인 주인공 사키니시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는 듯하다 느꼈을 뿐인데 다짜고짜 마리코가 말한다. '키스해줘'도 파격이지만 그 후가 더 가관이다. 부모님과 선생님이 너랑 나랑 결혼시키려 한다고. 그걸 마리코는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헉 이게 모지? 오랜 전통의 화과자 집 무남독녀 외동딸 마리코. 그리고 자녀가 없는 선생님. 선생님은 마리코 아버지의 형이다. 즉 마리코와 결혼한다는 것은 화과자 최고 전통집과 일본 최고 건축설계사무소의 후계자가 동시에 된다는 뜻이다. 이런 장면을 이렇게 안 극적이게 만들어도 되나? '이따 가도 돼? 새벽 한 시에 마리코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이 파격적인 장면의 끝이다. 


아 인생이란 이런 걸까. 하늘을 펄펄 날 것만 같던 명성을 날리던 분도 결국 쓰러진다. 고고함을 유지하던 선생님은 국립현대 도서관 설계 경합을 그리 열심히 준비하고 출품 직전 갑자기 뇌경색으로 쓰러진다. 주인공이 선생님을 차에 모시고 갈 때 헉 헉 코를 고는 줄만 알았는 데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거였다. 중환자실에서 몇 개월을 있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휠체어에 앉아 조금 더 살다 돌아가신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흘러 그때 여름 별장에서 열정을 쏟던 모두가 나이도 들고 병도 들고 죽기도 한다.   


주인공은 그러나 마리코와 결혼하지 못한다. 함께 일하던 유키코와 결혼한다.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러나 삶은 그렇게 안타깝게 돌아간다. 그 여름의 별장에 30년 만에 돌아와 고스란히 남아있는 그때 작업하던 당시의 연필이며 책이며 메모 등을 보며 옛날을 추억한다. '마리코와 이 작은 침대에 함께 누웠다는 걸 그때 유키코도 알았을까?' 그때 함께 일하던 지금의 아내 유키코. 당연히 경합에서 이길 줄 알았고 모두가 열심을 쏟던 여름 별장. 그러나 선생님 떠나고 결국 모두 떠나 완전 폐허가 된 곳. 그곳을 인수하며 삼십 년 전 추억을 더듬는 주인공. 아, 인생은 이런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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