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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뜰 Jan 28. 2022

지혜로운 여자라면

조용했을 텐데

아니 여보~ 이건 유통기한 지난 두유잖아. 왜 이걸 줬어. 


헉. 남자들끼리 내버려 두면 꼭 사고가 난다. 그래도 이럴 수가. 작은 애때 사놓은 두유가 아직 있다. 그 애가 두유를 좋아해서 샀지만 우린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 애가 가고도 많이 남았다. 그래도 유통기한이 남아있기에 당장 버리지 않고 뒷베란다에 두었던 것이다. 그걸 까맣게 잊어 두유는 그런 채로 한쪽 구석에서 지난 날짜만큼 푹푹 썩고 있었던 거다. 썩었겠지 분명? 자다 말고 일어난 나는 남은 십여 개의 두유를 몽땅 싱크대에 던져놓았다. 내일 저 모든 걸 짜내 완전히 버려야지. 아, 작년 9월이 유통기한이었다. 어쩌나. 


난 너무 피곤해서 밤 열 시쯤 잠이 들었고 남자들끼리 남아서 무언가 야식을 먹으며 그 옛날 수호지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새벽 한 시 잠이 깬 나는 거실과 서재방 두 군데 각자 앉아서 커다란 모니터를 통해 수호지로 즐거운 두 남자를 보았으니


 아빠가 아들과 아주 멋진 시간을 보내는구먼. 


한편 흐뭇해 미소가 절로 나왔다. 남편만 보고 들어가 다시 자려다 그럴 수는 없지. 거실 커다란 TV에 노트북을 연결해 수호지 게임에 열심인 아들도 보고 가려고 나와 


엄마 또 잔다~


하려는 순간 무얼 제대로 먹었나 봤더니 앗! 그 옛날 두유 껍데기가 있는 것이다. 


아니 이걸 먹었어? 
네. 아빠가 주셔서요. 


헉. 아니 이럴 수가. 안돼. 이거 유통기한 지난 거야. 난 소리소리 질렀으니 서재방에도 달려가 


여보 어쩌자고 저걸 주었어? 
여보가 두유 주라고 했잖아. 두유 두유 하길래 주었지. 


난 잠자리 들며 아들 먹거리 잘 챙기라고 인절미도 있고 호빵도 있고 두유도 있다고 소리소리쳤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한 두유란 바로 며칠 전 선물로 받은 아주 좋은 약콩 두유였던 것이다. 두유를 싫어하는 우리에게도 너무 맛있어서 그걸 다 먹이고 싶어 볼 때마다 두유 먹어라 하던 참이었다. 그 노상 말하며 맛있게 먹던 두유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 아니 어떻게 그 뒷베란다 구석에 처박혀있는 저 오래된 두유를 찾아내느냐 말이다. 물론 새로 받아온 두유는 두유처럼 안 생기고 매우 고급진 음료처럼 생겼다. 그래도 그렇지 


이 두유 참 맛있네. 


하며 여러 날을 먹은 상태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맨날 먹던 두유가 아니네~ 


할 법도 한 큰애도 문제지만 그 구석을 뒤져 오래된 두유를 찾아낸 남편도 대단하다. 아, 그때그때 즉각 버릴 걸 한동안은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아 두었지만 두유를 좋아하지 않으니 찾지 않았고 그런 채 까맣게 잊힌 것이다. 하이고 주부 잘못이 더 크다. 그래도 그렇지. 남편도 참!


그런데 머쓱해하는 남편을 보니 한편 드는 생각. 한밤중에 그리 소리소리치며 호들갑 떨 필요 있었을까? 좀 지혜로운 여자라면 조용했을 텐데. 그 오래된 두유를 발견한 즉시. 


앗, 큰일이구나 유통기한 지난 걸 먹었네. 


맘속으로만 생각하고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그냥 조용히 치우고 남편에게만 가서 왜 그걸 주었느냐고. 그거 말고 내가 새로 가져온 거 주어야 하지 않았냐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기껏 즐겁게 먹고 신나게 수호지를 하고 있는 두 남자의 멋진 분위기에 찬물을 쫙 끼얹은 느낌이다. 물론 까짓 유통기한 지난 두유쯤이야 아무것도 아닌 듯 두 분 다 수호지에 팔려 정신없지만 난 많이 우울하다. 괜히 한밤중 일어나 소란을 피운 느낌이다. 


다시는 이거 먹지 마. 


괜히 한마디 하고 다시 잠자리에 든다. 현명한 여자. 지혜로운 여자는 어떻게 했을지 이미 저지르고 나서야 환히 들여다보인다. 아, 좀 신중할 수 없었을까. 남편에게 많이 미안하다. 그렇다면 내가 다 챙겨주고자던가 하지 남편에게 두유도 먹여라 어째라 잔소리만 실컷 하고 잠자리에 들었으니 말이다. 


여보 미안해. 내가 너무 지혜롭지 못했어. 
아들아. 내일 뱃속이 괜찮아야 할 텐데. 에고. 


(사진: 꽃 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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