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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뜰 Oct 01. 2022

군대라면


밭에서 어마어마하게 큰 호박을 수확했다. 이 호박은 밭에서 따자마자 칼을 꽂아야 쉽게 자를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집에 가져오자마자 깨끗이 닦아 거실에 신문을 쫘악 펼쳐놓고 그 위에 커다란 도마를 두 개 놓고 하나는 남편 꺼, 하나는 나꺼, 그 위에 호박을 놓고 자르기 시작했다. 하나는 호박 전용으로 가늘게 저미기. 하나는 호박죽용으로 깍둑썰기. 하나는 호박구이용으로 한입에 먹기 좋게. 


거실에 쫘악 펼쳐놓고 눈을 위하여 우리가 요즘 재밌게 보고 있는 '모범 형사 2'를 틀었다. 넷플릭스에서 1편부터 보고 있는 중이다. 호박전은 본래 채칼로 아주 가늘게 채 썰기가 되어야 하는데 그게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래서 나름 머리를 굴려, 그렇지. 얇기만 하면 되겠지. 감자칼로 쓱쓱 가늘게 저며냈다. 쉽다. 그걸 가지고 일단 호박전을 만들기로 했다. 


소금을 살짝 뿌리고 부침가루로 버무렸다. 그리고 부침가루 약간 푼 물에 얼음을 넣어 아주 차갑게 만들어 가루에 버무린 호박을 넣어 휘저었다. 뜨겁게 덥혀진 프라이팬에 올리브 오일을 넉넉히 두르고 넣으니 치익! 하하 소리 좋다. 자글자글 빠삭하게 호박전이 익는다. 즉석에서 해 먹는 호박전은 너무 맛있다. 


맛있게 먹고 나서 다시 호박 썰기를 했다. 한참을 눈으로는 드라마를, 손으로는 호박 썰기를 하는데 오지혁 형사가 편의점에서 아주 맛있게 라면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시계를 보니 이미 밤 10시가 넘어가고 있다. 쎄븐 투 일레븐. 간헐적 단식 다이어트 중인 나는 지금 이 늦은 시간엔 절대 무얼 먹으면 안 된다. 그러나  TV 속 라면 먹는 풍경은 아, 나를 못살게 한다. 


여보, 우리 라면 어때? 
좋지. 


'모범 형사 2'는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남편과 나는 한밤중에 라면을 먹기로 한다. 라면 담당은 남편! 군대 때 멋지게 끓여먹던 실력이란다. 그런데 두 개를 한꺼번에 넣고 끓인 라면의 등장은 그야말로 죽 수준으로 푹 퍼져있다. 물론 남편이 라면을 다 끓였지만 호박 썰 던 것을 정리하느라 오랜 시간 그대로 방치된 탓도 있다. 그러나 아, 너무 푹 퍼져있다. 


군대라면 맛이야. 
군대라면이 이래? 왜 이렇게 푹 퍼지게 해? 
생각을 해봐라. 그 많은 사람이 배당받으려면 푹 퍼지지 않고 배겨?
하하 그러니까 맛 내느라 푹 퍼지게 한 게 아니네. 
정리 다 하고 끓여달라 하지 그랬어. 그럼 이렇게 퍼지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그때 군대라면 생각하며 먹으니 난 무지 맛있다. 


문제는 쎄븐 투 일레븐. 퉁퉁 불어 터진 라면이라도 한밤중에 TV 드라마를 보며 먹으니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배가 한가득 부르도록 먹고 또 먹는다. 불어도 맛있다. 그렇게 한바탕 먹고 나니 급 드는 후회. 밤 7시 이후 아무것도 안 먹고 다음 날 11시까지 있을 때. 아, 얼마나 상쾌했던가.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 그러나 지금, 한밤중에 퉁퉁 불은 라면을 한가득 먹고 난 이 지저분한 느낌은 뭐란 말인가. 


아, 어떡하지? 그렇게 쉽게 쎄븐 투 일레븐을 어겨도 되는 거야? 이제부터라도 16시간 공복을 할까 따져보니 오후 두 시가 넘어야 한다. 두시까지 아무것도 안 먹는다고? 에구. 그건 안돼. 너무 배고파. 그래. 오늘부터 새로 시작하자. 어젯밤은 실수로 치고 오늘부터 다시 하는 거다. 그러니 쎄븐 투 일레븐 오늘 11시까지만 기다려 무얼 먹기 시작하면 된다. 작심삼일이면 어떠랴. 가끔 실패하면 또 어떠랴. 포기만 아니면 된다.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만 있으면 되는 거다. 그래. 오늘부터 다시 시작이다. 쎄븐 투 일레븐! 파이팅!


(사진: 꽃 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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