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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언철 Jun 25. 2020

당신 인생 그래프의 최저점은 어디인가요?

"해당 수험번호는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 "

전화기에서 울리는 아무런 감정 없는 기계음이 내 귀에 울렸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나에겐 너무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 기계음이 나에겐 너무 많이 들어 늘어진 테이프의 슬픈 노랫소리로 들렸다.

나의 세 번째 실패였다.  대학입시 세 번의 실패... 삼수 실패였다.


나의 중학교 시절 '종합병원'이라는 드라마를 보고 흰 가운을 휘날리며 환자를 살리는 의사의 모습에 매료되어 의사가 되어 볼까라는 생각을 했다. 나름 공부도 잘하던 축에 속했었고 내가 의사가 되고자 했을 때 부모님도 싫어하시지 않는 눈치에 그때부터 나의 생활기록부 희망 직업란에는 항상 의사라고 채워 넣었다. 고등학교 졸업하며 첫 입시에서는 의대 지원을 하지 못했다. 성적이 부족했다.

나의 꿈과 희망과는 거리가 먼 공대로 진학을 했다. 그렇게 쓰라린 첫 실패를 안고 시작한 대학생활은 자유가 넘쳤으나 자유롭지 않았고 활기찼으나 공허했으며 모든 활동이 나에게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아무런 의미 없는 대학생활을 이어가던 중 수능 100일을 앞둔 재수하던 고등학교 친구들과 만났다. 그 자리에서 자기 꿈을 이야기하는 재수하는 친구들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자기 꿈을 위해 한번 더 노력하는 모습이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내 모습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나도 다시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지금 공부를 시작해도 잘 될지도 모른다는 긍정으로 밤을 지새우고 바로 학교로 달려갔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무언가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재단에 재물을 바치듯... 망설임 없이 자퇴서를 제출했다. 그 날의 나에게는 어떤 실패나 좌절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내 맘 속에는 온통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난 분명 잘될 거야.'

그렇게 다시 희망을 가지고서 100일간의 짧은 재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 짧은 시간이 지나고 내가 받아 든 성적은 고 3 때보다는 나아졌고 의대를 지원해 볼 수는 있을 듯했다. 하지만 IMF라는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났다.  모든 의대의 합격선이 일제히 오른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 실패... 재수 실패였다.


이제 돌아갈 곳이 없었던 나는 자연스럽게 삼수생 활로 접어들었다.

'그래 지난번에 100일이라는 시간밖에 없어서 실패한 거야. 1년을 투자하면 잘 되겠지. 분명 잘 될 거야' 그렇게 다시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삼수 생활을 시작했다. 다시 꿈을 품은 1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꿈을 품었던 1년이라는 시간은 어떤 결과도 내놓지 못하고 그렇게 나의 최종 학력은 고졸이 되었다.  

거기서 나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군입대를 미룰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꼬이는 거지? 왜 이렇게 되는 게 없는 거지?'라고 수없이 되뇌었다.

군대 입대하기 전까지 수많은 날을 친구들과 술로 지새우며 깊고 깊은 우울과 좌절로 나 자신에 대한 원망과 미움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결국 입대를 했고 신병교육 중 정확히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교육 시간에 본인 인생을 그래프로 그려보라고 했다. 그 시간에 그린 나의 그래프는 끝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어디서 끝을 맺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여기서 더 떨어질 때가 있을까? 어디가 내 인생의 최저점일까? 이제 더 이상 내려가면 안 되는 거 아닐까?'

여기서 더 떨어지면 나 자신을 낭떠러지로 밀어버릴 것만 같았다. 꼭 그 인생 그래프를 다시 위쪽으로 끌어올려야 했다. 아니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올라갈 수 있는 기미라도 보여 주어야 했다. 나의 선택을 믿어 준 부모님까지도 멀쩡한 아들 망친다는 이야기를 듣게 한 불효자로, 그런대로 공부 좀 하던 애가 대학도 가지 못한 그런 아이로 남을 수는 없었다. 그때는 닿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꿈이었지만 난 꼭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어쩌면 나에게 주어진 2년이라는 그 시간이 내 인생 그래프를 끌어올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등병, 일병으로 지낼 1년은 버려야 했다. 남은 1년 그리고 제대 후 5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무언가를 보여줘야 했다. 예상대로 1년간은 책을 볼 수 조차 없었다. 상병이 되고부터는 비무장지대에서 근무하던 나에게 조금씩 공부할 시간이 주어졌다. 관찰병으로 근무했던 나는 야간 근무를 하고 남은 시간 밤새 공부를 했고 야간 근무자에게 주어지는 오침 시간에 눈을 붙이고 낮 동안 책을 읽거나 영어 단어를 외우거나 했다. 지금 생각해도 절실하고도 치열했던 1년이었다. 이제는 더 잃을 것이 없었던 나에게 다시 건강한 희망을 채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물론 그 희망이라는 것이 그냥 희망으로 머물 수도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은 후였다. 그 꿈을, 희망을 현실로 만들어야 했다. 시간이 흘러 제대를 하고 5개월간 고시원 생활을 하며 준비를 했다. 그때는 막연한 희망보다는 안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더 크게 자리를 잡았다. 시험 치르는 날이 아직 생생히 기억난다. 너무 춥지도 않은 날씨에 시험장으로 들어서던 그 긴장된 기분과 묘한 희망 섞인 기대감과 실패를 걱정하는 두려움이 뒤섞여 있는 매우 복잡한 마음을 가진 날이었다. 시험은 끝이 나고 성적을 받아 들었다. 내 점수로는 세 곳의 의대를 지원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다. 하지만 일단은 거기까지 였다. 두 군데에서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한 곳이 남았으나 장담할 수 없었다. 이대로 다시 끝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과 될 수도 있다는 희망과 안되면 다시 시작해야지 하는 또 다른 마음이 뒤섞여 나를 흔들고 있었다. 마지막 합격자 발표날 아무도 몰래 PC방에 가서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초조함은 말로 표현할 수도 글로 표현할 수도 없을 것 같다. 합격자 발표 시간이 되어 차분히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너무나 두근거렸던 그 날을 심장은 아직 기억하는 듯하다. 지금도 그 날 생각을 하니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한다. 마침내 창이 열리고... 합격자 수험번호에 마침내 드디어 내 번호가 있는 것이다. PC 방에서 조용한 환호를 질렀다.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 한꺼번에 밀려왔다. 기쁘면서도 슬프고 그동안의 힘듦에 화가 나기도 하고 하늘을 날아갈 듯 행복하기도 했다. 합격 소식을 전했을 때 눈물을 흘리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생생히 기억난다. 그렇게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아버지의 얼굴도 기억이 난다. 무엇보다도 내가 꿈만 꾸던 그 일이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쁘면서도 왜 이제야 된 건지 화가 났다. 그 이후 나의 인생 그래프는 상승 곡선을 그리며 그렇게 크지 않은 굴곡을 그리면서 지내고 있다.


모두 각자 가진 인생의 굴곡이 있을 것이다. 굴곡이 큰 사람도, 잔잔한 물결 같은 사람도... 모두 각자의 굴곡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이제껏 내가 풀어낸 내 이야기는 내 인생의 굴곡 중 최저점일 때라고 생각하는 지점이다. 각자가 가진 인생의 무게가 다르듯 각자 인생의 최저점과 그 최저점이 가진 무게는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지금도 가끔 그때를 돌이켜 보고 당시에 썼던 일기를 들여다본다. 그 당시의 나는 실패했고 좌절했으며 희망이라곤 없었다. 하지만 그때의 실패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지치지 않게 만드는 원동력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직까지는 그 젊은 날의 시간보다 힘든 시간은 없었다. 의대에서 공부하는 것도... 병원 인턴으로 일했던 것도... 외과에서 수련받는 것도... 그 시간보다는 힘들지 않았다. 그런 시련을 겪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가 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순간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모두 내 인생의 한 부분임은 분명하다. 나에게 주어진 힘든 시간을 이겨내 준 나에게 감사하다. 그리고 나를 믿고 지켜봐 준 사랑하는 사람들께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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