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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언철 Oct 06. 2022

몸을 움직이다, 운동

프롤로그


'몸을 움직이다.'

운동의 사전적 의미 중 하나이다. 어떤 종목의 스포츠를 하는 것도 운동의 일환이 될 수 있지만 더 넓게 본다면 몸을 움직이는 행위 전체를 운동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사실 나는 진료실에서 환자에게 항상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반복되는 말을 한다. 그건 바로 운동하라는 이야기다. "운동 열심히 하셔야 재발이나 합병증이 안 생기니까 열심히 하셔야 돼요." 이 기본적인 이야기를 환자들에게 하면서 정작 나 자신은 운동을 잘할 수가 없었고 여러 가지 핑계로 안 했다. 다시 이야기해 몸을 많이 움직이지 못했고 또 하지 않았다. 그러다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와 시간이 주어졌고 한날 거울을 보는데 어느덧 중년을 바라보는 살이 찐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그 순간 '운동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불현듯 스치고 지나갔고 정말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처음에는 어떤 원대한 목표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냥 눈앞에 보이는 저 어떤 곳까지 움직이고 싶었다. 막상 시작하려니 쉽지 않았다. 원했던 그곳에 닿으니 조금 더 먼 곳에 닿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렇게 내 몸이 움직였고 운동이 시작되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또래보다는 덩치도 있고 키도 큰 편에 속했다. 그래서 친구들과 운동을 하면 항상 끼어서 할 수 있었다. 초등학생 때에는 운동장에서 축구를 주로 했었다. 다른 친구들과 달리 이상하게도 난 공격을 하고 골을 넣고 하는데 별로 감흥이 없었다. 그냥 수비가 재미있었다. 왜 그랬을까? 다 큰 어른이 되고 나를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을 나이가 되었을 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그건 내가 골을 넣으면 상대편 친구들이 마음 아파하는 것을 싫어했던 것 같다. 그래서 골을 넣는 것보다도 골을 먹지 않기 위해 뛰어다녔나 싶다. 상대편 친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으면서도 우리 편 친구들도 져서 마음이 아프지 않게끔 열심히 막으면 되는 거니까. 물론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고 이겨 기쁠 때도 있고 져서 슬플 때도 있었다. 그렇게 축구에 매진하다 보니 시간이 흘러 중학생이 되었다. 여전히 덩치도 좋았고 키도 꾸준히 우리 반 50명 중 상위 10명 안에 들 정도로 컸다. 그 시기에 여러 가지 이유로 "농구'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농구 관련 드라마나 농구 대잔치와 같은 방송을 통해서도 그 열기를 접했지만 뭐니 뭐니 해도 시발점은 '슬램덩크'라는 만화책이 있었다. 농구를 전혀 모르던 주인공의 성장담이 담긴 만화책이었다. 나도 그 만화책을 한 권씩 사 모으고 단행본이 발매된다는 이야기에 돈을 모아 서점으로 달려가곤 했다. 그래서 전권을 다 가졌었다. 얼마나 넘겨보고 빌려주고 했던지 책이 너덜너덜 해져 테이프로 붙여야 할 정도였다. 지금이라면 만화책을 읽는 걸로 끝나지 않았을까 싶지만 한참 힘이 넘치던 시기에 나도 농구를 잘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꿈틀대며 내 몸을 움직였다. 어떻게든 농구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농구 잘하던 친구에게 부탁해서 비 오는 어린이 놀이터에서 드리블 연습을 하고 레이업 슛 연습을 하고 제대로 된 폼으로 골을 넣을 때의 희열과 비 오던 그 놀이터 풍경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 이후의 나의 운동은 전부 농구였다. 시간만 있으면 나가서 농구를 했고 그것은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이어졌다. 난 고등학교 때 키가 무척 많이 컸다. 한 해에 10cm 정도가 크더니 운동부를 제외하고 뒤에서 첫 번째 두 번째를 다툴 정도가 되었다. 그러니 더더욱 농구가 재미있었다. 다른 친구들 보다 큰 키에 항상 센터는 나의 차지였다. 치열한 몸싸움이 있고 신경전이 있었다. 나름 내 농구 라이벌들도 있었다. 당연히 나랑 비슷한 키의 친구들이었다. 짧은 점심시간에 농구 한판 하기 위해서 밥을 무지막지한 속도로 비벼서 먹어버리고는 농구공을 들고 뛰어나갔다. 고등학교 운동장은 꽤 넓은 편이었지만 농구 골대는 학생 수에 비해 적은 편이었다. 한 골대에 많게는 수십 명이 달려들어 공을 던지니 말 그대로 골대에 들어가는 공보다 공끼리 맞아서 튀어나가는 공이 더 많을 정도였다. 저학년일 때는 선배들 때문에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운 좋게 선배들 틈에 끼어서 하기도 했다. 고학년이 되어서는 입시로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 시험이 끝난 주말에 친구들과 농구 약속을 하면 정말 쉼 없이 3시간을 농구만 한 기억도 있다. 어떻게 그렇게 뛰어다닐 수 있었는지 지금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 피부는 검은 편인데 아내가 어떻게 그렇게 피부가 검냐고 물어볼 때면 나는 아마도 그때 너무 햇빛에 많은 노출이 되어 그런 게 아닐까라고 대답하곤 한다. 그렇게 고등학교 시절도 농구라는 운동과 보내고 대학에 진학하고 군대를 가게 되었다. 아마 대부분은 군대를 갔으니 또 축구 이야기 나오겠고 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난 좀 달랐다. 최전방 근무를 하다 보니 축구를 할만한 공간이 없었다. 자대에 배치받아 갔더니 막사 앞에 콘크리트 바닥이 있고 농구 골대가 두 개 있었다. 그뿐이었다. 간혹 공이 철책선을 넘어가면 들어가서 찾을 수가 없는 곳이었다. 지금 이름 붙여보자면 이때 한 운동, 농구는 완전한 '생존 농구'였다. 계급이 낮았을 때는 우리 편이 져서는 안되는 그런 경기였다. 하지만 계급이 높아지고는 즐기면서 하는 농구로 바뀌었다. 그렇게 군 복무를 마치고서는 의대 진학을 하게 되고 사실 이때부터는 뚜렷하게 운동을 한 기억이 없다. 간혹 방학을 이용해 헬스장에서 근력 운동이라고 끄적 된 기억만 있다. 그렇게 의사가 되고는 끄적거리던 운동마저도 할 시간이 없었다. 아마 병원 응급 콜이 생겼을 때 뛰어가는 것이 가장 큰 운동일 정도였다고나 할까? 그 기간이 7년 동안 이어졌고 그 사이 당연히 모두가 예상했듯이 체중은 물에 잉크가 스며들듯 천천히 늘었고 반대로 체중을 지탱해 줄 체력은 급격히 줄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비 오듯 했고 계단을 오를 땐 숨이 차 올랐다. 불규칙한 식사에, 야식에, 음주에, 충분치 않은 수면을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쓸려고 하는 이야기는  이후의 이야기이다. 외과의사로서 조금의 여유가 생겼고 나의 주변 환경도 많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나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새로운 운동에 도전한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쉬울 수도 있겠으나 나에게는 쉽지만은 않았다. 한번 시작하려고 마음먹기가 쉽지가 않은 성격이지만 시작만 한다면 그래도 유지는 잘하는 편이다.  한곳을 깊숙이 파고들어 빠져드는 성격이 아닌지라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보았다. 그래서인지 물론 무엇하나 뛰어나게  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지금 나는 몸을 움직이는 것에 재능이 아예 없지 않음을 깨닫고 즐겨보려고 한다. 지금 하고 있는 운동은 달리기, 수영, 자전거, 등산, 스키, 근력운동이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일관성 없는  같기도 하다. 각각의 운동은 나에겐 서로 다른 사연이 있는 운동들이다. 지금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나의 운동에 대한 것이다. 해도 그만  해도 그만인 것들이 지금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되려 하기에 그것에 대해서 풀어보고자 한다. 내가 몸을 움직이면서 느끼는 , 여러 가지 운동을 하면서  , 생각한 것을 기록에 남기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냥 어떤 계산이나 어떠한 목적 없이 어린아이가 종이에 낙서하듯이 여러 운동에 도전하면서 느끼는 감정들과 생각들을 끄적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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