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여행의 시작은 케냐
대체로 순응하는 삶을 살아왔다. 기자가 되고 싶어 국문과에 입학했지만, 폭탄 같은 학점과 좌절스러운 글재주를 가지고 기자는 내 길이 아니다 라고 생각했다.. 특별하게 잘하는 게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경영학을 복수전공 하기 시작했다. 취업이라도 하자, 내 밥그릇은 내가 챙겨야지 하는 심정으로 이곳저곳 원서를 넣었다. 이곳저곳 원서를 넣으면 한두 군데는 붙을 줄 알았으나 이곳저곳 낙방의 소식만 들려왔다. 왜 떨어지는지 아무도 정확한 말을 해주지 않았고, "귀하의 능력이 뛰어난 것은 알겠으나", "다음에 좋은 인연"이라는 문자만 수십 통을 받았다. 좋은 인연을 굳이 다음으로 미룰 수도 있다는 것과 내가 능력이 이렇게 뛰어난 사람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 수 있는 시절이었다. '아.. 이번 학기는 아니었나? 9학기가 대세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대학생이라는 산소호흡기를 다시 부착하려고 하는 찰나에 건실한 H보험회사에 합격했다.
신입사원 때는 딱히 여행에 대한 니즈가 없었다. 원래 여행을 잘 안 다니기도 했고, 연차도 며칠 없었다. 그때는 아무 일 없이 연차를 쓰는 게 아까운 시절이었고, 하루만 연차를 쓰면 또 쉰 거 같지도 않았다. 시간 안가네, 고작 화요일, 이번 생은 똥망, 매일 중얼거리다 어느 순간 월급날이고, 눈 뜨면 일 년이었다. 나름, 연차수당도 쏠쏠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연차를 쓰는 게 회사 규정이라 종종 집에서 쉬기도 했는데, 그다음 날 출근하면 선배들은 뭘 했니, 어디 갔니 등을 물어봤다. 자기네도 하루 쉬면 딱히 하는 거 없이 다음날 출근하는데 굳이 왜 시시콜콜 쉬는 날 일정까지 물어보는지 모르겠다.
삼 년 차부터 회사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休-9(휴나인)이라는 제도가 생겼다. 5일 연속 휴가(휴일 포함 9일)를 장려하기 시작했다. 연차 촉진제 시행, 연차 계획서 제출 및 사내방송과 사보에서도 소학행 등 최근 트렌드를 많이 보도했다. 한마디로 말해, 떠나라는 것이었다. 몇몇은 내 휴가 내가 쓰는데 왜 회사가 생색이냐, 연차수당을 주기 싫어하는 회사의 정책이라고 비판했지만 나는 일개미답게 그럼 뭔가 나도 여행이라는 걸 가볼까 라고 생각을 했다. 가본 곳이라고는 일본뿐이라 동기들한테 어느 나라가 좋냐고 물어봤다. "너는 여행도 많이 안 가봤고 초보니까 5일이면 유럽과 미국이 딱이다." 라며 많은 동기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해줬다. 동기들이 에펠탑, 빅벤, 자유의 여신상에서 찍은 프사를 보면서, '아 저기 한번 가보고 싶다.'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고, 지금 이 순간 그 생각을 실현할 시기인 것 같았다. 그때는 3월이었고 한창 8월 티켓 견적을 알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4월 1일
거짓말 같은 날, 거짓말 같이 나의 황금빛 유럽여행을, 아니 회사생활을 180도 바꿔버린 사람이 우리 부서에 오게 된다. 바로 오 부 장 이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몇 가지 회사에서 통용되는 법칙이 있다. 그중 하나는 '또라이 보존의 법칙'이다. 또라이가 가면 또라이가 온다. 행여나 또라이가 오지 않더라도 신기하게 누군가는 또라이로 변한다. 삼 년 차에 나의 첫 또라이가 떠나갔다. 그때 내 후배 준과 별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씨발 우린 잘 버텼어!" 생각해보면 그때가 제일 좋았다. 또라이었던 팀장이 가고 또라이 부장이 올 줄이야. 오부장의 부서 운영 원칙은 명확했다. "내가 시키는 일만 하면 된다. 너네는 나의 부품이다. 마른걸레도 쥐어짜면 다 나온다. 저녁은 회사와 주말은 가족과" 등등의 주옥같은 명언을 남기며, 하루 종일 모든 부서원을 갈구며 쪼았다. 저녁 6시에 일을 시키고 다음날 아침 8시에 불러서 깼으며, 아침 8시에 시킨 일을 9시에 깨기도 했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다음날 본인이 휴가일 때 느슨해지지 말라고, 월요일은 주말 때 느슨해진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고 깼다.
혼날 때는 온갖 욕을 다 들었다. 어떤 날은 동물원의 동물이 되었다. "개새끼, 소새끼, 돼지같이 먹고 싸기만 하는 놈, 하마같이 둔한 놈..." 나열하는 동물들이 온순한 성향이라 같이 살면 오손도손 재밌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거 아는가? 하마도 자기 영역만 침범하지 않으면 온순하다. 어떤 날은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온 사람이 되었다. "너 어떻게 그 학교 졸업했냐, 학교 수준 떨어진다"라고 이야기하며 인사 기록지를 펼쳤다. 학교 교수님인 줄 알았다. 어떤 날은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 배운 사람이 되었다. "집에서 너 이러고 다니냐"라고 시작하는 말들. 우리 집까지 생각해주다니, 불효자는 웁니다.
멍하니 잘린 하루를 살았다. 밤늦게 매봉역을 나오면 머리가 멍할 뿐, 온종일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슬픔과 기쁨, 우울과 안도감이 교차했던 나날들. 하루의 감정만이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계속 살다가는 어깨 축 처진 직장인이 될 것 같았고, 나가자니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하루를 보냈고, 오늘은 하마가 되었다. 일 못하고 밥만 먹는 하마. 매일매일 동물들한테 미안했다. 오부장과 함께한 60일은 내 혼을 쏙 빼먹어 충분했고, 아직 티켓을 안 끊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미국이나 유럽은 똥망같은 현실과 객관적으로 많이 비교가 되어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많이 사라졌다. 갔다 오면 괴리감만 더 커질 것 같았다. 차라리 조금 더 극한 곳에 갔다 오면 '아 그래도 여기는 살만한 곳이구나'라고 다시 생각하고 열심히 일할 수 있지 않을까? 이열치열이랬다.
극한 곳으로 가야겠다. 아프리카 초원이든 남미의 정글이든 북쪽의 얼음 지역이든.. 세상 참.. 힘든 사람들이 많겠지? 가장 시간대가 좋은 티켓을 찾기 시작했다. 금요일 퇴근하고 가면 딱 좋을만한 티켓을 발견했다. 케냐행, 9시 30분 출발. 무려 대한항공 직항이다(지금은 없어졌다). 케냐에는 무엇이 있지? 네이버에 [케냐 관광]을 검색하니 대한항공 광고가 나왔다. 신들의 땅 아프리카. 온갖 동물들이 사는 곳. 오부장이 말했던 하마, 원숭이들이 뛰어노는 곳. 그네들은 정말 밥만 먹고 잠이나 잘까. 그래 여기다! 오지여행의 첫걸음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9박 10일 케냐 여행 일정은 단순했다. 세렝게티, 나쿠루, 암보셀리... 지역이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사파리 위주의 여행이었다. 각 지역마다 볼 수 있는 동물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다. 한 친구는 차라리 에버랜드 가서 사파리를 보라고 했으며, 어떤 친구는 차라리 그 돈으로 화질 좋은 TV를 사고 내셔널지오그래픽을 보는 게 더 좋다고 이야기했다. 다들 굳이 그런 위험한 나라를 굳이 왜라고 이야기했다. 뭐 한국이라도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삶이 괜찮다고 느끼는 감정은 상대적이다. 내가 삶이 괜찮다 라고 느끼는 시점은 나보다 더 힘든, 극한 상황을 볼 때였다. 마음이 약해질 때면, 극한 상황에서 사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가까이는 9호선에 끼여 산소부족에 시달리며 출근하는 사람들이, 멀리는 아무 이유 없이 테러집단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10개의 지하철 역을 지나 11분을 걷고 12층으로 올라가 13시간을 오부장의 질타 속에 살지만 그들을 보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세상 참.. 힘든 사람들이 많구나. 이불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다시 이불속에 들어오기까지, 교통사고 위, 질식 위험, 미세먼지 위험, 오부장 위험.. 우리는 매일매일을 이런 위험을 피하거나 즐기거나 또는 괴로워하며 살고 있다.
8월 3일 금요일이다.
"부장님, 오늘 저녁 퇴근은 케냐로 하겠습니다."
퇴근 후 서울역에서 공항까지 43분 만에 주파하는 열차를 탔다. 빨리 달려서 그런지 소리가 요란했다. 데이터로밍 신청 후 체크인을 했다. 비행기가 만석이라 겨우 통로 자리를 구했다. 마지막 통로 자리라며 스튜어디스분이 운이 좋았다고 웃으며 말해줬다. 이 운이 끝까지 이어지기 바라면서 비행기에 탑승했다. 고단한 일주일을 보냈다. 너무 피곤했던 탓에 좌석에 앉자마자 잠들었고, 중간에 깨긴 했지만 14시간 중 거의 대부분을 잠과 함께 했다. 그리고
나이로비에 도착했다. 새벽 5시 30분. 14시간 비행기를 탔는데 8시간밖에 안 지났으니, 시차는 6시간 정도 차이였다. 나이로비 공항은 국제공항 치고는 매우 작았다. 캐리어 수화물 나오는 칸이 통틀어 2개밖에 없어서 이곳저곳에서 오는 비행기의 캐리어를 재빨리 내려주지 못했다. 캐리어를 찾는 데까지 1시간이 넘게 걸리자 성격 급한 한국인들이 나이로비 공항 직원에게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나이로비 공항 직원이 하얀 이빨을 다 드러내면서 웃으며 한마디 했다.
"TIA!"
무슨 말인지 몰라서 한국인들이 갸우뚱거리자, 나이로비 공항 직원은 더 크게 웃으며
"This Is Africa!"
그제야 실감했다. 내가 아프리카에 오긴 왔구나. 그래! 여기는 흑형들과 동물들이 생존하는 곳. 모든 짜증이 TIA로 설명되는 곳. 여기는 아프리카 케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