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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쫑쫑 Aug 29. 2020

신세계와 일상 사이에서

오지 여행의 시작은 케냐(2)

새벽 6시. 본격적인 사파리의 시작이라는 생각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우리의 가이드인 케빈은 6시 40분 정도까지 나와서 아침을 먹고 기다리라 했다. 아침은 소시지와 토스트였다. 아침을 먹은 후 어제 같이한 무리들을 만났다. 차 안에서 각각 보고 싶은 동물들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대부분 BIG 5(사자, 표범, 코뿔소, 코끼리, 버펄로)를 이야기했다. 보통 BIG 5를 다 봤다 싶으면 성공한 사파리라 칭했다. 오늘은 마사이마라 국립공원 사파리를 하는 날이었다.


마사이마라 국립공원은 마라강을 중심으로 북쪽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라강 남쪽은 탄자니아 세렝게티다.(그래 그 세렝게티다. TV속 동물의 왕국의 그 곳. 아프리카 다큐멘터리의 대부분은 이곳에서 촬영된다.) 이곳에서 제일 유명한 것은 누떼의 대 이동이다. 누는 소의 얼굴과 말의 몸을 가진 동물이다. 얼룩말과 함께 가장 흔하게 보이는 동물 중 하나. 이 누들이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마라강을 건너며 세렝게티와 마사이마라를 위험을 무릅쓰고 드나든다. 동물의 왕국 애청자였다면 기억날 것이다. 정말 장관이다. 이 외에도 볼 것은 많다. BIG 5와 하이에나, 임팔라, 톰슨가젤, 치타, 개코원숭이 기린, 티몬, 품바 등 이 모든 것들은 마사이마라에 있었다.  

마라강을 향해 걸어가는 누 떼들

"케빈. 우리 오늘 Big 5 다 볼 수 있는거야?"

"음.  아마 힘들꺼야. 마사이마라는 정말 넓은 곳이거든."


케빈과 함께 벤이 출발했다. 조금만 나가자 초식동물들이 눈에 밟힐 정도로 많았다. 밴을 조금 움직일 때마다 다큐멘터리에서 나오는 동물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 얼룩말, 톰슨가젤, 임팔라는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저쪽으로 가보자."  케빈은 얼핏 갈색 점으로 보이는 먼 곳을 가리켰다. 조금 더 가까이 가자 갈색 선으로 보였고 근처에 가자 알 수 있었다. 대규모 누 떼의 이동이었다. 셀 수도 없을 정도의 누 떼는 강을 향해 이동 중이었다. 웅장한 광경에 압도되었다. 옆에서 임팔라들은 자유롭게 풀을 뜯고 있었는데 바스락거리는 자그만 소리만 들리면 먹이를 먹다가도 고개를 돌리며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멀리서 한두 마리의 경비병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다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말을 친히 실천하고 있었다. 여러 명이 있어야 육식동물에게 위협과 헷갈림을 줄 수도 있고, 교대로 망을 보면서 먹이를 먹기도 수월할 것 같았다. 참으로 야생스러웠다. 


생각해보면 회사도 동물의 왕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부장이 오면 멀리서 문 앞에 앉아있는(문 앞자리는 항상 신입사원 차지다) 후배가 메신저로 급히 알려주면, 신속하게 알트탭을 누르며 배경화면을 엑셀과 워드 보고서로 바꾸던 게 선하게 떠올랐다. 오부장이 휴가이거나 교육 중일 때, 부서 사람들은 수다쟁이가 됐다. 사다리 타기로 커피와 간식 쏘는 사람을 정할 때도 어찌나 화기애애하던지. 평소, 말 좀 하고 살라고 부서원들의 어깨를 툭 치고 가는 오부장은 알까? 우리가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들이라는 걸.


오후에는 마라강까지 갔다. 강 건너에는 세렝게티 초원이 펼쳐져있다.  강 근처에 차를 세우고 내려 마사이 강을 바라보았다. 초원에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사파리 투어는 기본적으로 야생을 돌아다니는 거라 하차가 자유롭지 않았다. 육식동물 때문에 먼 곳까지 잘 보이는 사방이 확 트인 곳에서만 내릴 수 있었다. 자그마한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며 우리는 서로 찍은 사진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같은 동물을 봐도 오묘하게 서로의 사진이 달랐다. 내 사진은 주로 동물에 클로즈업이 되어 있었고, 스페인 부부 사진은 동물보다도 광활한 풍경이 주인공이었다. "풍경이 너무 아름답더라고." 해맑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스페인 친구. 여기 풍경이 안 아름다운 곳이 있나?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사진도 다르게 찍힌다. 에펠탑 앞에서 사진좀 찍어달라고 유럽 사람들에게 부탁하면 에펠탑만 크게 나오고 사람은 작게 나온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물먹는 얼룩말

밥을 먹고 강을 바라보니 얼룩말 무리가 물을 마시기 위해 조심조심 내려왔다. 혹시 물속에 악어가 도사리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하며 물 앞에서 한참을 기웃거렸다. 서로 선뜻 물속에 고개를 숙이지 못하고 누군가 먼저 가서 물 맛을 봐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그렇게 물만 바라보기를 십여분. 한 마리가 참지 못하고 강 속에 고개를 묻는다. 안전함을 확인한 무리들은 그제야 뒤따라와 물을 마시기 시작한다. 바닷물 속 물고기를 잡고 싶지만 천적이 있을까봐 안절부절못하다 배고픔에 뛰어들고 마는 퍼스트 펭귄. 여기나 거기나 똑같구먼. 


마라강을 따라 걷자 하마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마는 뭍에서 널브러져서 나의 천적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마냥 대자로 누워있었다. 어떤 놈은 옆으로, 어떤 놈은 배를 디밀고, 어떤 놈은 엉덩이를 내밀고.. 움직이는 놈은 없고 다들 말없이 시체놀이만 할 뿐이다. "쟤네는 이 시간에 항상 저러고 누워있어?" 케빈에게 물었다. 케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한마디 했다.


"대부분."


대부분이라니. 먹고 싸는 시간 빼놓고는 대부분 하는 일 없이 누워만 있는 하마. 어디선가 오부장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보고서 봐라. 소제목 간격이 맞는 게 없어. 여기는 또 왜 삐져나왔냐. 이런 기본도 못하는 새끼가 무슨 보고서야. 너는 네가 나무 잘 타는 원숭이인 줄 알지만, 시키면 일처리 제대로 못하는 둔한 하마 새끼일 뿐이야. 다시 써와!!"


부르르 떠는 손으로 보고서를 내 앞에 던지면서 오부장이 말할 때 항상 나는 눈을 내리깔고 죽어있는 하마처럼 가만히 있었다. 도무지 눈을 어디다 둘 지를 몰랐다. 하마 새끼라는 말이 항상 거슬렸지만, 실제 하마를 보니 수긍이 됐다. 오부장 앞에서 죽어있는 척하는 나, 죽은 동물보다 더 죽어 있는 듯한 하마들. 진짜 죽은 건 아니겠지?

일어나 이자식들아!! 너의 기개를 보여줘!!


어느덧 오전이 다갔다. 고작 다섯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익숙하지 않은 신세계는 머릿속에 분단위로 기억됐다. 모든 경험이 첫경험이었기 때문일까. 다이내믹한 사냥 장면이 아니었음에도 머릿속이 과부하가 걸릴 만큼 한 장면 한 장면 각인됐다. 갑자기 일상 속 내가 떠올랐다. 오부장의 한마디, 버텨내던 선배들, 조용하던 사무실 등. 분명 분단위로 쪼개 보면 일상 속의 하루도 소소하게 기뻤던 일도 많았을 텐데. 나는 회사에서 지난주에 무엇을 했을까? 항상 까마득하게 우울했던 순간만 기억났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라는 말처럼 불행하거나 힘든 순간을 계속 곱씹다 보면 어느 순간 모든 기억을 침범해버리는 식이었다. 언젠간 버티다 보면 일상의 순간도 지금의 신세계같이 전율을 느끼며 기억하게 되는 한순간이 오지 않을까? 그런 순간을 꼭 기원해보며 일상을 버텨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하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자식들아 기개를 보여줘!!!!' 


눈을 뗄 수 없는 하루였다. 돌아오는 길에는 사자, 하이에나, 타조, 톰슨가젤 등의 동물을 봤다. Big 5 중 낮에 돌아다니지 않는 표범과 멸종위기종인 코뿔소는 보지 못했다. 케빈은 광활한 자연 속을 잠깐 들렸다가는 사파리란게 그런거라며 나를 위로했다. 케냐까지 가서 표범과 코뿔소를 못 봤다 하면, 몇몇은 분명히 차라리 동물원에 가지 그랬어라는 말을 할 것 같았다. 내일은 나이바샤 호수에 가는데.. 호수에서라도 못 봤던 동물을 보면 좋겠다. 주섬주섬 숙소에 누워 까먹지 않기 위해 영단어를 머릿속에 되뇌었다. '아이 원투 씨 더 리노!!', '리노, 리노' 그렇게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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