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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쫑쫑 Aug 30. 2020

펠리칸은 죄가 없다

오지 여행의 시작은 케냐(3)

케냐 여행 삼일 째. 지금은 (케냐 시간으로) 새벽 3시 30분. 휴대폰 진동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겨우 시차에 적응해 제대로 잠을 자고 있는 순간 지속되는 진동벨이 나를 깨웠다. 이 시간에 무슨 전화지, 하면서 휴대폰을 봤더니 회사 후배 별이었다.


"뭐니? 이 시간에."

"선배님... 죄송해요. 아침 9시에 카톡을 보내셨는데 아직 안 읽으셔서."

"야 이 씨! 당연하지. 새벽 3시인건데! 너가 윤은혜야? 너 일부러 그런 거지"

"아.. 그렇죠. 선배님. 죄송해요. 오부장님이 물어보셔서 너무 당황한 나머지..."

 주1) 윤은혜는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때 "왜 그리스는 새벽에 축구를 해요?"라고 말한적이 있다.


 오부장. 신혼여행 중이어도 지금 당장 전화해보라 할 사람. 그에게 쪼여본 사람은 안다. 시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름이 나오는 순간 공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구나. 무엇이 궁금하시다니?"


 일을 해결하고 전화를 끊었다. 문제를 해결하고도 찝찝한 기분이었다. 킬리만자로 산 앞의 막사에서 10,113 km의 물리적 거리를 훌 쩍 넘 어 서 광화문으로 강제 소환당하는 느낌이었다. 지구가 아닌 달여행을 하고 있어도 같은 기분이었겠지?


생각해보면 중요하지도 않은 질문이었다. 휴가를 갈 때 중요한 것들은 대부분 인수인계해놓고 간다. 나를 위해서, 남은 사람들을 위해서. 말을 하지 않은 거는 담당자가 생각하기에 일주일 정도는 버틸만한 것이다. 알면서 왜 그랬을까?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한민국 부장들은 정상보다 비정상이 더 많았다. 내가 거쳤던 여섯 명의 부장은 일이든, 술이든, 정치든, 의전이든, 골프든... 대부분 능력치가 한쪽으로만 특화되고 나머지는 꽝인 사람들이었다. 그래야 살아남는 걸까?


싱숭생숭한 기분 때문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스트레스는 장에 좋지 않다. 급 배가 아파왔고 불이 들어오지 않는 깜깜한 막사에서 휴대폰 불빛 만으로 변기를 찾기 시작했다. 새벽에 불이 안 켜지는 건 고욕이다. 발에 무언가가 걸렸고, 핸드폰을 순간 놓쳤다.


'풍덩~!'


경쾌하지만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사라지는 빛. 그리고 완벽한 어둠. 휴대폰이 변기에 빠진 것이었다. 재빨리 건져냈지만 사망한 뒤였다. 케냐 화장실에서 휴대폰을 변기에 빠트릴 줄이야. 가장 먼저 생각나는 얼굴은


오부장과 길여사였다!


휴대폰이 고장 나서 연락 못했다고 하면 비상연락망도 안 적어갔냐고 모라고 할 오부장. 요즘 애들은 고생도 생돈 내고한다며 그 돈이면 LA갈비가 몇 인분인지 아냐고 노래를 부르는 길여사(그래도 하루에 한 번씩 문자는 보내라고 하는 사람). 어떻게 하지? 광화문과 도곡동이 머릿속에 교차해 지나갔다. 에라 모르겠다,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아침 7시가 되자 새들이 요란하게 지저귀기 시작했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몸이 찌뿌둥했다. 오늘은 호수 사파리가 있는 날이었다. 보트를 타고 호수를 가르며 곳곳에 숨어있는 동물을 보는 코스였다. 찌뿌둥했지만 초원에서 본 풍경과는 다른 풍경을 접할 수 있다는 설렘이 가득했다. 막사 앞 식당으로 나와 티비를 보고 있는데, 간밤에 화재사건이 있었는지, 화재사건에 대해서 심도 있게 방영해주고 있었다. 다른 자리에서 토스트를 먹던 케빈이 내쪽으로 오며 나에게 물었다.


"쫑, 너 언제 귀국한다고 했지?"

"나 토요일. 한국에는 일요일에 도착해."

"너 잘하면 토요일에 못 갈 수도 있을 것 같아."

"응? 왜? 무슨 소리야?"

"간밤에 나이로비 국제공항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했어. 공항은 폐쇄되었고, 일단 이틀 동안은 비행기가 안 뜬데."


공항이 불에 타기도 한다

 티비를 자세히 보니 정말 공항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국제공항에 대형 화재라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일이 케냐에서는 일어난다. 이 순간 내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아..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등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휴대폰은 변기에 빠져 고장 나서 연락할 길도 없다. 여행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케빈, 급하게 한국에 연락해야 하는데 내 휴대폰이 고장 났어. 잠깐 전화 좀 써도 될까? 그리고 혹시 휴대폰 고칠 방법 없니?"


 케빈은 내 휴대폰을 보더니, 어딘가로 한참을 통화했다.


"으음. 이거는 나이로비로 가져가서 수리를 해야 해. 나이로비에 내 친구가 애플 휴대폰을 기가 막히게 고쳐. 지금 전화해보니 8만 원 정도면 된데. 휴대폰하고 8만 원을 주면 일단 이야기해볼게."


"그러니까, 너가 나이로비를 가야 하고.. 나는 이 폰과 돈을 8만 원을 맡겨야 한다는 거지?"


 원래 케빈과는 오늘 헤어지는 거였다. 케빈과 삼일 동안 친해졌지만, 아이폰과 현금을 맡길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대체 나이로비에서 어떻게 다시 만난다는 말인가? 지끈지끈 머리가 아프지만 휴대폰이 없으니 불편한 일이 많아 케빈에게 휴대폰을 맡겼다. 그리고 케빈의 폰으로 회사에 전화를 하니 아까 그 후배가 받았다.


"케냐 공항에 불이 났어. 그래서 토요일에 못 떠날지도 몰라."

"와~~ 공항에 불도 나나요? 알겠습니다. 그거 때문에 전화하셨나요?"

"폰도 고장 났어. 그래서 연락이 잘 안 될 것 같다. 이것저것 물어보면 모르는 거는 대충 얼버무려."

"헐!! 폰은 왜?"

"호수 사파리를 하다가 펠리칸이 내 폰을 쳤어. 그래서 폰이 호수에 빠졌네."


생각지도 않던 말이 튀어나왔다. " 막사에서 볼일보려다가 폰을 변기에 빠트렸어" 라는 말을 하는게 어려웠나보다. 보통 이런 말을 들으면 '에이~ 말도 안 돼요.'라던지 '어떻게 펠리칸이 폰만 그렇게 톡 건들고 가나요.' 할 법도 한데 별이는 "헐!! 역시 케냐라 그런지 스케일이 다르네요."라며 곧이곧대로 믿고 전화를 끊었다. 케냐 정도 가면 펠리칸이 폰을 친다 해도 믿는 걸까. 뒤이어 통화한 길여사는 '세상살다보면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지'라는 말투로 별 말 없이 여권과 돈은 꼭 잃어버리지 말라고만 했다. 여기서 휴대폰을 고치면 어떻게 되는거지? 이야기는 차차 지어내기로 하고, 나이바샤 호수를 향해 출발했다. 나이바샤 호수는 영화 '아웃 오프 아프리카'의 촬영지로 광활한 호수와 그 주변에 펼쳐진 초원 그리고 온갖 동물들의 천국으로 알려져 있다. 초원 사파리와는 다르게 다양한 조류를 볼 수 있는 것도 나이바샤 호수의 장점이다.


호수에 도착했고, 모터보트를 타고 사파리를 시작했다. 호수를 천천히 가르며 모터보트는 출발했고, 시원한 호수 바람이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5분 정도 호수를 나아가다 보니 많은 동물들이 눈 앞에 펼쳐졌다. 나무 위의 독수리, 얼굴을 반만 내밀고 물속에 있는 하마들, 이름 모를 새들까지.. 호수 앞 언덕에는 기린과 얼룩말, 누가 풀을 뜯고 있었다. 이렇게 시야 가득히 호수와 초원, 하늘이 꽉 찬 풍경을 보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 사이에 오밀조밀하게 들어가 있는 동물들은 덤이었다. 이 풍경을 눈으로 보고 있으니


정신이 멍해졌다.


이 풍경을 표현할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 좋은 풍경을 보면 말조차 나오지 않는 멍한 상태가 온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시간과 공간이 멈추어있는 멍 한 상태. 이 느낌을 또 만날 수 있을까? 보트가이드(아삼)가 시동을 끄고 나무에 앉아있는 물수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리고는 버켓 속 작은 물고기를 하늘로 높이 물수리를 향해 던졌다. 물수리는 물고기가 호수에 떨어지기전에 날렵하게 낚아채갔다. 평소같으면 무덤덤하게 넘겼을 이런 인위적인 상황에 환호성을 질렀다. 케냐 호수라는 특수한 환경이 나를 더 흥분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펠리칸아 미안하다.


"Great! Beautiful!"


옆에 있는 말레이시아 여성 두 명이 탄성을 질렀다. 눈 앞에 펠리칸이 지나간 것이다. 호수 위를 스치듯 낮은 포복 자세로 날아가는 펠리칸의 모습은 늠름했다. 저렇게 늠름한 펠리칸을 죄인으로 만들다니… 나는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펠리칸이 휴대폰을 쳐서 호수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지어냈다. 이야기에 살이 붙어 아삼(가이드)이 핸드폰을 호수 속에서 재빠르게 낚아챘다는... 아프리카 사람들은 운동신경이 진짜 좋다라는 속편까지 만들었다. 이 글을 쓰니 속이 참 후련하다.


이제야 말할 수 있다. 케냐 김종열 휴대폰 고장사건은 본인이 불꺼진 막사에서 똥누러가다 휴대폰을 변기에 빠트린 참극이라는 것을. 펠리칸을 티비에서 볼때마다 살짜기 미안했다.


이제야 제대로 말할 수 있다. 펠리칸은 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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