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이 아니라, 마음의 근육을 생각하게 되었다
요즘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세무사 시험을 5년 준비해서 합격했는데,
이력서를 열 군데 넘게 냈지만
연락이 오지 않는다고.
합격이 끝이 아니었다는 말.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지금이 아니라
20년 전으로 돌아갔다.
티오가 줄어들던 해.
열심히 하면 올라갈 수 있다고 믿었는데
어느 날부터 사다리가 하나둘 사라지던 시기.
나는 그때
공부 의욕을 많이 잃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배웠는데
세상이 먼저 변해버리는 경험을 했으니까.
그래서인지
요즘 AI 이야기, 전문직 위기 이야기,
일자리 감소 이야기들을 들으면
아이 미래보다
내 과거가 먼저 흔들린다.
아이 셋을 키우고 있다.
아이들이 잠든 밤이면
괜히 이런 생각이 올라온다.
내가 잘못된 방향으로 밀고 있는 건 아닐까.
괜히 안정이라는 말에 매달려
아이의 결을 꺾는 건 아닐까.
어느 날,
누군가가 아이가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 엄마는 막막했다고 한다.
“이 길이 아직 괜찮은 걸까?”
그 질문을 듣는데
남의 일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이가 힘들게 공부했는데
도착했을 때 그 자리가 사라져 있을까 봐
그게 무섭다.
노력했는데도
구조가 바뀌어버리는 경험을
나는 이미 한 번 겪었으니까.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직업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직업의 방식이 바뀌고 있는 것 같다.
세무사는 단순 신고에서 전략으로 이동하고,
변호사는 서면 작성에서 협상과 전문성으로 이동한다.
AI는 직업을 없애기보다
평균을 없애는 도구에 가깝다.
중간은 사라지고
깊은 사람만 남는 구조.
그래서 더 무섭다.
나는 한동안
아이의 미래를 설계하려 했다.
이 대학이면 안전할까.
이 자격증이면 버틸 수 있을까.
이 길이면 망하지 않을까.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달았다.
그건 아이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
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세상이 불안할수록
우리는 통제하려 한다.
아이의 성적을,
아이의 시간표를,
아이의 진로를.
그런데 나는 안다.
내 인생도
통제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
넘어지고, 흔들리고,
다시 일어서면서 왔다는 걸.
그래서 요즘은 질문을 조금 바꾸고 있다.
어떤 직업이 안전할까 대신,
이 아이는
길이 막히면 다시 설계할 수 있는 사람일까.
AI를 두려워하기보다
도구로 쓸 수 있는 사람일까.
실패해도
자존감이 무너지지 않는 사람일까.
직업은 바뀔 수 있지만
마음의 근육은 남는다.
나는 이제
아이를 특정 직업 위에 올려놓기보다
어디에 두어도 스스로 설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
그래서 집에서 하는 일도 조금 달라졌다.
책을 읽고
“왜 그렇게 생각했어?”라고 묻는다.
수학 문제를 맞히는 것보다
“이 공식은 왜 생겼을까?”를 같이 고민한다.
AI를 금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같이 써본다.
그리고 아주 작은 돈이라도
스스로 벌어보게 하고 싶다.
세상과 연결되는 감각을
너무 늦게 배우지 않도록.
나는 아직 불안하다.
AI 시대, 전문직의 미래,
예측할 수 없는 구조 변화.
하지만 이제는
완벽한 길을 찾으려 애쓰기보다
어디서든 설 수 있는 힘을 주는 쪽으로
마음을 조금 옮겨보려 한다.
아이는 내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니까.
나는 오늘도
선택하기 전이다.
아이를 위해 선택하는가,
아니면
내 두려움을 위해 선택하는가.
아직 답은 없다.
하지만 질문은
조금 더 선명해졌다.